구겨지는 것은 아주 흔한 현상이다. 종이나 옷, 비닐 포장지, 알루미늄 호일 등 주변의 많은 것들이 구겨진다. 차 사고가 나면 차 앞부분은 충격을 흡수하면서 쉽게 구겨진다. 얼굴에 생기는 주름도, 수분이 빠지면서 생기는 과일의 주름도 구겨지는 현상이다.
미시 세계에서도 구겨지는 현상이 보인다. 피 속을 돌아다니는 적혈구나 백혈구가 비좁은 모세혈관으로 들어가려면 세포막이 접히고 휘어야 한다. 거시적으로는 지층이 서로 충돌하고 구겨지면서 산이 생겨난다. 이런 구겨짐 현상에 혹시 공통점은 없을까. 1990년대 중반 미국 시카고대의 물리학자들이 구겨진 종이를 연구하기 시작한 계기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구겨진 종이 속에 산이 숨어 있다
당시 시카고대 물리학과 박사과정 학생인 알렉스 롭코브스키는 박사논문으로 특별한 주제를 선택했다. 그것이 ‘구겨진 종이의 물리학’이다. 그는 지도교수인 토마스 위튼을 비롯해 동료들과 함께 구겨지는 현상에 보편적인 특성이 있는지 조사했다. 구겨진 종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산악지대를 닮았다. 산봉우리처럼 뾰족한 모서리 부분과 그 사이를 잇는 산등성이 모양의 좁고 긴 부분들로 이뤄져 있는 것이다. 이런 모양을 직접 연구하는 일은 컴퓨터가 발전한 지금도 대단히 복잡하다.
그래서 연구팀은 구겨진 모양을 아주 단순하게 가정했다. 즉 두 개의 뾰족한 부분과 그 사이의 능선 하나만 있는 단순한 모양을 구상해 이론적으로 따져본 것이다. 연구팀은 구길 때 들어간 에너지가 어디에 쌓이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에너지가 구겨진 종이에 골고루 분포해 있는 게 아니라 능선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구겨짐 현상은 물질의 종류에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종이, 비닐, 금속 등 소재가 달라도 구겨질 때 나타나는 패턴은 비슷했다. 구겨지는 대상의 넓이는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연구자들도 예상 못했던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그들은 종이가 커질수록 구기는 데 드는 에너지가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결과는 예상보다 적게 늘어났다. 예를 들어 너비가 8배나 커 넓이가 64배나 늘어나도 구기는 데 드는 힘은 고작 2배만 늘어났다.
이 연구 결과는 1995년 12월 1일자 과학지 ‘사이언스’에 발표됐다. 구겨진 종이를 수학적으로 풀어보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그로부터 15년이 넘었지만 물리학자들은 여전히 구겨진 종이를 완벽하게 수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힘 센 장사나 10살 소녀나 구기는 힘은 거기서 거기
롭코브스키는 1996년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를 지도한 위튼 교수는 구겨짐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하고 있다. 가장 흥미를 끈 연구는 2002년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발표된 것이다. 핵심은 힘 센 장사나 10살 소녀나 구기는 정도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한번 종이를 구겨보자. 그러고 나서 좀 더 작게 구겨보자. 점점 힘들어진다. 마치 단단한 물체인양 더 이상 줄어들려고 하지 않는다. 왜 구겨진 종이는 단단해지는 걸까. 연구팀은 이 의문을 파헤치고 싶었다.
그들은 스스로 ‘아주아주 유치하고 바보 같으며 간단한 실험’이라고 말했던 실험에 돌입했다. 너비가 34cm이고 두께가 12.5μm밖에 안 되는, 둥근 모양의 플라스틱 필름을 너비가 10.2cm인 원통 안에 넣고 그 위로 피스톤을 눌러 필름을 구기는 것이었다. 이 필름의 이름은 마일라(Mylar)로 알루미늄을 덧댔다.
연구팀은 누르는 힘에 따라 마일라가 담긴 원통의 높이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측정했다. 한번 구겨진 마일라를 좀 더 구기는 데 필요한 힘이 얼마나 되는지도 확인했다. 그랬더니 필요한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구기기 전 평평한 상태에서는 무척 약했던 마일라 필름은 구겨질수록 엄청나게 단단해졌다. 구겨진 종이공의 지름을 반으로 줄이려면 무려 64배나 더 센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힘 센 장사나 어린 아이나 종이를 구겼을 때 나온 결과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도자기 그릇처럼 깨지지 쉬운 것을 포장할 때 사이사이에 구긴 신문지를 끼어 넣어 충격을 줄이는 일은 아주 현명하다.
구겨진 종이가 얼마나 단단한지에 대한 실험 결과는 사실 예전에 이론 연구에서 예측했던 바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종이를 얼마나 작게 구길 수 있느냐는 ‘얼마나 세게 구기느냐’에도 달려 있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힘을 주느냐’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피스톤으로 일정한 힘을 가했을 때 마일라가 구겨지면서 원통의 어느 높이까지 쭈그러들지 금방 확인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원통의 높이는 조금씩이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낮아졌다. 3주가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연구에 참여한 시드니 나겔 교수는 “3주는 너무 지루해 우리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 한계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구겨진 종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단단함이 점점 줄어들었다. 왜일까.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75% 공기인데 왜 단단할까?
구겨진 종이의 물리학에서 최대의 의문은 어떻게 얇고 찢어지기 쉬운 종이 같은 것이 구겨지는 것만으로 그렇게 단단해지냐는 것이다. 2002년 시카고대 연구팀의 조사결과, 아무리 세게 구겨도 구겨진 종이공 안은 75% 이상이 공기였다. 얇은 종이들이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텅 빈 공간이 훨씬 많다는 얘기다.
당시 시카고대 연구팀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구겨진 종이공의 크기를 줄이려면 뾰족한 부분과 능선이 더 많이 생겨나야 한다.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는 등선 부분이 더 짧게 접혀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종이를 접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 일반적으로 종이는 반으로 계속 접었을 때 7번까지만 접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상은 어마어마하게 세게 눌러야 한다.
2007년 미국의 케이블 방송채널인 디스커버리의 ‘미스버스터(Mythbuster)’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축구장만한 얇은 종이를 몇 번이나 접을 수 있을지 조사했다. 이때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 때 쓰는 장비인 스팀롤러까지 동원했더니 7번이 아니라 11번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아직까지 추측일 뿐이다(종이를 계속해서 접을 수 없는 이유를 소재 측면에서 이해하려면 과학동아 2011년 1월호 ‘꿈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기사 참고).
양배추 속 벌레는 안을 조금만 돌아봐도 자신에게 필요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둘러싸고 있는 잎의 굴곡을 통해서 양배추의 중심이나 원래 위치로 부터의 거리, 밖으로 나가는 지름길을 쉽게 알아낸다.
반면 구겨진 종이 안에 사는 벌레가 있다고 치자. 이 경우는 벌레조차도 길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구겨진 종이만 봐서는 어디가 바깥으로 나가는 방향인지, 자신이 얼마나 이동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구겨진 종이 내부는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공통된 특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구겨진 종이는 바깥쪽이 밀도가 가장 높고 안쪽이 가장 낮았다. 또 종이는 대체로 나란하게 구겨졌다. 연구팀은 바로 이 점이 구겨진 종이가 단단한 이유가 아닐까 예측했다. 얇은 종이가 여러 겹을 이루면서 벽이 되어 단단해진다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구겨진 종이의 물리학이 발전할수록 인류에게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충격을 더 잘 흡수하는 자동차가 등장하고, 우리 얼굴에 있는 주름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첨단 나노소재인 그래핀과 같은 것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물리학자들은 요즘엔 컴퓨터단층촬영(CT)까지 동원해 구겨진 종이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