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신성 폭발 잔해에서 중성자별이 탄생하는 모습. 중성자별 표면의 중력은 지구의 2000억 배다. 조금이라도 튀어나오거나 들어간 곳을 그냥 두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양은 무엇일까. 네모? 세모? 동그라미? 물방울, 해변의 조약돌,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을 보면 동그라미가 네모나 세모보다 우세해 보인다. 지구조차 동그란 걸 보면 자연은 동글동글한 공을 편애하는 듯하다.
콧대 높은 인간도 동그라미를 사랑하는 것 같다. 축구, 배구, 농구, 골프와 같은 온갖 스포츠를 발명해 공에 열광하는 걸 보면 말이다. 고대 아즈텍 문명이라든가, 이집트 문명에서 벌써 인간은 공 같은 둥근 물체를 갖고 놀았다는 흔적이 발견됐다.
언제부터 공을 만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인간은 분명 아주 오래 전부터 동그란 것을 만들어 왔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이 공을 만드는 재주는 얼마나 발달했을까. 혹시 자연보다 앞서 있는 건 아닐까.
자연의 대표주자, 중성자별
인공위성이 찍은 지구 사진을 보면 그야말로 완전한 구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구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은 높이가 9000m에 달하고, 바다 속 가장 깊은 구멍인 마리아나 해구는 무려 1만m가 넘는다. 고작 2m도 되지 않는 인간의 눈에는 어마어마해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구는 상당히 둥근 편이다. 울퉁불퉁한 정도가 반지름의 0.2%도 안되니 말이다. 실제로 지구는 당구공보다 둥글다.
사실 우주에는 지구처럼 둥근 것들이 흔하디 흔하다. 태양계 안만 봐도 태양을 비롯해 9개의 행성, 그 주변을 도는 위성들이 동글동글하다. 그렇다면 우주에서 가장 둥근 건 과연 뭘까. 과학자들은 중성자별이라고 답할 것이다.
태양과 같은 천체들이 동그란 이유는 중력 때문이다. 중력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다. 막대한 질량을 가진 우주의 천체는 그 자체의 중력만으로도 동그란 모양을 갖게 된다. 만약 어디 한쪽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다면 중력은 안으로 끌어당겨 쏙 들어가게 만든다. 그러니 자연은 동그란 공을 편애하는 것이다.
천체 중에서도 유독 중성자별이 둥근 이유는 우주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천체이기 때문이다. 중성자별은 간단히 말하면 죽은 별의 잔해다. 태양처럼 스스로 빛과 열을 내는 별이 연료인 수소와 헬륨을 다 태워 연료가 바닥나면 자체 중력으로 수축해 점점 작아진다. 마지막에는 폭발하고 마는데(초신성 폭발), 이때 별의 질량이 태양의 1.4배에서 2배 사이면 폭발 잔해에서 생기는 중력의 힘으로 중성자별이 생겨난다.
고밀도의 별에서는 원자 안에서 움직이는 전자가 아주 빽빽해져 아주 좁고 제한된 범위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마치 출퇴근 시간 전철 안에 사람들이 꽉 차서 서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처럼 말이다. 이런 상태를 축퇴(degenerate)라고 하는데, 별이 백색왜성 크기로 작아지면 축퇴 상태의 전자가 만들어내는 압력으로 수축하려는 중력을 버틴다.
만약 별이 더 무거우면 중력이 훨씬 강하므로 핵이 더 단단히 뭉친다. 그러면 전자의 축퇴압으로도 중력을 버티지 못해 양의 전기를 띤 원자핵과 음의 전기를 띤 전자가 붙어 중성자 덩어리가 된다. 결국 온통 중성자만으로 이뤄진 천체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중성자별이다.
중성자별의 존재가 확실시된 것은 1968년 영국의 A. 휘시 등이 발견한 펄서(pulsar)가 중성자별과 같은 이름으로 정해지면서부터다. 중성자별은 영국 연구진이 발견한 전파 펄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X선 별로 관측됐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제 중성자별의 밀도를 살펴보자. 1911년 러더퍼드는 원자가 대부분 비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원자가 잠실야구장만 하다면 원자의 질량 99.9%를 가진 원자핵은 고작 완두콩만 할 뿐이다. 그런데 중성자별에서는 밀도가 훨씬 높다. 중력이 워낙 강해서 원자의 어마어마한 빈 공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중성자별은 대략 태양의 1.4배에서 2배 사이의 질량을 지니고 있으며 반지름은 태양의 6만분의 1에 불과한 약 12km정도다. 중성자별의 밀도는 3.7×1017∼5.9×1017kg/m3 정도로 원자핵의 밀도인 3×1017kg/m3와 비슷하다. 즉 중성자별은 거대한 원자핵인 셈이다.
중성자별 표면의 중력은 지구에 비해 무려 2000억 배나 높다. 이렇게 강력한 중력은 조금이라도 튀어나오거나 들어간 곳을 가만 놔두지 못한다. 중성자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해봐야 높이가 고작 5mm도 안 된다. 중성자별 반지름에 100만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인간의 최고작 자이로스코프 유리구슬
2004년 인간은 중성자별을 대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구슬 네 개를 우주로 쏘아 올렸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스탠퍼드대 연구팀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중력탐사B’라는 이름의 우주선을 우주로 발사했다. 구슬 네 개는 우주선 안에 있는 핵심적인 실험 장치다.
이산화규소로 만든 이 유리구슬은 지름이 3.81cm로 탁구공 만하다. 어느 정도로 둥글까. 유리구슬에서 가장 높이 튀어나온 부분과 가장 깊이 들어간 부분의 높이 차가 고작 10nm(나노미터, 1nm=10억분의 1m)에 불과하다. 이 구슬을 지구만큼 키워보자.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해봐야 겨우 1.5m다. 이는 구슬의 반지름에 대해 1000만분의 4도 안되는 수준. 100만분의 1도 안되는 중성자별보다 더 완벽한 구라는 얘기다.
이 유리구슬이 우주로 날아간 이유는 아인슈타인의 우주를 검증하기 위해서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흔히 침대시트 위에 무거운 볼링공이 놓여있는 상황에 비유된다. 침대시트는 시공간, 볼링공은 지구와 같은 질량이 있는 물체로 생각하면 된다. 평평한 시트 위에 볼링공을 놓으면 시트가 움푹 들어간다. 시공간이 휜 것이다. 시트 주변에 작은 구슬을 놓아보자. 작은 구슬은 시트의 경사면을 따라 무거운 공으로 향한다. 휜 시공간이 작은 구슬을 볼링공 쪽으로 이동하게 한 것이다. 휜 시공간은 아인슈타인의 우주를 설명하는데 핵심 원리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지구와 같은 천체가 자전하면 주변 시공간이 천체의 회전방향으로 끌려 당겨진다. 이를 틀끌림 현상이라고 한다. 마치 우유에 초콜릿을 넣고 숟가락으로 돌려 저으면 초콜릿이 회오리 모양으로 뒤틀려지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아인슈타인의 우주에서 나타나는 휜 시공간과 틀끌림 현상을 검증하려면 아주 정밀한 자이로스코프가 필요하다. 자이로스코프는 임의의 축을 중심으로 자유로이 회전할 수 있는 장치로, 틀이 기울어져도 자신의 위치를 유지한다. 덕분에 아주 정밀한 수준으로 방향을 정해준다. 그래서 방향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장치들, 항공기, 선박, 심지어 우주망원경에도 자이로스코프가 들어 있다. 심지어 터널을 뚫을 때 방향을 제대로 확인할 때도 자이로스코프를 쓴다. 땅속에서는 위성항법장치가 쓸모없는데다, 나침반은 부정확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자이로스코프로는 지구의 미약한 중력에 의해 나타나는 일반 상대성이론의 효과를 검증하기가 어렵다. 1년에 고작 1000만분의 1도쯤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시간 동안 1조분의 1도를 벗어나지 않고 방향을 유지하는 자이로스코프가 필요하다. 그런 자이로스코프는 완벽한 구 모양이어야 하고 순수한 물질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자이로스코프를 만들기 위해 NASA와 스탠퍼드대 연구팀은 브라질에서 캐낸 석영 광물을 택했다. 그런 다음 순수한 이산화규소로 정제하기 위해 독일로 보냈다. 독일에서는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녹였다 굳혔다. 이를 통해 연구팀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물질을 얻어냈다. 그런 다음 오랜 시간 갈고 닦아서 가장 완벽한 유리구슬이 완성됐다. 이 유리구슬은 내부에 이산화규소 외 다른 물질이 100만 개 중 2개만 있을 정도로 순수하다. 이렇게 순수하고 완벽한 구 모양인 자이로스코프는 우주 상공에서 몇 년 간의 관측을 통해 아인슈타인의 우주가 옳았다는 걸 확인해줬다.
그리고 2004년 9월 이 구슬은 인간이 만든 가장 둥근 물체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런데 2008년 호주에서 가장 둥근 물체를 만들어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렇다면 현재 인간의 최고 작품은 바뀐 걸까?
2008년에 등장한 경쟁자, 실리콘 공
새로 등장한 공은 지름이 93.75mm로 손 위에 딱 올려놓을 수 있다. 재료가 반도체 소재인 실리콘(규소)이고 질량은 1kg이다.
이 공은 완성되기까지 3년의 세월이 걸렸다. 처음 러시아에서 출발해 독일을 거쳐 호주에서 완성됐다. 우선 러시아에서 과거 핵폭탄에 필요한 우라늄을 정제하는데 썼던 원심분리기를 통해 오직 한 종류인 실리콘-28 동위원소만으로 이뤄진 실리콘 덩어리를 얻어냈다. 그런 다음 실리콘 덩어리는 독일의 표준연구소(PTB)로 이동해 원기둥 모양의 거대한 실리콘 결정으로 키워졌다.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5kg 단위로 잘라졌다. 마지막으로 호주 정밀광학연구소에 있는 광학렌즈의 대가 애킴 라이스트너에게 왔다. 이곳에서 3개월 넘게 정밀광학자들이 손수 갈고 닦아 지름 93.75mm, 1kg의 둥근 공으로 완성한 것이다.
이 공은 어디에 쓰기 위해 만든 걸까. 바로 프랑스 파리 근교에 있는 130여 년된 국제킬로그램원기를 대체하기 위해서다. 킬로그램이란 질량의 단위는 시간, 길이와 달리 물리적인 대상, 즉 국제킬로그램원기를 표준으로 한다(과학동아 2011년 3월호 ‘굿바이! 킬로그램의 어머니!’ 기사 참고). 문제는 이 표준 원기가 시간이 오래되면서 점점 신뢰도가 떨어진 것이다. 국제표준전문가들은 킬로그램원기를 대체할 뭔가를 찾고 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실리콘 공이다.
표준과학자들은 1kg을 어떤 물리적 사물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뭔가에 기대고 싶어한다. 그 중 하나가 원자의 질량이다. 바로 ‘실리콘 원자 몇 개가 1킬로그램이다’는 식이다. 현재 거리의 단위인 1m는 ‘빛이 진공에서 2억 9979만 2458분의 1초 동안 진행한 경로의 길이다’라고 정의하는 방식이다. 원자의 질량으로 킬로그램의 단위를 재정의하려는 국제 연구는 ‘아보가드로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보가드로 프로젝트에서는 특정한 원소의 원자 몇 개가 1kg인지 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연구팀은 반도체 소재인 실리콘을 선택했다. 반도체 기술로 실리콘을 가공하는 기술이 많이 발전돼 있어서다. 연구팀은 1kg짜리 실리콘 공이 필요했다. 완벽한 공을 만들어 공의 부피를 알아낸 후 공을 이루는 실리콘 원자 간의 간격을 알아내면 그 안에 몇 개의 원자가 들어있는지 계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93.75mm짜리 실리콘 공은 가장 많이 튀어나온 부분과 가장 깊이 들어간 부분의 높이차가 35nm에 불과하다. 지구 크기로 부풀리면 최고봉의 높이가 2.4m밖에 안된다. 결국 이 실리콘 공이 앞서 말한 자이로스코프 유리구슬을 앞지른 건 아닌 것이다.
최근 국제도량형위원회는 새로운 1kg을 정의하면서 실리콘 공(Silicon Sphere for Abogadro Project) 대신 플랑크 상수를 선택했다. 문제는 정확도였다. 1kg짜리 실리콘 공안에 얼마나 많은 규소 원자가 있는지를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게 그 안에 들어있는 원자의 개수가 무려 1024개나 된다. 아쉽게도 실리콘 공은 인간이 만든 가장 둥근 공도 아니고 새로운 1kg의 정의로도 뽑히지 못했다.
전자로 뒤집힌 승패
여기까지는 중성자별보다 완벽한 구를 만들어낸 인간이 자연보다 앞선 듯 했다. 하지만 2011년 5월 과학지 ‘네이처’에 논문 한편이 발표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주인공은 우주에 떠 있는 천체가 아니라 아주아주 작은 전자였다. 전자는 이제까지 관측한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한 구 모양이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완벽한 구에서 0.000000000000000 000000000001cm, 그러니까 1×10-27cm 벗어난 정도다. 이는 전자를 지구 크기로 부풀려서는 감을 잡을 수 없다. 태양계만큼 키워야 한다. 그래도 머리카락 한 올 두께만큼 울퉁불퉁할 정도로 둥글다. 인간이 걸어온 무모한 도전에 자연은 아주 작은 전자로 크게 한 방 날려버렸다.
전자의 모양은 영국 런던 임페리얼대의 물리학 연구팀이 10년 이상 관측해서 얻었다. 그런데 반지름이 고작 약 2.8×10-15m인 전자를 어떻게 볼 수 있었을까. 사실 직접 관측한 것은 아니다. 연구팀은 플루오린 이테르븀(YbF3)이라는 희토류 분자를 골라 그 안에 있는 전자들의 운동을 매우 정밀한 레이저로 조사했다. 만약 전자가 완벽한 구가 아니라면 분자의 모양도 찌그러져 있을 것이고 흔들림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연구팀이 10년 이상 실험을 했지만 어떤 흔들림도 관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자의 모양이 거의 완벽에 가깝다는 점은 물질과 반물질의 비대칭성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에게 아주 중요하다. 우주가 탄생했을 때 물질과 반물질이 같은 양만큼 생겨났지만 오늘날 우주는 물질 투성이고 반물질은 거의 관측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물질과 반물질의 비대칭성인데, 왜 그런지는 현재 물리학의 최대 난제 중 하나다.
일부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물질을 편애하는 이유를 기본입자의 모양으로 설명하려 했다. 예를 들어 전자가 찌그러진 모양을 하고 있다고 가정한 것이다. 그러면 전자의 전하 분포도 고르지 못해서 전자의 반물질인 양전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고 결국 물질만 남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번에 발표된 연구는 이런 이론들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연구에 참여한 에드워드 힌즈 교수는 “물리학자들은 반물질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은 모른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몇 가지 그럴듯한 설명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둥근 물체를 만들어내는 싸움에서 인간은 자연에 완패했다. 앞으로 전자보다 더 완벽한 공이 나타날까. 자연의 능력이 어디까지일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