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 맞아. 계속 안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아서 불안해.”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뭔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최근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극심한 공포를 가져다 준 사건은 아무래도 일본 지진이 아닌가 싶다. 일본 지진은 우리 사회에서 전에는 볼 수 없던 극심한 불안심리를 불러일으켰다. 오죽하면 학부모들 사이에서 ‘방사능 비’가 걱정된다며 자녀의 등하교를 거부하는 운동까지 일어났을까. 공포의 감정은 연쇄적으로 퍼져나간다. 공포는 생존을 위협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감정과 연관된 기억은 가장 오래 남는다. 그중에서도 공포와 불안에 대한 기억은 무엇보다 강력하다. 한번 일어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자연재해는 우리 마음속에 내재돼 있는 가장 강렬하고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공포는 우리의 의식구조 속으로 슬금슬금 들어와 불안과 두려움을 채워넣는다.
문제는 이런 기억이 자리 잡히면 나중에 약간이라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사람을 패닉 상태로 빠뜨린다는 것. 옛 속담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가 이런 상황에 딱 들어 맞는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매일 비슷한 일을 겪으며 살아간다. 이런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할 때 신경증으로 발전한다.
또는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공황장애는 이전에 겪었던 일이 또다시 일어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패닉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공황장애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나타나기 때문에 ‘가짜 공포반응’이라고도 불린다. 극단적인 불안 증상이 나타나고 가슴이 답답하며 숨이 차는 신체증상이 동반한다. 증상이 심해지면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됨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스트레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까.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이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신경증적인 증세가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슬픔에 대처하는 자세
필자의 병원을 방문한 상담자 중에 이제 막 마흔 줄에 들어선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우울과 불안 증세가 심해져 병원을 찾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있으면 괜찮지만 혼자 있으면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든다고 말했다.
불안의 원인을 찾기 위해 필자는 그녀의 과거를 물었다. 그녀는 유독 주변 사람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이 많았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시아버지는 그녀가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 암을 선고받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이어 시어머니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얼마 후에는 친정어머니와 그녀의 동생이 갑자기 운명을 달리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했다. 그녀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오래갔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증상이 시도때도 없이 계속되고 제대로 먹지도, 잘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상실감이 지나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증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병원에도 가봤지만 뚜렷한 병명을 얻을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만일 제가 좀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슬픔 정도는 며칠 만에 훌훌 털어버리지 않았을까요? 저는 정신적으로 나약해서 불안과 우울감에 사로잡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자신이 모자라서 병을 키운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필자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슬픔의 원인을 자신에게 찾는 자책감이었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극복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가까운 사람들을 연이어 잃으면 그 어떤 때보다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 필자는 그녀에게 그녀가 힘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여진에 비유했다. 큰 지진이 일어난 뒤에는 어김없이 여진이 뒤따른다. 여진은 우리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떤 항의도 할 수 없으며 고스란히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그녀가 겪은 일도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상실감으로 괴로운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자신이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상태는 호전되지 않는다. 필자는 자책감에서 벗어날 때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슬픈 기억을 억지로 잊으려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치유되도록 해야 한다. 죄책감은 슬픔을 아픔으로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문제도 겪을 만큼 충분히 겪으면 저절로 나아진다”고 말한다. 또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치유될 거라는 말도 자주 한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긴 하다. 하지만 힘든 일을 힘들다고 느끼는 것은 날씨가 나쁠 때 나쁘다고 느끼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힘든 일을 억지로 빨리 마음속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것은 마치 아직 전세기간이 많이 남았는데 강제로 집을 비우라고 독촉하는 것과 같다.
흔히 힘든 일은 겪은 사람에게 “당신보다 더 힘든 일을 겪은 사람을 생각해 봐라. 빨리 일어나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말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아, 내가 이렇게 연약한 사람이구나” 하는 자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런 위로는 일종의 의무감에 사로잡혀 건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네가 이렇게 힘든 일을 겪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니. 네 마음이 정말 아프겠구나”라는 말로 위로해주는 것이 옳다. 그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러다 보면 힘든 감정도 서서히 사라져 가게 마련이다.
자연을 이기는 법은 일단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듯이 마음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서두르고 지름길만 바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마음의 치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