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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의 불 밝힌 유영숙 박사

WISE 거점센터장상 경기 돌마고 1학년 양서정



어릴 때부터 꿈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난감했다. 주위에서 어떤 직업을 가지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긴 했지만 마음깊이 흥미가 생기지도, 열렬한 소망이 생기지도 않았다. 대학입시와 진로에 대해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야 하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내가 과연 원하는 일, 내가 행복하게 일하고 세상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일은 무엇일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던 중 여성과학자에 대한 에세이 공모전 소식을 접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그동안 막연히 그리던 나의 꿈과 미래에 구체적으로 다가서는 계기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한국 과학계를 이끌어가는 여성과학자를 조사하며 유독 관심을 끄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부원장 유영숙 박사다. 의사라는 직업을 막연히 동경하던 내게 의학과 관련 깊은 생체과학 분야의 권위자인 유 박사를 만나는 것은 큰 행운이자 도전이 될 것 같았다. 용기를 내 인터뷰를 요청했고, 다행히도 유 박사는 흔쾌히 수락했다.



유 박사를 만나기 위해 KIST에 처음 찾아갔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입구에서부터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는 것을 보고 과학기술이 국가안보에 대단히 중요한 것임을 실감했다. 과학기술자 개인과 국가의 관계, 과학자로서의 삶이 주는 긴장감과 자부심 등, 과학자 직업에 대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마침내 KIST에서 유 박사를 처음 봤을 때, 여성과학자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무너졌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피곤하고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을 보여줄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달리 유 박사는 온화한 인상으로 맞이해줬다.



유 박사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는 여학생이 자연계열에서 공부하는 것을 선호하지도 않았고, 공부할 만한 여건도 부족했다. 수학, 생물, 화학, 공학 등 자연계열이나 이공계열을 전공한 뒤의 진로는 대부분 남자들의 차지였다. 지금의 나처럼 소녀 유영숙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구체적인 꿈이 없었다.

유 박사는 존경하는 담임선생님이 수학선생님이라는 이유로 자연계열을 선택했다. 이화여대에 입학해 전공으로 화학, 부전공으로 생물을 선택했으나, 대학 4학년이 될 때까지도 계속 공부를 할지, 졸업 후 결혼해서 가정주부로 살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자도 여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기세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을 바꿔 대학원 입학시험에 도전했다. 꼭 박사학위를 받아서 나중에 자신이 겪은 방황을 거울삼아 후배들에게 올바를 길을 제시하고픈 바람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생화학을 전공하며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대장균으로부터 리보핵산을 분리하고 인위변이를 만들어 생화학적인 특성을 연구했다. 연구를 진행하며 리보핵산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분해되면서 몇 달씩 진행해온 연구결과물을 폐기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시행착오를 계속하면서예정된 논문발표도 할 수 없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염기서열 분석실험을 하면서 너무 쇠약해져 쓰러지기까지 했다. 그런 위기 때마다 유학 초에 품었던 꿈을 생각하며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미국 오리건대에서 박사학위를 딴 뒤, 스탠퍼드대 의대에서 박사후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도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치열한 논문경쟁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쥐의 뇌조직과 부신수질이라는 장기를 떼어내어 조절반응을 분석하는 연구를 할 때는 실험용 쥐를 직접 죽여야 하는 공포감을 극복해야만 했다.

박사후 연구원을 마친 뒤에는 대학교수, 연구원, 기업 연구원이라는 세 가지 갈림길에 다다랐다. 유 박사는 이중에서 다방면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 KIST의 연구원을 택했다. 생체고분자물질 분석 및 세포 내 신호전달기전과 질병치료제 개발에 집중하던 그는 KIST가 자신의 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여겼다.



KIST에 온지 20년이 된 유 박사는 최근에는 융합학문인 통합생물학(systems biology)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통합생물학은 단일학문으로는 생명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개념에서 출발한 학문이다. 세포가 외부자극에 반응할 때 세포내의 신호 단백질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핵 안 신호전달을 통해 어떤 생물학적 반응이 일어나는지에 관한 복합적인 연구를 수행한다.



유 박사는 올초 융합연구를 중점으로 한 테라그노시스(theragnosis), 바이오닉스(bionics), 메타볼로믹스(metabolomics) 등 신기술 개발 계획을 언론에 발표한 바 있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런 새로운 연구 분야는 생물학, 전자공학, 생화학, 약리학, 의학, 기계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만나 응용된 것들이다. 이런 융합학문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다. 유 박사는 KIST야말로 이러한 첨단 융합학문을 수행하기에 유리한 곳이라고 강조했다.



유 박사와의 인터뷰가 끝나갈즈음, 우리나라의 연구자가 언제쯤 노벨과학상을 받을 수 있을지 물었다. 유 박사는 2009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이스라엘의 여성과학자 아다 요나스의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요나스 박사는 “노벨상을 목표로 삼지 말고 열정을 갖고 한 분야에 끊임없이 매진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장애물을 넘어서 남들이 못했던 연구를 하게 된다. 호기심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라고 했다. 유 박사는 청소년이 크고 멋진 꿈을 꾸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내비췄다. 특히 여학생은 여성이기 때문에 살면서 어려운 문제에 닥칠테지만, 여성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자신의 개인적 성공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널리 국가와 인류에까지도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생각을 크게 가지라는 게 유 박사의 조언이다.



이른바 성공한 삶이란 남들이 보기에 화려하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유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성공관, 직업관을 갖고 KIST 문을 나섰다. 진정한 성공이란 남들이 많이 가지 않는 길이라도 열정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길을 택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혼자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기여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유영숙 박사는 이런 성공적인 삶을 앞서 걸어가고 있는 멘토다. 유 박사처럼 스스로에게 희망등대를 비추며 생명과학 분야의 외길을 따라 걷는다면, 아직 규명되지 못한 진실을 밝힐 수 있으리란 기대가 생긴다. ‘세계에서 최초로’ 내가 밝혀낸 과학적 사실이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비춰줄 미래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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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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