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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과 죄책감이 세뇌의 희생양을 만든다

오래 전에 ‘엑소시스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악마가 엑소시즘(악마를 쫓아내는 의식)을 하려는 신부를 조종하는 장면이었다. 영화에서 신부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그 사실을 안 악마는 신부에게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신부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래전에 본 영화라 신부가 왜 아버지에게 죄책감을 느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죄책감의 뿌리라는 것이 정말 질기다”라는 가벼운 충격을 받았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그래서 죄책감과 열등감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진료실을 찾아올 때면 가끔 그 장면이 떠오른다. 그들 역시 신부처럼 죄책감과 열등감으로 세뇌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이다.

스스로 고문하는 비합리적인 감정 죄책감이나 열등감은 비합리적인 감정이다. 대개는 콩알만도 못한 사소한 일이나 사건을 마치 거대한 바위덩어리처럼 느끼는 데서 시작한다. 게다가 그 거대함을 더 크게 느끼라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고문하고 세뇌한다. 영화 속 신부처럼 끔찍한 아킬레스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수많은 상담사례가 그것을 보여준다.

한 여성은 너무나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시집 식구들에게 잘할 것이란 기대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뼈가 빠지도록’ 남편과 시집식구들에게 봉사하고 희생했다. 하지만 시댁식구들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칭찬에 인색했다. 그들은 언제나 그녀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녀는 칭찬을 받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싫은 소리도 못하고 거절도 못하게 됐다. 그녀의 병은 점점 더 깊어 갔다. 그녀가 많은 걸 희생하면서도 떳떳하게 행동하지 못했던 이유도 ‘과연 내가 내세울 만큼 잘하고 있는 걸까’라는 열등감과 죄책감을 키워왔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종종 인생의 불완전성 때문에 쓸모없는 열등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엑소시스트’에 등장하는 신부조차 자기 인생에 대해 완전한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열등감은 다른 사람이나 스스로의 기대치에 비해 자신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을 때 갖는 감정이다. 그에 비해 죄책감은 뿌리가 깊다. 우리 안에 있는 초자아가 가혹하게 자신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마치 매 순간 학생을 감시하는 사감 선생 같다고나 할까.

중학교 1학년 때 필자의 담임선생님은 너무나 무서웠다. 다른 과목의 수업을 듣다가도 느낌이 이상해 뒤를 돌아보면 뒷문에서 우리를 살피는 담임선생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뒷목이 뻣뻣해지면서 등골이 오싹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초자아가 지나치면 그렇게 된다.

물론 자아와 초자아가 전혀 형성되지 않은 범죄자나 인격 장애자도 문제다. 하지만 지나치게 초자아가 비대해지면 그 또한 비극적인 삶의 원인이 된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열등감을 느끼고, 수시로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자기 삶에 불평을 늘어놓고, 또 그러는 자신을 스스로 야단치는 악순환에 사로잡힌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용기벗어나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열등감이나 죄책감도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해 생기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런저런 모습이 싫고, 열등감과 죄책감이 거의 반사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면 자신에게 아예 그런 면이 없는 것처럼 꽁꽁 숨겨두기에 이른다. 계속 스스로를속이다보면 정말그런 것처럼 느낀다. 일종의 세뇌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 깊숙한 어딘가에서는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순간적인 공포가 밀려들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진실을 드러내게 될까봐 두려워지는 것이다. 때때로 불안과 공포는 지나치게 내면의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활동적이고 좋은 곳에 써야 할 에너지마저 고갈시킨다. 이런 상황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전에는 해결책이 없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이 열등감과 죄책감의 성격도 다르다. 이를 발견한 사람이 칼 융이다. 그는 이 열등감과 죄책감에 ‘콤플렉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단어연상검사에서 어떤 단어를 주었을 때, 피실험자가 지나치게 오래 주저하거나 기분의 동요를 나타내면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것이 피실험자의 콤플렉스를 건드린다고 설명했다.

어느 상담자는 형제와 사이가 안 좋았다.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지 오래됐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누가 형제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가장 싫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에게 “사실 알고 보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러니 열등감이나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럴수록 간단명료하게 대답하면 된다”는 요지의 말을 해줬다. 그제서야 그는 표정이 밝아졌다.

곰팡이를 없애려면 햇빛과 바람을 쬐어주듯 내 마음의 열등감과 죄책감도 드러내고 나면 더 이상 열등감이나 죄책감이 되지 않는다.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는 노랫말은 내 마음에도 필요하다.

2010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양창순 신경외과 원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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