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살아 있는 황금이라는 뜻으로 ‘생금(生金)’이라 불리며 고부가 가치 재료로 여겨졌던 대나무. 하지만 값싼 대체물질과 외국 대나무가 들어오면서 국내에서는 차차 설자리를 잃어갔다. 그런 대나무가 요즘 재기를 꿈꾸고 있다. 다양한 활용 가치가 알려지면서 대나무를 바이오에너지와 기능성 섬유, 생활 제품으로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 6월의 푸른 녹음보다 더 푸른 대나무의 꿈을 만나러 가자.
죽림도(竹林圖)
이원섭
세상과 멀어 세상과 멀어
봄이란들 제비조차 안 오는 곳이었다.
사철은 푸르른 죽림 가운데서
죽처럼 마음만을 지켜 사는 곳이었다.
어찌 슬픔인들 없을까마는
북두(北斗)같이 드높이 위치한 곳이었다.
세월조차 여기에는 만만적(漫漫的)하여
한 판의 바둑이 백 년인 곳이었다.
대나무를 가까이 하면 오감이 시원해진다. 사시사철 푸르른 외관을 보면 두 눈이 시원해지고, 바람에 흩날리는 잎사귀들의 아우성을 들으면 두 귀가 시원해진다. 대나무로 만든 음식은 입과 코에 상큼하고 시원한 맛과 향을 남기고 대나무로 만든 죽부인은 에어컨을 잊게 할 만큼 시원함을 선사한다. 슬슬 여름 채비에 들어가는 6월엔 대나무만큼 ‘시원한’ 친구가 없다.
항균작용에 통기성 좋은 대나무 섬유
대나무는 이름에 ‘나무’가 있긴 해도 엄밀히 말해 ‘줄기가 나무처럼 바뀐 풀’이다. 벼, 보리, 옥수수처럼 줄기에 마디가 있고 잎이 길쭉해 외떡잎식물에 속한다. 따라서 부피생장을 하는 종자식물을 나무라고 한다면 나이테가 없는 대나무는 풀에 해당한다. 하지만 땅 위에 나와 있는 줄기가 1년 이상 지속되는 여러해살이식물을 나무라고 본다면 대나무도 나무에 속한다. 대나무는 땅속에 원줄기가 있고 땅 위로 가지를 뻗는 여러해살이식물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눈으로 보는 대나무는 가지 부분이다.
보통 죽재라 불리는 가지 부분은 속이 비어 있지만 웬만한 바람에도 부러지지 않고 단단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건축물의 기둥에 철근 대신 대나무를 사용하거나 자동차의 바닥을 대나무로 대는 일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 대나무는 동남아시아나 중국 남부에 있는 대나무보다 더 단단한 편이다. 담양군청 라규채 홍보계장은 “국산 대나무는 아열대성 기후에서 자란 대나무와 달리 겨울을 지내면서 목질이 더 촘촘해진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대나무는 예부터 공예품으로 널리 활용돼 왔다. 우리나라 대나무는 공예품으로 만들어 놓으면 10년, 20년의 시간이 흐를수록 붉은빛이 은은하게 배어나와 신비한 매력을 발산한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대나무로 천연 섬유를 만들고 있다. 특이한 점은 대나무 죽재처럼 대나무로 짠 실 단면에는 가운데에 구멍이 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나무 섬유로 만든 옷은 무척 가볍고 통풍이 잘되며 모세관 현상이 일어나 땀을 잘 흡수한다. 또 대나무에 들어 있는 천연 항균 물질인 규산이나 테르펜, 폴리페놀은 옷에 곰팡이나 좀이 먹는 것을 막는다.
대나무는 단단하고 질기기만 한 것이 아니다. 죽재를 비롯한 잎과 죽순에는 단백질을 비롯한 칼륨, 칼슘, 나트륨 같은 무기질이 많아 야생동물에게도 사랑받는다. 곰은 겨울잠을 자기 직전이나 잠에서 깨어나 댓잎을 먹는다. 영양가가 높고 빈속에 먹어도 탈이 없기 때문이다. 소나 말이 병들어 음식물을 먹지 못할 때도 약제보다 조릿대의 잎을 주는 것이 회복이 빠르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대나무를 이용한 음식을 많이 해 먹었다. 죽재 속을 가로지르는 막이 있는 마디의 밑 부분을 자르면 그릇이나 물통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안에 밥을 넣고 찌거나 술을 담그면 대나무 특유의 향이 배면서 싱그러운 녹색을 띤다. 대나무에 넣고 구운 소금은 죽염이라고 해서 건강식으로 많이 활용된다. 경상남도농업기술원에서는 대나무 수액으로 염분이 낮은 간장이나 된장을 만드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를 이끈 경상남도농업기술원 김낙구 박사는 “대나무 수액에 특히 많은 칼륨이 체내에서 나트륨의 흡수를 막아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을 준다”고 설명했다.
악취 제거에 대나무 숯이 더 좋은 이유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다. 하지만 요즘 트렌드는 블랙이다. ‘소녀시대’ 같은 걸 그룹들이 이미지를 변신하기 위해 블랙으로 치장하는 것처럼 대나무도 특유의 푸름을 벗어 던지고 매력적인 ‘블랙’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바로 1000℃에 가까운 높은 열에서 구운 대나무 숯이다. 대나무 숯에는 탈취제품의 재료로 사용되는 실리카겔의 주성분인 규산(1.6%)이 일반 숯보다 2배가량 더 많이 들어 있다. 또 벌집모양의 구멍이 공간의 낭비 없이 촘촘히 박혀 있어 사각형 또는 원형의 구멍이 생기는 침엽수 숯과 활엽수 숯에 비해 표면적이 넓다. 표면적이 넓으면 공기 중의 유기물이나 냄새의 근원이 되는 불순물을 많이 잡아둘 수 있으므로 탈취효과가 높아진다.
대나무는 숯을 만들 때 나오는 연기도 버리지 않는다. 대나무가 열 분해될 때 방출되는 가스와 여러 가지 성분을 함유한 수증기를 냉각하고 침전시키면 죽초액이 된다. 이 용액은 여러 종류의 성분이 함유돼 있어 다양한 용도에 쓸 수 있다. 특히 죽초액에 들어 있는 초산, 개미산 같은 산류는 암모니아나 유황화합물 같은 알칼리성의 냄새 성분을 중화하고, 페놀, 크레졸, 구아야콜 같은 페놀류는 강한 냄새가 나는 물질을 악취가 없는 물질로 바꾸는 작용이 있어 분뇨처럼 다양한 성분이 모여 악취를 내는 물질의 냄새를 없애는 데 좋다.
최근에는 죽초액 특유의 훈제 향기를 생선이나 햄, 소시지에 발라 비린내를 없애고 훈제 향을 가미하려는 연은가 진행되고 있다. 인체에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물질을 잘 걸러낼 수 있다면 대나무 훈제 향이 나는 생선이나 햄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대나무 숲에게 6월은 성장의 계절이다. 눈이 녹고 햇살이 부드러워졌다는 신호를 받으면 대나무의 땅속줄기가 어린싹(죽순)들을 틔우기 시작한다. 물론 4~5월에도 죽순은 돋지만 이때 나는 죽순은 수분이 많고 질감이 부드러워 사람들이 식용으로 사용하려고 많이 베어간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대나무 숲이 풍성해지는 시기는 6월이라 할 수 있다.
우후죽순이 경쟁력이다
대나무가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죽순의 엄청난 성장 속도이다. 죽순은 말 그대로 ‘우후죽순’으로 자란다. 하루에만 1m 가까이 자라고 다 자라는 데는 50
일이 채 걸리지 않는다. 아침에 삐죽 솟아 나온 죽순은 몰라보게 자란 탓에 오후에 다시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단다. 이원섭 시인이 ‘죽림도’에서 바둑 한 판이 백 년 같다고 말한 이유도 잠깐 바둑을 둔 사이 부쩍 자란 죽순을 보고 한 말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성장능력은 환경에도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산림과학원 남부산림연구소가 지난 3년간 전국 150개 조림지에서 6개 수종을 대상으로 이산화탄소 흡수력을 조사한 결과 대나무는 소나무보다 이산화탄소를 3.8배나 많이흡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를 주도한 권수덕 박사는 “대나무는 성장이 빠른 수종인 만큼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다른 수종에 비해 이산화탄소를 많이 흡수하며 광합성을 활발히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대나무는 생물체를 열 분해시키거나 발효시켜 얻은 에너지인 바이오매스 에너지도 신갈나무, 소나무의 두 배 이상인 것으로 조사됐다. 같은 시간과 면적에서 몸집을 키우는 비율이 다른 수종에 비해 무척 높기 때문이다. 이는 대나무가 미래 바이오에너지로 개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대나무 같은 유기물을 직접 또는 생·화학적, 물리적으로 변환시켜 연료나 에너지 형태로 만들려면 빠른 시간 내에 많은 바이오매스를 만들어야 하는데, 대나무는 좁은 면적에서도 하루에 1m씩 쑥쑥 자라기 때문이다.
현재 고체연료로는 잘게 부순 대나무를 건조시켜 단단하게 굳혀서 만든 펠릿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액체연료인 바이오에탄올로 가기까지는 다소 긴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바이오에탄올을 만드는 데 많이 이용되는 사탕수수나 사탕무 같은 당질계와 옥수수, 감자, 고구마 같은 전분질계는 탄소화합물의 구조가 간단한 당의 형태라 이를 에탄올로 변환시키는 과정이 어렵지 않다. 반면 대나무 같은 목질계에는 다당류의 일종인 셀룰로오스가 들어 있는데, 수소 결합으로 단단히 연결돼 있어 이를 끊어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바이오에탄올의 원료는 식량에 이용되는 당질계와 전분질계가 아니라 값싸고 구하기 쉬운 목질계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 대상은 대나무가 될 가능성이 높다. 대나무를 이용한 에탄올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창원대 화학과 신동수 교수도 “최근 수산기가 포함된 이온성 액체를 흘려보내 셀룰로오스의 결합을 약하게 만들거나 대나무를 아주 잘게 분쇄하는 방법으로 에탄올로 바꾸는 수율을 높인다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어 이 둘을 함께 적용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나무로 만든 바이오에탄올이 실용화돼 자동차 배기구에서도 대나무 향이 솔솔 풍기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