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2일 토요일, 서울 양천구에 사는 주부 권남형 씨가 월드컵을 생생하게 즐기기 위해 특별히 장만한 3차원(3D) 입체 TV로 가족과 함께 한국 대 그리스 전을 시청하고 있다. 경기는 후반 15분, 0 대 0 동점 상황. 벌써 한 시간째 양측 골문이 열리지 않는 가운데, 중학생 아들은 3D 안경이 불편하다고 불만이 가득하다. 권 씨도 안경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그 순간, 박지성 선수가 또 한 번 찬스를 잡는다.
박 선수가 페널티 박스 안으로 깊게 찔러준 공을 이청용 선수가 왼발 슛! 골인~! 화면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자블라니를 보면서 ‘3D TV를 사길 잘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는 권 씨.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이젠 안경을 벗어도 되겠다’는 안도감이 더 크다.
영화 ‘아바타’의 흥행으로 인기가 높아진 3D TV가 월드컵을 앞두고 또 한 번의 특수를 누리고 있다. 가격이 일반 LCD TV의 두 배인데도 5월 판매량이 4월 판매량보다 약 1.5배나 증가한 것을 보면 실로 ‘폭발적’인 반응이다. 기업들은 화질은 높이고 가격은 낮춘 보급형 3D TV를 속속 출시하면서 본격적인 매출 경쟁에 나섰다. 이런 추세라면 수년 내로 3D TV가 보편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큰 걸림돌이 남아 있다. 바로 ‘3D 안경’이다. 예전보다는 훨씬 가볍고 어지러움이 적도록, 또 어린이도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을 만큼 기능과 모양이 개선됐지만, 안경을 끼지 않으면 TV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사용자들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3D TV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無)안경’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렌즈와 LCD 장벽으로 안경 대신해사실 무안경 3D 디스플레이는 이미 개발된 상태다.
각각에 쓰인 기술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크게 렌티큘러 방식과 패럴랙스 배리어 방식 두 가지로 나뉜다. 두 방식 모두 기본 원리는 일반 3D TV와 동일하다. 왼쪽과 오른쪽 눈에 각각 다른 영상을 보여 시차를 발생시키고 그것으로 깊이감을 느끼게 만든다. 렌티큘러 방식은 안경 대신 원기둥 모양의 렌즈로 좌우 영상을 분리한다. LCD 화면에 수직으로 왼쪽 영상과 오른쪽 영상을 교대로 나타낸 뒤, 그 위에 원기둥을 이등분한 듯한 얇은 렌즈를 같은 길이로 나란히 붙인다. 이때 렌즈의 초점마다 좌우 영상이 한 쌍씩 대응되도록 렌즈의 위치를 잘 조절한다. 좌우 영상은 렌즈에 굴절돼 각각 왼쪽 눈과 오른쪽 눈에 나뉘어 들어간다. 빛이 꺾이는 각도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원하는 화
면을 볼 수 있는 위치가 제한된다.
이는 보는 각도에 따라 그림이 다르게 보이는 입체그림과 원리가 비슷하다. A, B 두 가지 그림이 나타나는 입체그림이 있을 때, A 그림을 보면서 보는 각도를 천천히 바꾸면 어느 순간부터 A 그림과 B 그림이 겹쳐 보이다가 갑자기 B 그림만 보이는 시점이 있다. 3D 촬영 장비와 3D 콘텐츠를 제작하는 3D 전문 업체 스테레오피아 이연우 대표는 “렌티큘러 방식도 입체그림과 마찬가지다. 보는 각도를 조금씩만 바꾸면 처음 영상이 입체처럼 보이지만, 위치가 너무 많이 바뀌면 처음에 봤던 영상과는 다른 어색한 영상을 보게 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3D TV로 사람의 얼굴을 보다가 얼굴의 측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상황을 가정해보면, 처음에 돌린 각도가 작을 때는 얼굴의 측면이 보이지만 일정 각도를 넘는 순간 갑자기 얼굴이 온전하지 않게 보인다. 이는 해당 각도만큼 몸을 움직여서 본 실제 얼굴과는 또 다르다. 이 대표는 “영상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어색한 영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오른쪽 눈에 들어와야 할 영상이 왼쪽 눈으로, 왼쪽 눈에 들어와야 할 영상이 오른쪽 눈으로 뒤바뀌어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패럴랙스 배리어 방식은 LCD 화면에 좌우 영상을 교대로 나타낸 뒤 두 영상 사이마다 검은 LCD 장벽(배리어)을 설치한다. 왼쪽 눈의 위치에서는 오른쪽 영상이 가려지고, 오른쪽 눈의 위치에서는 왼쪽 영상이 가려지기 때문에 좌우 영상을 효과적으로 분리할 수 있다.
이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LCD 장벽을 켜고 끌 수 있어서, 2D TV도 되고 3D TV도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장벽을 부분적으로 켜서 한 화면에 2차원과 3차원 영상을 동시에 구현하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글씨는 3차원에서 깨져 보이기 때문에 2차원으로 보고, 일반 영상 부분은 3차원으로 실감나게 감상하는 식이다. 그러나 패럴랙스 배리어 방식은 검은 LCD 장벽이 화면을 가리기 때문에 렌티큘러 방식에 비해 화면이 어둡다. 또 이용자가 보는 위치를 약간만 바꿔도 장벽에 가려지는 면적이 달라져 화면의 밝기가 변한다.
렌티큘러 방식과 마찬가지로 보는 위치가 크게 바뀌면 좌우 영상이 오른쪽과 왼쪽 눈에 각각 거꾸로 들어올 수도 있다.
왜 제품으로 만들지 않을까
렌티큘러 방식과 패럴랙스 배리어 방식은 현재까지 개발된 기술들 중 가장 상용화에 근접한 방식이다. 하지만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첫 번째가 해상도다. 기존의 디스플레이는 한 화소에 한 시점에서 본 모습만 나타내지만, 무안경 3D 디스플레이는 같은 자리에 좌우 두 시점에서 본 모습을 표현해야 한다. 이럴 경우 해상도는 절반으로 떨어진다. 특히 렌티큘러 방식은 8대의 카메라로 물체를 촬영한 뒤 이것을 한 화면에 표현한다. 그러면 보는 각도에 따라 8가지 영상을 볼 수 있지만 해상도는 일반 LCD TV의 8분의 1이 된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LCD 패널 자체의 해상도를 높여야 한다. 이 대표는 “해상도가 현재보다 8배 높은 패널이 개발된다면 무안경 3D TV를 상
용화하는 게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무안경 3D TV의 또 다른 문제점은 보는 위치를 바꾸면 영상이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TV를 볼 수 있는 위치가 제한된다는 점이다. 여러 사람이 편한 자세로 시청하는 TV의 특성상 이는 치명적인 단점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용자의 시선을 추적해서 LCD 장벽의 위치를 바꾸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ETRI 실감방송시스템 연구팀 허남호 팀장은 “이용자의 시선 위치에 따라 여러 개의 LCD 장벽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이용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며 “이 기술을 3D DMB 단말기에 적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필립스나 헝가리의 홀로그래피카는 한 화소에 30개 이상의 시점을 표현하는 식으로 시점 수를 늘려, 보는 위치에 따
라 영상이 끊기는 현상을 해결해나가고 있다.
렌티큘러 방식과 패럴랙스 배리어 방식은 좌우 영상을 수직으로 번갈아 나열했기 때문에 시선을 좌우로 움직일 때는 입체적으로 보여도, 위아래로 움직일 때는 단순한 평면처럼 보인다는 한계도 있다. 이는 바꿔 말하면 TV를 누워서 볼 수 없다는 의미다. 대안으로 여러 개의 작은 렌즈를 이용하는 ‘집적영상(Integral Imaging)’ 기술이 있다. 물체 앞에 여러 개의 렌즈를 배열해 다양한 방향에서 촬영한 뒤, 원래의 모습을 재현하려면 촬영할 때 사용했던 렌즈 배열에 각각의 영상을 다시 통과시키는 방식이다. 실제 3차원 공간에 입체를 형성하기 때문에 영상이 자연스럽고 수직 방향과 수평 방향의 시차를 모두 나타낼 수 있지만, 상용화하기에는 부피가 크다는 단점이 있다.
3차원 공간에 그리는 ‘진짜’ 3D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무안경 3차원 디스플레이는 두 눈의 시차를 이용하지 않고도 다양하게 만들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3차원 공간에 직접 이미지를 형성하는 체적형 디스플레이다. 체적형 디스플레이를 구현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한 가지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2차원 스크린에 레이저 빔을 반사시켜 물체의 표면을 입체로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하나의 레이저 빔은 반사된 뒤 물체 표면의 한 점을 나타낸다. 여러 개의 레이저 빔을, 쏘는 방향과 시간을 달리하면서 동시에 반사시키면 공간상에 실제로 입체적인 물체의 표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체적형 디스플레이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방식은 무안경 3D 디스플레이의 최종 목표라고도 할 수 있는 홀로그램이다. 레이저 빔을 렌즈에 통과시켜 구면파 형태로 만들고, 구면파를 물체에 반사시킨 빛과 거울에 평행하게 반사시킨 빛을 합치면 두 빛이 서로 간섭을 일으켜 홀로그램을 만든다. 그렇다면 반사된 두 빛을 기록해뒀다가 필요할 때 원래의 구면파와 합쳐 물체를 3차원 입체로 다시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빛을 저장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 현재까지 나온 방법 중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액정 장치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홀로그램의 간섭무늬를 해상도가 높은 카메라로 촬영한 뒤, 재생할 때 이를 고화질 액정에 나타내고 그 위에 원래의 레이저 빔을 비춰 실시간으로 홀로그램을 구현한다는 계획이다. 아직은 카메라의 해상도가 낮고 레이저를 광원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다양한 연구가 이뤄지고 정부가 적극적인 지원에 나선 만큼,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생생한 홀로그램이 머지않아 3차원 현실에 구현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