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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의 또 다른 얼굴 ‘스핀’으로 정보 쌓는다

스핀파 동역학 소자 연구단

3월 1일(한국 시간) 막을 내린 제21회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명장면 중 하나는 한국의 이승훈 선수가 스피드스케이팅 1만m 경기에서 금메달을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유럽 선수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졌던 빙상 종목에서 아시아인이 우승한 사실도 놀랍지만, 불과 7개월 전까지만 해도 쇼트트랙 선수였던 이 선수가 1만m를 완주한 지 세 번 만에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다는 사실에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 선수가 올림픽에서 숨은 재능을 발휘해 좋은 성적을 낸 것처럼, 과학계에서는 물질의 새로운 성질로 특허 기술을 개발하는 데 손에 땀을 쥐는 열띤 경쟁을 벌이고 있다. 스핀파 동역학 소자 연구단의 서울대 김상국 재료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소자에서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핵심 역할을 하게 될 전자의 ‘스핀’ 특성에 주목하고 있다.


신개념 정보전달자 스핀파에 주목하다

“지금까지 반도체 소자에는 음전하를 띠는 전자가 전위차에 의해 이동하는 전기적 특성만 주로 이용됐습니다. 하지만 전자는 스핀 특성을 갖는 일종의 작은 막대자석의 성질이 있습니다.”

김 교수는 여기서 스핀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회전’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스핀이라는 이름은 고전역학에서 전자나 원자핵이 축을 기준으로 자전한다고 가정한 데서 유래했다. 하지만 현대에 오면서 이런 기본 입자들이 양자역학적으로 여러 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 교수는 “스핀은 ‘업(up)’과 ‘다운(down)’ 두 가지 상태가 있다”며 “두 상태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기력을 발생시킨다”고 말했다. 그는 “작은 막대자석들이 모여 큰 자석을 이루듯, 무수히 많은 스핀들이 한쪽 방향으로 나열되면 물질이 자성을 띤다”고 설명했다.

스핀들은 각각 고유한 진동수로 세차운동 을 한다. 이런 스핀들이 상호작용하면서 파동을 발생시키는데, 이는 마치 수면 위의 물 분자가 위아래로 진동하면서 물결파를 발생시키는 현상과 유사하다.

스핀파는 1930년 스위스의 물리학자 펠릭스 블로흐가 처음 발견했다. 하지만 수ns(나노초, 1ns=10-9초) 이하의 짧은 시간 동안 나노 수준의 작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현상이다 보니 기계로 관측이 이뤄진 것은 최근에 와서다.

김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스핀파 현상을 실생활의 기술에 응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강력한 스핀파를 발생시키고, 이 파동의 위상을 조절해 정보를 전달하고 처리하는 개념이다. 전자가 직접 이동해 정보를 전달하는 기존의 소자와 달리, 스핀은 제자리에 있고 정보만 스핀파에 실어 보낸다.

연구단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수nm(나노미터, 1nm=10-9m) 두께의 자성박막 도선 안에 존재하는 스핀들에 자기장을 걸어주면, 도선에서 강력한 스핀파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발견했다.

김 교수는 “도선 내에 들어 있는 스핀들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잇는 ‘자기소용돌이(magnetic vortex)’ 구조를 이루고 있다”며 “중심 부분은 마치 폭풍의 눈처럼 업 또는 다운이라는 방향성을 나타내며, 여기에 자기장을 걸면 중심부의 스핀 방향이 바뀌면서 스핀파가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전파와 투과, 반사, 간섭 같은 파동특성을 파악해 스핀파를 제어하면,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가능하다. 김 교수는 “스핀파를 활용한 새로운 자기 소자는 반도체 소자보다 빠른 속도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며 “소자의 집적도가 높아질수록 전자의 이동에 따라 열이 발생하고 전하가 새 나가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연구단의 성과는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2005년과 2006년 응용물리 분야의 세계적 권위지인 ‘어플라이드 피직스 레터스’에 잇따라 표지 논문으로 선정됐고, 물리학 분야 최고 권위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도 소개됐다. 2007년 3월에는 영국 과학저널 ‘네이처’에 ‘주목받는 연구(Research Highlight)’로도 소개됐다.




전기 적게 쓰는 메모리 V램

2008년 1월 연구단의 성과가 또 한 번 ‘어플라이드 피직스 레터스’의 표지를 장식했다. 자성체의 자기소용돌이 특성을 이번에는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 소자에 응용했다. 기존 메모리는 전자가 이동하면서 쌓이고 방전되는 전하량의 많고 적음을 판단해 정보를 ‘0’ 또는 ‘1’로 저장했다. 이런 방식은 전자가 직접 움직이다 보니 정보를 저장하고 읽어내는 속도가 느리고, 전자를 움직이기 위해 에너지가 필요했다. 메모리 소자를 나노 크기로 작게 만들면 전자가 소자에서 새 나오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새로운 메모리 ‘V램(V-RAM)’을 제안했다. 자성체 내부의 스핀들이 자기소용돌이 구조를 이루며 나타내는 업 또는 다운이라는 자기 방향을 ‘0’ 또는 ‘1’이라는 정보로 정의하고 이것을 기록하는 방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방향을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연구단은 ‘퍼몰로이’라는 자성물질로 수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 크기의 동전 모양의 자성체를 만들고, 자기 방향을 바꾸는 시뮬레이션을 진행했다. 그 결과 자성체에 교차하는 전류를 흘려 회전자기장을 만들면 중심부의 자기 방향이 뒤바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김 교수는 “전류가 흐르는 전선 주위에는 자기장이 생기는데, 두 전선이 직각으로 교차하는 지점에서는 회전 자기장이라는 특별한 자기장이 형성된다”며 “전류를 조절하면 아주 적은 에너지로도 디스크의 자기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더 낮은전력으로 정보를 기록하고 판독할 수 있다는 의미다.

김 교수는 지난해 3월부터 1년간 미국 로렌스버클리연구소에 머무르면서 스핀의 방향을 볼 수 있는 정도로 분해능이 큰 방사광 현미경을 이용해 초저전력으로 정보를 재기록할 수 있는 방법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회전 자기장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자기소용돌이 중심부의 자기 방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V램에 저장한 정보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이유다.

또 V램은 전자가 직접 이동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물질의 자화 상태만 변하기 때문에 기록과 수정을 수없이 반복할 수 있어 메모리 수명이 길다는 장점도 있다.

김 교수는 “그동안은 전하를 모아서 정보를 저장했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전자의 또 다른 물리량인 스핀을 제어해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게 된다”며 “스핀파와 자기소용돌이를 응용해 정보를 전달하거나 저장하는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데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원천 기술, 기초 학문에서 나온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학술지에 다섯 번씩이나 표지논문으로 실리고, 과학저널 ‘네이처’에서 주목받는 연구로 소개되는, 가문의 영광과도 같은 성과들을 어떻게 짧은 기간에 그토록 여러 번 낼 수 있었을까. 김상국 교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그렇더라”고 말한다. 얼핏 들으면 너무 쉽고 간단하게 이뤄진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좀 더 들어보면 진짜 메시지는 따로 있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저것 해보다가 우연히 발견하거나, 어떻게 될지 미리 예상하고 디자인하거나. 당연히 후자가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겠죠.” 결국 실험으로 원하는 특성을 정확히 관찰하기 위해서는 실험 재료의 특성이나 실험 방법, 또 예상되는 결과까지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들어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는 물리나 화학 같은 기초 과학 수준과 관계가 깊다.

“지금까지는 없던 원천 핵심기술을 개발하려면 학문의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가 거기서부터 가지를 쳐 나가야 합니다. 응용 기술만 알아서는 본질이 같은 자연 현상도 모두 다르게 보이죠.”

실제로 김 교수는 자기소용돌이 구조로 V램을 구상할 때 기초 학문의 덕을 톡톡히 봤다. 아이디어 구상과 기초 연구를 자그마치 5년 동안 했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자기소용돌이 구조를 맨 처음 발견한 것은 미국 로렌스버클리연구소 박사 후 연구원으로 일하던 1999년이다. 하지만 서울대에 임용돼 한국에 돌아오니 실험장비도 갖춰지지 않고, 연구비도 부족한 상황에서 실험을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그때부터 시작한 게 컴퓨터 시뮬레이션이었어요. 당시엔 장비가 부족해서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기초 학문을 기반으로 아이디어를 강화시킨 게 빛을 본 것 같아요.” 김 교수는 열악한 연구 환경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하나의 학문적인 아이디어를 실험으로 증명하고, 그것을 실제 기술로 만들어가는 전체 과정의 좋은 예시가 되겠다는 김 교수에게서 원천 기술을 만드는 과학자의 저력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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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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