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학부 4학년이었던 1990년대 중반에는 이공계 기피 현상이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으며, 동기생 대부분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분위기였다. 필자도 고분자 재료 분야 중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만 해도 ‘고분자’ 하면, 대표적인 비전도성 물질로서 주로 섬유, 포장재,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에 쓰이는 재료로 알려져 있었다. 또 고분자 전자재료라 하더라도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절연체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박수영 교수의 강의에서 “유기 고분자 재료도 전도체 또는 반도체와 같이 전기를 통하거나 빛을 방출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분야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 길로 분자광전자연구실에 ‘1호 연구원’으로 들어가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연구를 시작하며 유기 소재의 거시적 광전자 특성을 나노미터 또는 나노미터 이하의 분자 수준에서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러한 흥미는 실험실에서의 고된 일상을 지탱해준 큰 힘이 됐다.
석사, 박사 과정을 거치면서 고분자 박막레이저, OLED, 광메모리소자를 비롯한 첨단 광전자 소자에 쓰이는 ‘신기능 형광성 분자 재료’를 연구했다. 구체적으로 그 과정은 분자 설계, 재료 합성, 특성 분석, 소자 제작과 구현의 연속이었다. 이를 위해 양자화학, 유기화학, 물리화학, 물리, 광학, 전자공학 등 소재 학문 전반에 대한 심도 깊은 지식을 체득했다.
나아가 해외학회에 여러 번 참가해 발표 기회를 갖고, 3개월 간 일본에서 공동 연구를 수행하며 국제적인 감각을 키웠다. 지금도 박사과정 1년차에 미국화학회에서 구두 발표했던 당시를 떠올리면, 그때의 긴장감과 서투름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아마도 그런 과정을 통해 얻은 자신감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것 같다.
이후 미국에서 박사후 연구원 과정을 거쳐, 현재는 유기소재를 나노바이오광학에 적용해 암과 같은 난치성 질환을 치료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즉 정보통신(IT) 소재에서 생명공학(BT) 소재로 전환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석박사 과정에서 소재산업에 대해 폭넓은 경험을 하고, 지식과 안목을 쌓아온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뿐 아니라 우리 연구실을 거쳐 간 수많은 졸업생들은 미국, 영국, 호주 등 선도적인 연구팀에서 활동한 경험을 더해 IT, BT, 나노공학(NT) 분야에서 첨단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이들은 학교와 연구소, 산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분자광전자연구실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실로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강조하며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박수영 교수와 연구실 성원들의 땀과 열정의 결실이다. 이제는 졸업해 현업에서 일하는 필자에게 분자광전자연구실은 자긍심을 갖고 더욱 열중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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