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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나는 반도체, DNA로 해결한다

타임도메인 나노기능소자연구단

반세기 전 첫선을 보인 당대 최고의 스포츠카‘페라리’의 명성은 현재도 자자하다. 진화를 거듭한 차체와 엔진이 내뿜는 가공할 속도는 많은 남성 운전자에게 페라리를 ‘한 번쯤 몰고 싶은 차’로 만든 이유가 됐다.

의외인 점은 ‘달리기’에 집중한 페라리의 속도가 수십 년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초반이나 지금이나 페라리의 최고 속도는 시속 300km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류에게 우주 개발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로켓 엔진의 힘도 ‘엄청난’ 발전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1969년 아폴로 11호를 달에 보낸‘새턴V’ 로켓에 적용됐던 많은 핵심 기술이 21세기 우
주를 가르는 로켓에 개량돼 사용되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지난 40년간 진척된 로켓 엔진의 발달속도를 ‘일취월장’이라고 평가하기 어렵게 하는 대목이다.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지원하는‘타임도메인 나노기능소자연구단’의 수장 고려대 전기전자전파공학부 황성우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두고 “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이라도‘지수함수적인 성장’을 하는 건 어렵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지수함수적 성장이란 박테리아 한 마리가 1시간마다 2배씩 늘어난다면 2시간이면 4마리, 3시간이면 8마리, 4시간이면 16마리가 된다는 의미다. 이런 성장이 어렵다는 얘기는 한없이 발달할 것 같던 기술도 어느 순간이 지나면 그 기세가 한풀 꺾인다는 뜻이다.

황 교수는“지수함수적인 성장을 하는 유일한 기술은 광통신과 반도체뿐”이라고 분석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영국 스탠더드텔레콤연구소의 찰스 가오 박사가 바로 지수함수적 성장을 이어가는 광통신 연구의 선구자다. 통신의 대상을 음성에서 영상으로 바꾸고 지구촌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기술이 바로 광통신이다.

반도체가 보여주는 지수함수적인 성장은 이른바‘황의 법칙’에서 정확히 나타난다. 200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 반도체 학술회의에 참석한 삼성전자 황창규 당시 사장은 “집적도는 1년에 2배씩 증가한다”고 역설해 반도체 기술의 성장 흐름을 진단했다.

지난 10월 3일 고려대 연구실에서 만난 황 교수는 바로 실리콘에 의존하는 현재 반도체의 패러다임을 DNA 분자로 확대하는 연구의 선봉에 선인물이다.

실리콘 나노와이어에 DNA 분자 ‘철썩’

반도체 집적도는 선폭을 줄일수록 증가한다. 선폭이 좁으면 더 많은 정보를 재빨리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선폭 줄이기’는 근본적인 문제를 품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선폭이 좁아질수록 높아지는 열이다. 선폭 경쟁이 계속 진행되다가는 10~20년 뒤면 반도체가 녹아내릴 정도로 온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게 국내외 전문가들의 견해다.

반도체가 녹을 정도가 아니어도 열은 정보처리 속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핵심 요인이다. 반도체가 이 같은 문제에 직면한 이유는 그 재료가 실리콘이기 때문이다. 성능을 높이려면 선폭을 줄이는 것 외에 특별한 대안이 없는 게 실리콘 반도체다. 현대 기술문명을 지속하려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셈이다.

황 교수는 바로 이 같은 반도체 분야의‘구원 투수’다. 그는 실리콘으로 만든 나노와이어에 DNA분자를 붙이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땅(실리콘 나노와이어)’에‘작물(DNA 분자)’을 심는 격이다.



황 교수는 “아무 것도 붙이지 않은 나노와이어 트랜지스터는 디지털 신호인 0과 1을 표현한다”며 “여기에 DNA 분자를 감으면 아데닌(A), 구아닌(G), 티민(T), 시토닌(C) 4개 염기가 정보를 구성한다”고 밝혔다.

DNA는 이 염기들이 구성된 형태에 따라 서로 다른 유전 정보를 싣는다. 이 같은 성질을 이용해 염기의 특정 부위를 흥분시키면 각각 다른 전류가 나온다. DNA 분자를 나노와이어에 심으면 같은 공간을 훨씬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셈이다.

황 교수는“단층 건물 위에 계속 새로운 층을 추가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용적률’을 높여 같은 넓이의 땅 위에 층이 높은 건물을 짓는 상황을 연상하면 된다. 거주하는 사람 수를 늘려 주택난을 해결하듯 정보처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늘려 엄청난 성능의 반도체를 만드는 것이다.



“내 연구는 하이브리드”

황 교수는“나노와이어나 DNA 분자를 따로 연구하는 사람은 많다”며 “하지만 이 둘을 접합시키는시도는 우리 연구단이 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의 연구를‘하이브리드’라고 표현했다. 최근 자동차 시장에서 가솔린 엔진에 전기 모터를 탑재한 하이브리드 카가 인기를 끌고 있듯이 하이브리드 반도체가 앞으로 크게 각광받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연구단은 이미 구체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2월 실리콘 나노와이어를 합성하는 새 방법을 개발해 나노분야의 국제학술지 ‘나노 레터스’에 게재했다. 작물(DNA 분자)을 심는 땅(실리콘 나노와이어)의 품질을 높인 셈이다. 핵심은 금속성 촉매를 사용하지 않고도 원하는 형태와 전기적 특성을 지닌 초고순도 나노와이어 를 만든 데 있다.

이 연구의 의미는 크다. 현재 실리콘 나노와이어 공정은 반드시 금속성 촉매를 사용해야만 하고, 이때 생기는 금속 불순물은 나노와이어가 기존 반도체 공정에 결합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실제로 금속 불순물은 반도체 생산라인을 멈추게 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요인이다. 하지만 이 연구로 나노와이어가 기존 공정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이다. 연구는 지금도 진척되고 있다. 나노와이어에 DNA 분자를 붙이는 궁극적인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황 교수는“논문 제출을 준비하고 있어 모든 성과를 공개하긴 어렵다”면서도“최근 좋은 실험 결과가 관찰되고 있는 건 사실”이라고 소개했다.

연구단의 성과에는 팀워크가 한몫을 하고 있다. 황 교수와 성이 같은 2명의 또 다른 황 씨들이 주인공이다. 연구단의 핵심 인력 가운에 한 명인 황종승 연구 교수는 황 교수와 10년지기다. 서울시립대의 양자정보처리 창의연구단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두 사람은 DNA를 활용해 나노 소자를 만드는 일에 함께 관심을 둬왔다. 당시의‘싹’이 현재 타임 도메인 나노기능소자연구단을 이룬 기초가 된 것이다.

황동목 성균관대 교수는 2007년 타임도메인 나노기능소자연구단을 본격 가동한 창립 멤버다. 연구단을 구성하는 두 연구그룹 가운데 한 그룹을 이끌고 있는 기둥이기도 하다. 황성우 교수는 “이들과 함께한 덕택에 좋은 성과들이 나오고 있다”며 “DNA 분자의 쓰임새를 다듬는 일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미국과 경쟁에 자신 있다”

황 교수는 이 분야의 연구에 일본 과학계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는 재료분야 연구능력을 갖고 있는 만큼‘폭발력’을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일본은 최근 관련 학술회의를 활발히 개최하며 새로운 반도체의 출현에 대비하고 있다.

미국에선 광자나 전자 스핀으로 새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마이크론, IBM과 같은 기업들이 연합한 연구전문회사가 연간 수백억 원을 쓰고 있다. 이들의 움직임은 황 교수의 연구와는 방향은 다르지만 현재 반도체가 갖고 있는‘열’문제를 해결할 또 다른 대안으로 꼽힌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이 연구전문회사의 고위 임원은 “2010년대면 시제품을 내놓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황 교수는 “자신 있다”는 반응이다. 탄탄한 연구 조직에서 비롯된 의미 있는 결과가 차근차근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연구가 더욱 심화되면 DNA 분자만으로 움직이는 미래형 컴퓨터의 바탕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도 밝혔다. 연구 성과가 실험실에서만 인정받는 게 아니라 일반인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활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황 교수는 덧붙였다.

분업 시스템은 연구단의‘힘’창의연구단 지원을 받은 지 2년. 이 짧은 기간에 연구단이
실리콘 나노와이어와 DNA 분자를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원동력은 뭘까. 바로 분업화된 연구 시스템이다. 황 교수는 연구단을‘반도체 나노소자 그룹’과 ‘나노화학소재 그룹’으로 나눈 뒤 반도체 나노소자 그룹은 자신이, 나노화학소재 그룹은 연구단에 합류해 있는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황동목 교수가 이끌도록 했다.

이 같은 운영 방식은 2007년 황 교수가 창의연구단에 선정될 때부터 공언했던 것이다. 황 교수는 “황동목 교수가 현재 키우고 있는 나노와이어가 실험적으로 의미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고 밝혔다. 분업 시스템이 중요한 결과물을 생산하는 기초가 되고 있는
셈이다.

황 교수가 현재 1단계 연구를 넘어 2단계, 3단계 연구도 별 어려움 없이 진행될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도 이 같은 안정적인 시스템이 한몫을 하고 있다. 실제로 연구단은 2010년부터 시작될 2단계 연구과정에서 나노와이어와 DNA 분자를 붙이고 여기서 흐르는 전류를 실시간으로 측정하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이 시도가 성공하면 생명공학을 비롯한 다른 분야에서도 관심이 이어질 것으로 황 교수는 보고 있다. 2013년 3단계 연구과정에 이르면 실제로 하이브리드 소자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황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앞으로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는 국내 한 대기업과 더욱 적극적으로 협력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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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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