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도 예상 못하는 작품의 운명
커다란 도화지에 잉크를 뚝 떨어뜨린다. 도화지에 떨어진 잉크 모양은 떨어뜨린 각도에 따라 동그란 모양일 수도, 길쭉한 모양일 수도 있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입으로 훅 불면 선을 그리며 번진다. 잉크가 떨어지는 순간, 그리고 잉크를 입으로 부는 순간 주변에서 작용한 힘에 따라, 도화지의 까끌까끌한 정도에 따라,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여러 변수 덕분에 잉크는 예상치 못하는 모양으로 변신한다. 그럼 작품은 언제 완성되는 걸까. 작가가 이미지에서 자기 철학을 찾아내는 순간이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이며, 그 이미지가 작품이다.
도화지에서 잉크가 번지듯이 프랙탈 작품은 우연히 탄생한다. 그래서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만들 수 없으며, 결코 똑같은 작품이 존재할 수 없다. 자기 작품이라도 100% 똑같이 재현할 수 없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어제와 같은 순서와 각도와 세기로 잉크를 번지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프랙탈 아트는 KPT 컬렉션(www.corel.com), 아포피시스(www.apophysis.org), 울트라 프랙탈(www.ultrafractal.com)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만든다. 먼저 기본적인 이미지 하나를 골라 자기 맘에 드는 이미지가 탄생할 때까지 각도와 뒤틀리는 정도, 구도 등을 다양하게 변화시킨다. 이미지는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드래그하는 힘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진다. 결국 작가의 오늘 기분이 어떤지에 따라 그의 작품은 무한하게 변신하는 셈이다.
가을 부르는 프랙탈의 손짓
단순함이 반복해 복잡함을 이루는 아름다움, 프랙탈 아트. 우리 주변에 있는 자연과 닮았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빗줄기가 떨어지는 모양은 프랙탈이다. 바람이 부는 방향과 세기에 따라 빗줄기가 다양하게 꺾이는 모습이 부분과 전체가 닮았다. 하늘을 쩍쩍 가르며 떨어지는 번개도 프랙탈이다. 한 가지에서 다른 가지가 나고 또 다른 가지가 돋는다. 하늘을 가득 채우는 뭉게구름. 단순한 듯 복잡하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이 역시 프랙탈이다.
프랙탈 아트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든 디지털 세계다. 하지만 우연히 탄생한 이 화려한 이미지에서 아날로그적인 생각과 따뜻함이 느껴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나를 둘러싼 자연이 프랙탈이라 가능한 일이다.
조물주가 만든 작품에 대한 경이로움이랄까. 다양하고 복잡한 세상이 어떻게 탄생했을까 하는 의문에 프랙탈은 ‘단순함의 무한반복’이라는 답을 던진다. 나무 전체의 모습이 나뭇가지 하나의 모습과 닮았듯이, 복잡해 보이는 것도 사실은 아주 단순한 것의 반복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태어나 자란 이 세상에 프랙탈이 가득하기 때문에, 프랙탈 아트는 엄마 뱃속에 두고 나온 추억이 떠오를 듯 애틋한 느낌을 준다.
자유로운 상상 속에 느끼는 희열
프랙탈 아트는 감상하는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 굳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서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프랙탈 아트를 만나면 화려한 색상과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에 압도돼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지지만,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 우리를 기다리는 건 무한한 상상의 세계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희열이다.
박 교수의 작품은 제목이 간단한 명사 하나일 뿐 거창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답을 정하고 작가의 생각을 무조건 강요하기보다 관객이 작품을 보면서 자유롭게 떠오르는 이미지와 아이디어를 무한하게 느끼라는 의도는 아닐까.
그가 만든‘사이버 닭’을 보자. 단순한 곡선을 반복한 닭의 몸통 뒷부분과 꼬리, 다리는 프랙탈 이미지이지만 닭의 머리는 그가 실제로 그래픽으로 그려 넣었다. 만약 닭 머리가 없었더라도 뒤쪽에 있는 프랙탈 이미지가 닭 몸통의 절반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는 사이버 닭을 통해 현실과 사이버 공간의 중간쯤에 놓인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 즉 자신이 상상하는 모든 이미지를 프랙탈로 나타내기 위해 갈등하고 고뇌하는 모습이다. 세상에 드러나는 단정한 겉모습과 달리 내면은 온갖 현란한 색상의 복잡한 곡선처럼 세상에 지쳐 있는 게 아닐까.
커다란 도화지에 잉크를 뚝 떨어뜨린다. 도화지에 떨어진 잉크 모양은 떨어뜨린 각도에 따라 동그란 모양일 수도, 길쭉한 모양일 수도 있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입으로 훅 불면 선을 그리며 번진다. 잉크가 떨어지는 순간, 그리고 잉크를 입으로 부는 순간 주변에서 작용한 힘에 따라, 도화지의 까끌까끌한 정도에 따라,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여러 변수 덕분에 잉크는 예상치 못하는 모양으로 변신한다. 그럼 작품은 언제 완성되는 걸까. 작가가 이미지에서 자기 철학을 찾아내는 순간이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이며, 그 이미지가 작품이다.
도화지에서 잉크가 번지듯이 프랙탈 작품은 우연히 탄생한다. 그래서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만들 수 없으며, 결코 똑같은 작품이 존재할 수 없다. 자기 작품이라도 100% 똑같이 재현할 수 없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어제와 같은 순서와 각도와 세기로 잉크를 번지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프랙탈 아트는 KPT 컬렉션(www.corel.com), 아포피시스(www.apophysis.org), 울트라 프랙탈(www.ultrafractal.com)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만든다. 먼저 기본적인 이미지 하나를 골라 자기 맘에 드는 이미지가 탄생할 때까지 각도와 뒤틀리는 정도, 구도 등을 다양하게 변화시킨다. 이미지는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드래그하는 힘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진다. 결국 작가의 오늘 기분이 어떤지에 따라 그의 작품은 무한하게 변신하는 셈이다.
가을 부르는 프랙탈의 손짓
단순함이 반복해 복잡함을 이루는 아름다움, 프랙탈 아트. 우리 주변에 있는 자연과 닮았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빗줄기가 떨어지는 모양은 프랙탈이다. 바람이 부는 방향과 세기에 따라 빗줄기가 다양하게 꺾이는 모습이 부분과 전체가 닮았다. 하늘을 쩍쩍 가르며 떨어지는 번개도 프랙탈이다. 한 가지에서 다른 가지가 나고 또 다른 가지가 돋는다. 하늘을 가득 채우는 뭉게구름. 단순한 듯 복잡하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이 역시 프랙탈이다.
프랙탈 아트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든 디지털 세계다. 하지만 우연히 탄생한 이 화려한 이미지에서 아날로그적인 생각과 따뜻함이 느껴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나를 둘러싼 자연이 프랙탈이라 가능한 일이다.
조물주가 만든 작품에 대한 경이로움이랄까. 다양하고 복잡한 세상이 어떻게 탄생했을까 하는 의문에 프랙탈은 ‘단순함의 무한반복’이라는 답을 던진다. 나무 전체의 모습이 나뭇가지 하나의 모습과 닮았듯이, 복잡해 보이는 것도 사실은 아주 단순한 것의 반복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태어나 자란 이 세상에 프랙탈이 가득하기 때문에, 프랙탈 아트는 엄마 뱃속에 두고 나온 추억이 떠오를 듯 애틋한 느낌을 준다.
자유로운 상상 속에 느끼는 희열
프랙탈 아트는 감상하는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 굳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서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프랙탈 아트를 만나면 화려한 색상과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에 압도돼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지지만,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 우리를 기다리는 건 무한한 상상의 세계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희열이다.
박 교수의 작품은 제목이 간단한 명사 하나일 뿐 거창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답을 정하고 작가의 생각을 무조건 강요하기보다 관객이 작품을 보면서 자유롭게 떠오르는 이미지와 아이디어를 무한하게 느끼라는 의도는 아닐까.
그가 만든‘사이버 닭’을 보자. 단순한 곡선을 반복한 닭의 몸통 뒷부분과 꼬리, 다리는 프랙탈 이미지이지만 닭의 머리는 그가 실제로 그래픽으로 그려 넣었다. 만약 닭 머리가 없었더라도 뒤쪽에 있는 프랙탈 이미지가 닭 몸통의 절반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는 사이버 닭을 통해 현실과 사이버 공간의 중간쯤에 놓인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 즉 자신이 상상하는 모든 이미지를 프랙탈로 나타내기 위해 갈등하고 고뇌하는 모습이다. 세상에 드러나는 단정한 겉모습과 달리 내면은 온갖 현란한 색상의 복잡한 곡선처럼 세상에 지쳐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