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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사랑 내 곁에’ 루게릭병을 잡아라



지난 9월 24일 개봉한 영화‘내 사랑 내 곁에’는 루게릭병에 걸린 한 남자와 그 곁을 끝까지 지키는 연인의 사랑을 담은 이야기다. 영화의 소재로 쓰인 루게릭병은 인구 10만 명당 1~2명꼴로 발생하는 희귀병이다.


 

루게릭병이란 이름은 1930년대 미국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를 대표하는 간판타자였던 루 게릭(Lou Gehrig)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1932년 아메리칸리그 선수로는 처음으로 한 경기에서 홈런 4개를 몰아쳤으며 2년 뒤에는 아메리칸리그의 타율, 홈런, 타점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해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당대 최고의 야구선수였다.

게다가 그는 2130경기에 연속 출장하는 기록(메이저리그 통산 2위)을 세울 정도로 건강해 ‘철마(Iron Horse)’란 별명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병에 걸리고서 3년 만인 1941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많은 미국인들은 충격을 받았고 그가 걸린 병을 그의 이름을 따 루게릭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근육 마르고 운동신경 딱딱히 굳는 병


 

“나 몸이 굳어가다 결국은 꼼짝없이 죽는 병이래. 그래도 내 곁에 있어 줄래?” 영화에서 종우는 병세가 악화되면서 점점 말라 나중에는 갈비뼈를 앙상하게 드러낸다. 배우 김명민은 루게릭병 환자 백종우 역을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체중을 20kg이나 감량해 화제가 됐다. 영화의 종우처럼 실제로 루게릭병에 걸린 환자들은 운동신경세포가 파괴되며 몸이 바짝 마른다.

루게릭병의 공식 병명은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ALS)’으로 ‘근육이 사라지고 척수 있는 운동신경 다발이 딱딱하게 굳는다’는 뜻이다. 우리 몸의 골격근은 신경계의 지배를 받는데, 특히 운동신경세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운동신경세포는 대뇌 피질에 있는 상부 운동신경세포와, 뇌간과 척수에 분포하는 하부 운동신경세포로 나눌 수 있다.

상부 운동신경세포는 축삭이라고 하는 긴 신경돌기를 통해 하부 운동신경세포로 신호를 보내고, 하부 운동신경세포도 역시 축삭을 통해 근육에 전기 신호를 전달한다. 루게릭병은 바로 이 상부 및 하부 운동신경세포가 선택적으로 사멸되는 신경계 퇴행성 질환이다.


상부 운동신경세포나 하부 운동신경세포가 사멸할 경우 근력이 저하되고 근육이 경직되거나 위축된다. 이로 인해 몸에서는 점점 더 근육이 사라져 바짝 마르게 된다.





보통 이런 증상은 한쪽 팔이나 다리에서 먼저 시작되며 개인차가 있으나 평균 2~5년에 걸쳐 온몸으로 번진다. 환자에 따라서는 음식을 삼키거나 말을 하는 데 쓰이는 입 주변의 근육에서 먼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횡격막과 늑간근, 복근처럼 우리가 호흡할 때 필요한 근육이 마비돼 인공호흡기의 도움 없이는 숨을 쉴 수 없어 사망하게 된다.

루게릭병 발생률은 지역마다 크게 차이가 없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500~1000명 정도 새로운 환자가 발생한다. 보통 50대 이후의 연령에서 발병하는 경우가 많고 드물지만 영화에서처럼 20, 30대의 젊은 나이에 발병하는 경우도 있다.

 


루게릭병 실마리 쥔 SOD1 유전자

숟가락 하나 손에 쥐는 일도 힘겨워하던 종우는 결국 입 주변의 근육까지 마비돼 말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루게릭병 환자의 약 10%는 가족성으로 발병한다. 그런데 이 중 약 20% 환자에게서 21번 염색체 위의 SOD1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겼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SOD1 유전자 변이에 의한 가족성 루게릭병 환자는 전체 루게릭병 환자의 약 2%에 불과하지만 환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발성 루게릭병 과 증상과 병리 소견에 차이가 없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루게릭병을 일으키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인간의 SOD1 변이 유전자를 발현시킨 형질전환 생쥐나 생쥐의 신경세포를 연구한다.

돌연변이가 생긴 SOD1 유전자가 발현돼 신경세포가 사멸되는 과정은 어떨까. 루게릭병에 걸린 사람이나 형질전환 생쥐를 조사한 결과 신경세포 내의 미토콘드리아가 변형됐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내 소기관으로 ATP를 생산하는 일종의 세포 내 발전소다. 만약 미토콘드리아가 손상되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운동신경세포는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메이트가 과량으로 분비될 경우에도 신경세포가 죽을 수 있다. 글루타메이트는 시냅스 말단에서 분비돼 다른 신경세포에 활동 전위를 일으켜 전기 신호를 전달한다. 원래 분비된 글루타메이트는 신경세포를 연결하는 시냅스 부위에 존재하는 성상교세포에 의해 빠르게 흡수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 문제가 생겨 글루타메이트가 흡수되지 않으면 신경세포는 계속 흥분하게 되고, 결국 흥분된 신경세포로 칼슘 이온이 계속 유입돼 신경세포가 사멸한다.

신경세포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질인 신경영양인자가 결핍될 경우에도 신경세포가 죽는다. 신경영양인자에는 뇌유래 신경영양인자(BDNF), 인슐린양 성장인자(IGF), 섬모 향신경성 인자(CNTF) 등이 있다. 이외에도 활성산소에 의한 산화성 손상이나 변이 유전자에 의한 단백질 응집 등이 루게릭병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사실 이런 요인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해 루게릭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운동신경세포 살리고 죽이는 이웃 세포



 

시간이 갈수록 종우의 몸은 딱딱히 굳어간다. 그리고 낙천적 성격의 종우도 루게릭병 앞에 점점 의지를 잃어간다. 뇌와 척수의 운동신경세포는 성상교세포와 면역세포의 일종인 미세아교세포처럼 신경세포가 아닌 세포들과 이웃하고 있다. 이 세포들은 운동신경세포에 신경영양인자를 공급하거나, 분비된 글루타메이트 같은 흥분전달물질을 제거하며 바이러스 같은 외부 인자가 중추신경계로 침입할 때 독성 물질을 분비해 면역 반응을 일으킨다.

루게릭병에서 일어나는 선택적인 운동신경세포 사멸이 상당 부분 이런 이웃 세포들에 의해 조절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03년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루드비히 암연구센터의 돈 클리블랜드 박사팀은 운동신경세포와 이웃한 세포들이 운동신경세포 사멸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게재했다. 연구팀은 정상 생쥐와 변이 SOD1 유전자를 발현하는 생쥐의 분할란을 융합하고 정상 생쥐의 배아줄기세포를 이 돌연변이 생쥐의 배반포에 주입해 정상유전자와 변이 유전자를 발현하는 세포가 한 개체에 공존하는 키메라 생쥐를 만들었다.

이 생쥐를 조사한 결과 연구팀은 정상 운동신경세포라도 변이 유전자를 발현하는 세포가 주변에 있을 때 운동신경세포가 사멸했고, 반면에 변이가 생긴 운동신경세포라도 정상 세포가 주변에 있을 때는 사멸이 뚜렷이 지연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캐나다 맥길대 신경과학연구소의 구이 룰루 박사팀도 생쥐에서 SOD1 변이 유전자를 운동신경세포에만 특이적으로 발현시켰을 때 운동신경세포가 사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루게릭병에서 일어나는 운동신경세포 사멸이 단지 운동신경세포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세포 독성의 결과가 아니라는 뜻이다. 운동신경세포의 이웃은 죽어가는 운동신경세포를 구원할 수도, 멀쩡한 운동신경세포의 사멸을 유도할 수도 있는 셈이다.

 


세포사멸 억제제와 줄기세포로 치료한다


 

“지수야, 나한테도 정말 기적이 일어날까?”

영화에서 종우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지만 아직까지 루게릭병에는 효과적인 치료제가 없다. 신경 말단에서 분비되는 글루타메이트의 양을 줄이고 글루타메이트로 인한 흥분성 세포 독성을 막는 릴루졸(Riluzole)이라는 약제가 개발돼 쓰이고 있지만 이 약제는 환자의 호흡근이 마비되기까지의 기간을 2~3개월 정도 연장시키는 수준에 그친다. 현재까지 수많은 치료법이 루게릭병 환자에게 쓰였으나 안타깝게도 결과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현재 진행 중인 치료법 연구는 세포사멸 억제제 개발, 신경영양인자를 공급하는 방법, 유전자 치료와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최근의 유전자 치료법 연구는 기존의 신경영양인자 같은 치료제를 공급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전자를 이용하던 단계에서 나아가 변이 SOD1 유전자의 발현을 RNA 수준에서 차단하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환자의 골수에 건강한 공여자의 조혈모세포를 이식하는 골수 이식법 외에 배아줄기세포, 제대혈 혹은 신경줄기세포가 주요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한 예로 중앙대 의대 김승업 교수팀은 줄기세포로 루게릭병에 걸린 쥐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연구결과를 유전자 치료 관련학술지 ‘진 테라피(Gene Therapy)’ 8월호에 발표했다. 루게릭병에 걸린 쥐의 척수에 ‘혈관신생인자(VEGF)’ 유전자를 넣은 인간 신경 줄기세포를 이식한 결과 루게릭병 발병시기가 7일간 늦어졌고 운동기능이 호전돼 대조군보다 생명이 12일간 연장됐다.

그러나 줄기세포로 루게릭병을 완전히 치료하려면 이식된 줄기세포가 사멸된 운동신경세포를 대신해 중추신경계 조직에 붙어서 살 수 있어야 하고 골격근에 이르는 신경돌기를 만들어내야 해 아직까지 풀어야 할 난제가 많다.



※ 홍윤호 교수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2006년 동대학원에서‘변이 SOD1 유전자가 운동신경세포의 세포골격 단백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보라매병원 신경과 전문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 서울대 의대 신경과학 교실의 조교수로 루게릭병에 대한 임상 및 기초 연구를 하고 있다.

2009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홍윤호 서울대 보라매병원 신경과 전문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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