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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학생, 대상입니다.”수화기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름과 학교가 맞는 걸 보니 나에게 걸려온 전화가 분명했다. 전국학생과학논술대회 대상에겐 청소년국제포럼에 참가할 수 있는 영국행 티켓이 주어지지 않던가! 청소년국제포럼은 영국 자연사박물관과 영국문화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국제학생포럼이다.
올해의 주제는 ‘다윈과 진화과학’이었다. 다윈의 200번째 생일이자 그가 쓴 ‘종의 기원’출판 150주년에 열리는 이번 포럼은 그 의미가 더 특별했다. 13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영국은 상상했던 모습 그 이상이었다. 특히 영국식으로 고풍스럽게 지어진 건물들이 인상적이었다. 6월 29일 월요일 오전, 포럼 기간 동안 묵게 될 임페리얼칼리지에 도착했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임페리얼 칼리지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곳으로 자연과학과 공학 계열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임페리얼칼리지에 도착한 첫 날은 간단히 기숙사를 배정받고, 다른 나라 학생들과의 서먹함을 깨는 활동, 그리고 박물관을 자유롭게 탐색하며 보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자연사박물관의 ‘특별한 서고’를 방문한 일이었다. 그곳에선 역사 속 수많은 과학자들과 탐험가들이 여행 중에 그렸던 스케치 원본, 희귀동물을 묘사한 글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둘째 날인 6월 30일부터는 본격적인 포럼이 시작됐다. 포럼은 임페리얼칼리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에서 진행됐다. 대부분 진화과학, 생물학, 생태학을 주제로 한 강연들이었는데, 내용은 좋았지만 서로 토론하는 방식이 아니라 일방적인 강의 형식인 점은 조금 아쉬웠다.
다음 날인 7월 1일 진행된 강연은 다윈이‘종의 기원’을 발표한 이후의 과학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내용이었다. 특히 ‘인간의 진화’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인간 진화의 핵심내용은 인간이 침팬지, 원숭이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 700~400만 년 전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독립적으로 진화했다는 사실이다.
이날 한 강연자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언어’를 쓰도록 진화했다”며 “동물들의 의사소통은 복잡성이 떨어져 언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간과 대부분의 유전자가 일치하는 침팬지의 권리를 주장하는 강연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강연자는 50%의 유전자가 인간과 동일한 바나나를 예로 들며 바나나도 인간의 절반만큼 대우를 해줘야 하느냐고 농담을 하며 인권은 유일하게 인간만이 누리는 혜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종교와 과학이 충돌하는 지점이었는데, 한 강연자가“그래서 창조론은 틀렸습니다”라고 강의를 끝내자, 많은 학생들이 질문 시간이 아닌데도 손을 들며 질문을 하려 했다. 그날 밤 기숙사로 돌아와 ‘창조과학’에 대해 검색해보니 최근엔 종교계에서도 다윈의 진화론을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과학과 다윈의 위대함이 새삼 다시 느껴졌다.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은 조를 나눠 박물관의 숨겨진 곳곳을 탐방했다. 귀중한 표본이 들어 있는 보관실에도 들어갔었는데, 매우 추웠던 걸로 기억한다. 이 거대한 방에는 수백 년이 된 새우표본(shrimp라는 영어단어 대신 머리 아픈 학명이 적혀 있었지만), 오징어를 포함한 다양한 해양생물체가 있었다. 겹겹으로 된 자동문, 비밀스러운 구조와 철저한 보안장치, 자동 온도·습도 조절 시스템을 갖춘 보관실은 해리포터에 나오는 비밀의 방 같은 느낌을 줬다.
저녁엔 임페리얼칼리지 식당건물 앞마당에서 바비큐 파티가 열렸다. 바비큐를 먹는 것 자체보다 사람들과 함께 잔디밭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게 더 신났다. 아시아에서 왔다고 하면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냐고 묻는 외국인들이 처음엔 얄미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도 우크라이나, 슬로베니아, 불가리아, 요르단 같은 나라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다양한 국적의 학생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부분이다.
이번 포럼의 주제인 진화론은 자연과학 분야이지만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싶은 나에게도 많은 영감을 줬다. 특히 “지성과 언어는 진화한다. 그래서 인류는 계속 진화한다”는 말은 아직도 내 가슴을 울리고 있다. 며칠간 맞은 ‘지적 소나기’의 여파는 아마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다. 이런 멋진 경험을 하게 해준 영국문화원, 자연사박물관, 임페리얼칼리지 그리고 동아사이언스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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