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리포터에서는 사진이나 그림 속 인물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심지어는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과연 이런 마법 같은 일은 영화에서만 가능할까? 광주과학기술원 문화콘텐츠기술연구소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문화콘텐츠기술연구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책상 위에는 푸른 들판이 그려진 그림책 한 권이 펼쳐져 있고 스탠드식 소형 카메라가 그림책을 촬영하고 있다. 썰렁한 그림책에 실망하려는 순간, 저게 뭐지? 모니터를 보니 3차원 동물들이 그림책 위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고 있다! 분명 책 위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햅틱(촉각)장치로 책 가장자리를 기어가는 거북이 한 마리를 집어서 바위그림 근처에 옮겨놨더니 3차원 거북이 바위그림을 살짝 피해서 기어간다. 거북이 움직이는 속도를 빠르게 할 수도 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책(아날로그)에 가상의 3차원 디지털 이미지를 덧입힌 이 특별한 책은 광주과학기술원 문화콘텐츠기술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디지로그(digilog,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북이다. 디지로그북의 그림들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컴퓨터와 카메라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이런 영화 같은 디지로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전자책과 종이책의 장점을 동시에
디지로그북의 장점은 아날로그 종이책이 가지는 ‘존재감’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종이책이 제공할 수 없는 시각, 청각, 촉각적인 멀티미디어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광주과학기술원 문화콘텐츠기술연구소 소장인 우운택 교수는 디지로그북처럼 실생활에 근접한 가상현실을 만드는 기술을 증강현실기술이라고 설명했다.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은 일반적인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과는 다른 개념이다. 가상현실이 배경과 콘텐츠를 모두 디지털화해서 컴퓨터 속에 현실을 똑같이 재현해놓은 것이라면, 증강현실은 실제 배경을 그대로 두고 디지털 콘텐츠를 덧입힌 결과다. 이 때문에 증강현실은 가상현실보다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특히 문화콘텐츠기술연구소에서는 기존의 아날로그 정보와 새롭게 첨가하는 디지털 정보가 상호작용하는 기술을 개발해 좀 더 실감나는 증강현실을 만들어냈다. 이 방식을 사용하면 앞에서처럼 3차원 입체 거북이 그림책에 그려진 2차원 바위그림을 피해서 기어간다.
2007년 6월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으로 설립된 광주과학기술원 문화콘텐츠기술연구소는 증강현실 관련 특허를 30개나 출원한 국내 최초의 증강현실연구소다. 디지로그북은 연구소가 설립 초기부터 개발해오던 야심작으로 2010년 3월 ‘홍길동전’이 첫 작품으로 출시된다. 같은 해 5월에는 벤처기업인 G-ART가 설립될 계획이다.
문화콘텐츠기술연구소에서는 세계 최초로 디지로그북의 제작 소프트웨어인 아틀렛(ARtalet)도 함께 개발하고 있다. 현재 디지털 교과서를 제작하려면 고도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능력이 필요하지만, 아틀렛을 이용하면 누구나 손쉽게 증강현실을 만들 수 있다. 디지로그북은 이런 제작의 편의성 때문에 차세대 디지털 교과서 제작 도구로도 각광받고 있다.
실감나는 증강현실 박물관
디지로그북에 쓰인 증강현실을 우리가 생활하는 3차원 현실 공간에 적용할 수 있을까? 문화콘텐츠기술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모바일 박물관 체험 시스템’은 특수제작한 휴대전화를 사용해 박물관이라는 3차원 현실 공간에 증강현실을 구현한다. 휴대전화의 카메라로 박물관 내부를 보면 화살표나 소리, 진동이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한다. 전시된 유물을 둘러보다 휴대전화를 갖다 대면 유물의 상세정보를 실제 유물과 겹쳐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3차원 현실 공간에 증강현실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공간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아는 일이 먼저다. 우운택 교수 연구팀이 개발하고 있는 ‘공간센싱’기술은 3차원 공간을 체커 판처럼 세분해 공간에 있는 사물의 위치 정보를 좌표로 인식한다. 공간에 어떤 사물이 있는지 위치가 정확히 파악되면 거기에 맞게 디지털 콘텐츠의 위치, 각도, 크기를 바꿔 공간에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할 수 있다.
실제로 연구팀은 광주과학기술원 캠퍼스를 축소한 3차원 입체모형에 로봇이 춤을 추는 이미지를 합성해냈다. 가로 세로 높이가 1m정도 되는 캠퍼스 공간의 위치정보를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파악하면서 춤추는 로봇의 위치정보를 첨가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로봇의 정보와 공간의 실시간 정보가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로봇이 건물에 부딪치지 않고 춤을 출 수 있다. 공간에 손이나 다른 사물을 넣으면 카메라가 즉시 위치를 인식해 그것과 부딪치지 않도록 로봇의 위치를 조정한다. 문화콘텐츠기술연구소의 공간센싱연구는 2008년 국제고급컴퓨터엔터테인먼트기술대회(ACE)에서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우운택 교수는 “누구나 손쉽게 증강현실을 만들고 이용할 수 있는 ‘도구’를 개발하고 싶다”며 “컴퓨터 그래픽이나 기하학, 물리학, 수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즐겁게 연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