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마지막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선 무하마드 알리. 성화를 든 그의 손과 얼굴은 치매에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던 전설의 복서가 어찌된 일일까.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바로 파킨슨병이다. 파킨슨병은 퇴행성 뇌질환으로 65세 이상 노인 100명당 1명이 걸린다. 이 병에 걸리면 신경세포와 근육에 이상이 생겨 손발을 떨고, 걷거나 말을 잘 하지 못한다. 평균수명이 연장되며 파킨슨병 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지만 아직까지 진단시약이나 치료제는 개발되지 않았다. 그런데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초파리에 파킨슨병을 극복할 실마리가 숨어 있다면 알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초파리가 알려준 파킨슨병의 비밀
KAIST 생명과학과 정종경 교수가 이끄는 세포성장조절유전체 연구단은 초파리를 연구해 사람이 파킨슨병에 걸리는 원인을 알아냈다. 초파리는 질병유전자의 70%가 사람과 같고 1세대가 2주 정도로 짧아 유전병을 연구하기에 좋다.
‘핑크1’(PINK1)이라는 유전자가 망가질 경우 근육세포와 도파민 뇌신경세포의 미토콘드리아가 모양이 변하거나 파괴돼 파킨슨병에 걸린다는 것이다. 그동안 핑크1은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핵심 유전자로 지목됐지만 이 유전자가 어떤 과정으로 파킨슨병을 유발하는지 알려진 사실이 없었다.
우선 연구팀은 핑크1 유전자가 없는 초파리 ‘질병모델 동물’을 만들었다. 질병모델 동물이란 사람을 대상으로 질병을 연구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인위적인 방법으로 사람과 같은 질병을 갖도록 만든 실험동물을 말한다. 핑크1이 없는 초파리는 정상 초파리와 비교했을 때 날개가 지나치게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처져 날지 못했고 근육 구조도 변해 잘 움직이지 못했다. 날개를 움직이는 근육세포 속의 미토콘드리아가 비정상적으로 커지거나 변형돼 근육에 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뇌 속에 있는 도파민 신경세포도 조사했다. 그 결과 신경세포 안의 미토콘드리아도 대부분 크기와 모양이 변해 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한 세포는 기능을 상실하거나 파괴된다. 핑크1이 없는 초파리는 정상 초파리와 비교했을 때 도파민 신경세포 수가 파킨슨병 환자처럼 줄어드는 현상이 관찰됐다.
밤낮으로 초파리를 관찰하던 연구팀은 핑크1 유전자가 없는 초파리가 또 다른 파킨슨병 유전자인 ‘파킨’(Parkin)이 없는 초파리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행동양식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파킨슨병을 일으킨다고 알려진 유전자는 핑크1과 파킨을 포함해 약 10개 정도. 일반적으로 원인 유전자가 다르면 병의 증상이나 행동양식도 조금씩 다르다.
연구팀은 두 유전자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결과 두 유전자가 동일한 신호체계에 있으며 핑크1이 파킨의 상위에서 미토콘드리아의 작용을 조절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연구 결과는 2006년 5월 세계 최고 학술지인 ‘네이처’에 발표됐고 전 세계 연구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동안 파킨은 핑크1과 다른 방식으로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로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정 단장은 “핑크1이 없는 초파리에 인위적으로 파킨 유전자를 대량 발현시켰더니 정상 초파리처럼 파킨슨병 증상이 완화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파킨이 없는 초파리에 핑크1을 대량 발현시켰을 경우에는 파킨슨병 증상이 완화되지 않았다.
이 연구는 지지부진했던 파킨슨병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한걸음 다가서게 할 성과로 평가받았다. 파킨슨병은 알려진지 약 200년이 됐지만 발병 원인을 포함해 거의 알려진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팀이 파킨슨병을 연구한 기간은 불과 5년이다.
연구단의 보물, ‘초파리 유전자 사전’
이런 성과가 가능했던 이유는 연구단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초파리 질병모델 동물 라이브러리’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초파리 라이브러리는 초파리 유전자 1만 3000개의 기능을 설명하는 일종의 ‘유전자 사전’이다. 초파리 라이브러리를 이용하면 초파리의 각 유전자가 변형됐을 때 이상이 생기는 부위와 증상을 알 수 있다.
정 단장은 KAIST에 부임한 1996년 이후 3년 동안 사람이나 동물의 세포를 배양해 사람의 질병을 연구했다. 하지만 연구는 큰 진전이 없었다. 나무 하나만 계속 보면 숲 전체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세포만 연구하니 시야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정 단장은 “세포 하나만 연구해서는 병에 걸린 개체의 이상 행동이나 질병 전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고민 끝에 정 단장은 세포 수준에서 하던 연구를 개체 수준(동물 하나)으로 범위를 확대했다. 이런 시도는 전공인 세포 성장 분야가 아닌 새로운 영역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정 단장으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1999년 정 단장은 생명과학과 동료 교수 몇 명과 함께 ‘초파리 질병모델 동물 라이브러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초파리 유전자 1만 3000여개 각각이 변형된 돌연변이를 만드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초파리 라이브러리를 완성하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정 단장은 동료 교수들과 함께 작은 벤처회사를 설립해 초파리 유전자 수의 10배에 이르는 총 10만 종류의 유전자 변형 초파리를 만들었다. 개별 유전자 하나하나가 변형된 돌연변이를 일일이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무작위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트랜스포존’이라는 DNA 조각을 사용했다.
트랜스포존은 유전자 사이를 자유롭게 움직이며 염기서열 사이에 끼어들어 유전자를 망가뜨린다. 연구단은 이 방법으로 1만 3000개 유전자의 70%(약 9000개)가 변형된 초파리를 얻었다. 연구단의 박사과정 박지혜 씨는 “초파리는 사람과 질병유전자의 70%가 같고 1세대가 2주 정도로 짧아 유전병을 연구하는 데 장점이 많다”고 말했다.
당뇨 조절 유전자의 항암 기능 밝혀
연구단은 ‘AMPK’라는 유전자가 고장 나면 세포의 구조와 염색체 수에 이상이 생길 뿐 아니라 배아세포가 분화해 발생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AMPK는 세포에 에너지가 없을 때 활성화되는 효소로 에너지가 부족한 세포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을 막고 부족한 에너지를 다시 정상 수준으로 채워 넣는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AMPK 유전자가 완전히 고장 난 동물이 없어 연구팀들은 AMPK가 생체에서 물질대사 조절 외에 어떤 다른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 유전자수(약 4만 개) 의 3분의 1 정도인 초파리는 AMPK의 기능을 조절하는 유전자가 하나밖에 없어 하나만 고장 나도 AMPK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은 AMPK를 조절하는 유전자가 2개 이상이다.
연구단은 AMPK가 고장 난 초파리를 조사한 결과 AMPK가 세포 골격을 이루는 액틴 미세섬유를 조절해 세포의 구조와 염색체 숫자를 정상으로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AMPK가 고장 난 초파리는 배아단계에서 세포의 구조가 변해 분화하지 못하고 죽었다.
연구단은 정상 세포가 염색체 숫자나 세포 구조를 유지하지 못할 경우 암세포로 변할 수 있다는 점에도 착안했다. 사람의 대장암 세포에서 AMPK의 활성을 인위적으로 증가시키자 대장암 세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 연구결과는 2007년 5월 ‘네이처’에 발표됐다. 정 단장은 “체내 특정 부위에 AMPK의 활성을 올리는 약을 개발하면 일부 암에 항암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난치성 질환을 극복할 날도 머지 않았다”고 말했다.
인터뷰_정종경 단장
이방인에서 파킨슨병 연구 분야 세계 NO.1으로
파킨슨병을 연구하기 시작한 1999년만 해도 정 단장은 이 분야 ‘이방인’이었다. 저널에 논문을 투고하려고 해도 아무도 이 ‘낯선’ 연구자의 연구 결과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정 단장이 파킨슨병 분야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180도 달라졌다. 미국 하버드대와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대(UCLA), 워싱턴주립대 등 파킨슨병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연구팀들이 연구단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2006년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흐른다”는 정 단장. 2006년 초 미국에서 열린 초파리학회에서 정 단장이 초파리를 활용한 연구 과정을 발표한 뒤 UCLA를 비롯한 해외 경쟁 연구팀이 연구단과 같은 방법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경쟁 연구팀에 연구 성과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 단장은 밤잠을 설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뜻하지 않던 어려움까지 찾아왔다. 전자현미경으로 초파리를 관찰하는 작업을 도와주던 충남대 의대 담당자가 과로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슬픈 마음을 추스르자마자 정 단장은 연구단원들과 힘을 합쳐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에 매진하는 것만이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 끝에 연구단은 경쟁 연구팀의 추격을 뿌리치고 2006년 5월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인 2007년 5월 AMPK의 기능에 대한 또 다른 논문을 ‘네이처’에 발표하면서 그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정 단장은 지난 10년 동안의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11월에 경암학술상을 수상한다.
“이 모든 성과가 1999년 초파리로 사람의 질병을 연구하겠다고 결정한 그날의 ‘우연’ 때문”이라고 말하는 정 단장은 지금도 ‘이방인’이었던 때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생명과학뿐 아니라 의학 분야에서 발표되는 관련 논문까지 가능한 빠짐없이 읽는다”는 정 단장은 다시 한 번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우연 아닌 ‘우연’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바로 파킨슨병이다. 파킨슨병은 퇴행성 뇌질환으로 65세 이상 노인 100명당 1명이 걸린다. 이 병에 걸리면 신경세포와 근육에 이상이 생겨 손발을 떨고, 걷거나 말을 잘 하지 못한다. 평균수명이 연장되며 파킨슨병 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지만 아직까지 진단시약이나 치료제는 개발되지 않았다. 그런데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초파리에 파킨슨병을 극복할 실마리가 숨어 있다면 알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초파리가 알려준 파킨슨병의 비밀
KAIST 생명과학과 정종경 교수가 이끄는 세포성장조절유전체 연구단은 초파리를 연구해 사람이 파킨슨병에 걸리는 원인을 알아냈다. 초파리는 질병유전자의 70%가 사람과 같고 1세대가 2주 정도로 짧아 유전병을 연구하기에 좋다.
‘핑크1’(PINK1)이라는 유전자가 망가질 경우 근육세포와 도파민 뇌신경세포의 미토콘드리아가 모양이 변하거나 파괴돼 파킨슨병에 걸린다는 것이다. 그동안 핑크1은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핵심 유전자로 지목됐지만 이 유전자가 어떤 과정으로 파킨슨병을 유발하는지 알려진 사실이 없었다.
우선 연구팀은 핑크1 유전자가 없는 초파리 ‘질병모델 동물’을 만들었다. 질병모델 동물이란 사람을 대상으로 질병을 연구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인위적인 방법으로 사람과 같은 질병을 갖도록 만든 실험동물을 말한다. 핑크1이 없는 초파리는 정상 초파리와 비교했을 때 날개가 지나치게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처져 날지 못했고 근육 구조도 변해 잘 움직이지 못했다. 날개를 움직이는 근육세포 속의 미토콘드리아가 비정상적으로 커지거나 변형돼 근육에 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뇌 속에 있는 도파민 신경세포도 조사했다. 그 결과 신경세포 안의 미토콘드리아도 대부분 크기와 모양이 변해 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한 세포는 기능을 상실하거나 파괴된다. 핑크1이 없는 초파리는 정상 초파리와 비교했을 때 도파민 신경세포 수가 파킨슨병 환자처럼 줄어드는 현상이 관찰됐다.
밤낮으로 초파리를 관찰하던 연구팀은 핑크1 유전자가 없는 초파리가 또 다른 파킨슨병 유전자인 ‘파킨’(Parkin)이 없는 초파리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행동양식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파킨슨병을 일으킨다고 알려진 유전자는 핑크1과 파킨을 포함해 약 10개 정도. 일반적으로 원인 유전자가 다르면 병의 증상이나 행동양식도 조금씩 다르다.
연구팀은 두 유전자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결과 두 유전자가 동일한 신호체계에 있으며 핑크1이 파킨의 상위에서 미토콘드리아의 작용을 조절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연구 결과는 2006년 5월 세계 최고 학술지인 ‘네이처’에 발표됐고 전 세계 연구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동안 파킨은 핑크1과 다른 방식으로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로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정 단장은 “핑크1이 없는 초파리에 인위적으로 파킨 유전자를 대량 발현시켰더니 정상 초파리처럼 파킨슨병 증상이 완화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파킨이 없는 초파리에 핑크1을 대량 발현시켰을 경우에는 파킨슨병 증상이 완화되지 않았다.
이 연구는 지지부진했던 파킨슨병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한걸음 다가서게 할 성과로 평가받았다. 파킨슨병은 알려진지 약 200년이 됐지만 발병 원인을 포함해 거의 알려진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팀이 파킨슨병을 연구한 기간은 불과 5년이다.
연구단의 보물, ‘초파리 유전자 사전’
이런 성과가 가능했던 이유는 연구단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초파리 질병모델 동물 라이브러리’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초파리 라이브러리는 초파리 유전자 1만 3000개의 기능을 설명하는 일종의 ‘유전자 사전’이다. 초파리 라이브러리를 이용하면 초파리의 각 유전자가 변형됐을 때 이상이 생기는 부위와 증상을 알 수 있다.
정 단장은 KAIST에 부임한 1996년 이후 3년 동안 사람이나 동물의 세포를 배양해 사람의 질병을 연구했다. 하지만 연구는 큰 진전이 없었다. 나무 하나만 계속 보면 숲 전체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세포만 연구하니 시야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정 단장은 “세포 하나만 연구해서는 병에 걸린 개체의 이상 행동이나 질병 전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고민 끝에 정 단장은 세포 수준에서 하던 연구를 개체 수준(동물 하나)으로 범위를 확대했다. 이런 시도는 전공인 세포 성장 분야가 아닌 새로운 영역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정 단장으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1999년 정 단장은 생명과학과 동료 교수 몇 명과 함께 ‘초파리 질병모델 동물 라이브러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초파리 유전자 1만 3000여개 각각이 변형된 돌연변이를 만드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초파리 라이브러리를 완성하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정 단장은 동료 교수들과 함께 작은 벤처회사를 설립해 초파리 유전자 수의 10배에 이르는 총 10만 종류의 유전자 변형 초파리를 만들었다. 개별 유전자 하나하나가 변형된 돌연변이를 일일이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무작위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트랜스포존’이라는 DNA 조각을 사용했다.
트랜스포존은 유전자 사이를 자유롭게 움직이며 염기서열 사이에 끼어들어 유전자를 망가뜨린다. 연구단은 이 방법으로 1만 3000개 유전자의 70%(약 9000개)가 변형된 초파리를 얻었다. 연구단의 박사과정 박지혜 씨는 “초파리는 사람과 질병유전자의 70%가 같고 1세대가 2주 정도로 짧아 유전병을 연구하는 데 장점이 많다”고 말했다.
당뇨 조절 유전자의 항암 기능 밝혀
연구단은 ‘AMPK’라는 유전자가 고장 나면 세포의 구조와 염색체 수에 이상이 생길 뿐 아니라 배아세포가 분화해 발생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AMPK는 세포에 에너지가 없을 때 활성화되는 효소로 에너지가 부족한 세포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을 막고 부족한 에너지를 다시 정상 수준으로 채워 넣는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AMPK 유전자가 완전히 고장 난 동물이 없어 연구팀들은 AMPK가 생체에서 물질대사 조절 외에 어떤 다른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 유전자수(약 4만 개) 의 3분의 1 정도인 초파리는 AMPK의 기능을 조절하는 유전자가 하나밖에 없어 하나만 고장 나도 AMPK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은 AMPK를 조절하는 유전자가 2개 이상이다.
연구단은 AMPK가 고장 난 초파리를 조사한 결과 AMPK가 세포 골격을 이루는 액틴 미세섬유를 조절해 세포의 구조와 염색체 숫자를 정상으로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AMPK가 고장 난 초파리는 배아단계에서 세포의 구조가 변해 분화하지 못하고 죽었다.
연구단은 정상 세포가 염색체 숫자나 세포 구조를 유지하지 못할 경우 암세포로 변할 수 있다는 점에도 착안했다. 사람의 대장암 세포에서 AMPK의 활성을 인위적으로 증가시키자 대장암 세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 연구결과는 2007년 5월 ‘네이처’에 발표됐다. 정 단장은 “체내 특정 부위에 AMPK의 활성을 올리는 약을 개발하면 일부 암에 항암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난치성 질환을 극복할 날도 머지 않았다”고 말했다.
인터뷰_정종경 단장
이방인에서 파킨슨병 연구 분야 세계 NO.1으로
파킨슨병을 연구하기 시작한 1999년만 해도 정 단장은 이 분야 ‘이방인’이었다. 저널에 논문을 투고하려고 해도 아무도 이 ‘낯선’ 연구자의 연구 결과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정 단장이 파킨슨병 분야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180도 달라졌다. 미국 하버드대와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대(UCLA), 워싱턴주립대 등 파킨슨병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연구팀들이 연구단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2006년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흐른다”는 정 단장. 2006년 초 미국에서 열린 초파리학회에서 정 단장이 초파리를 활용한 연구 과정을 발표한 뒤 UCLA를 비롯한 해외 경쟁 연구팀이 연구단과 같은 방법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경쟁 연구팀에 연구 성과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 단장은 밤잠을 설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뜻하지 않던 어려움까지 찾아왔다. 전자현미경으로 초파리를 관찰하는 작업을 도와주던 충남대 의대 담당자가 과로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슬픈 마음을 추스르자마자 정 단장은 연구단원들과 힘을 합쳐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에 매진하는 것만이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 끝에 연구단은 경쟁 연구팀의 추격을 뿌리치고 2006년 5월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인 2007년 5월 AMPK의 기능에 대한 또 다른 논문을 ‘네이처’에 발표하면서 그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정 단장은 지난 10년 동안의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11월에 경암학술상을 수상한다.
“이 모든 성과가 1999년 초파리로 사람의 질병을 연구하겠다고 결정한 그날의 ‘우연’ 때문”이라고 말하는 정 단장은 지금도 ‘이방인’이었던 때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생명과학뿐 아니라 의학 분야에서 발표되는 관련 논문까지 가능한 빠짐없이 읽는다”는 정 단장은 다시 한 번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우연 아닌 ‘우연’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