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충돌을 감지하는 에어백의 가속도계, 디지털카메라의 손 떨림을 감지하는 자이로 센서, 잉크젯 프린터의 잉크 분사기, 빔 프로젝터의 화상을 만드는 미세거울….
위에서 나열한 장치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머리카락 굵기보다 더 작은 초소형 기계, 즉 마이크로 전자기계시스템(MEMS, Micro Electro Mechanical System)이라 부르는 첨단기술이 적용됐다는 점이다.
반도체칩의 집적회로를 만드는 기술에서 출발한 MEMS는 미세가공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이제 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가 아니라 nm(나노미터, 1nm=10-9m) 단위의 부품으로 이뤄진 기계를 만드는 NEMS로 발돋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전체나 단백질 같은 바이오 분자물질을 검출하는 바이오센서와 근육 속에 있는 nm 굵기의 액틴과 미오신이라는 단백질의 움직임을 흉내내 만든 실리콘 근육칩, 휴대전화의 주파수 변동을 위한 나노간격의 가변 콘덴서 같은 장치가 바로 NEMS 기술을 응용한 사례다.
하지만 NEMS에 도전하는 과학자들은 초소형 기계를 작게 만들면 만들수록 이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현상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무엇이 이들의 발목을 잡은 것일까.
마이크로월드의 거대한 힘, 점착
nm~μm 크기의 초소형 기계가 작동하는 미시 세계는 mm~m 크기의 기계가 움직이는 거시 세계와 지배하는 힘이 많이 다르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계는 중력 또는 관성을 극복하는 일이 큰 숙제다. 기계 자체의 무게를 버티며 부속품의 운동을 잘 조절해야 기계가 작동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미시 세계에서는 중력이나 관성이 아니라 기계 부품들끼리 서로 들러붙는 힘이 골칫거리다.
거시 세계에서는 이런 힘이 마찰력으로 나타난다. 마찰력은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진 두 물체가 접촉해 미끄러지며 움직일 때 생기는 저항력으로, 그 크기는 두 물체 접촉면에 수직인 힘과 비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시 세계의 기계는 마찰을 줄이기 위해 기름 같은 윤활제를 사용한다.
하지만 미시 세계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초소형 기계의 경우 윤활제를 사용하면 마찰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두 물체를 붙이는 접착제 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시 세계에서 기계 부품들끼리 서로 붙게 만들어 초소형 기계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현상을 ‘점착’(stiction)이라고 한다.
점착이 일어나는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초소형 기계와 바닥 면 사이에 갇힌 유체의 표면장력 때문에 일어나는 모세관 현상은 초소형 기계가 바닥에 붙게 한다. 물체 표면의 음과 양의 전기를 띠는 정전하 사이의 인력으로 나타나는 정전기 효과도 초소형 부품끼리 서로 붙게 만드는 원인이다.
이밖에 기계 표면을 이루는 수소분자 사이에 강한 인력이 작용하는 수소결합이나, 분자의 모양에 상관없이 분자 사이에 작용하는 약한 인력인 반데르발스 힘도 초소형 기계를 ‘껌’처럼 들러붙게 한다.
이들 힘은 거시 세계에서는 무시할 정도로 작은 힘이지만, 마이크로 세계에서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점착을 일으키는 이들 현상 대부분은 일찌감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그 원인이나 특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과학자들을 괴롭혀 온 현상이 있다. 아무 것도 없는 진공에서 나오는 유령 같은 존재. 바로 카시미르 힘이다.
무에서 나오는 영향력, 카시미르 힘
1948년 네덜란드 이론 물리학자 헨드릭 카시미르는 미시 세계에 나타나는 카시미르 효과를 이론적으로 처음 예측했다. 그는 도체 평판 두 장을 진공에 넣은 뒤 0K(영하 273℃)에서 서로 마주 보도록 가까이 놓으면, 두 평판은 평판 사이 거리의 4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주장했다. 카시미르는 고전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현상을 양자역학의 자연스런 결과라고 설명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공간은 요동치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이를 ‘양자요동’이라고 한다. 그런데 도체 평판 사이에는 진공 중에 있는 수많은 에너지 파동 중 평판 사이 간격에 맞는 파장의 에너지만 존재한다. 마치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아 정해진 관의 길이에 맞는 특정 음파만 내부에서 진동시켜 음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피리처럼 말이다.
따라서 두 도체 평판 사이에는 진공에 있는 에너지 파장 가운데 특정 에너지 파장만 남게 되고, 평판 사이의 에너지 밀도는 평판 밖보다 작다. 그 결과 평판 사이에는 안쪽으로 밀리는 힘이 생긴다. 이 힘이 카시미르 힘이다.
카시미르 힘은 이론적으로 예측된 지 50년이 지나서야 처음 실험으로 측정됐다. 1997년 미국 리버사이드 소재 캘리포니아대 우마 모히딘 교수팀은 금속을 입힌 지름 수백 μm의 공과 금속판 사이에 nm~μm 거리를 두고 이들 사이에 작용하는 카시미르 힘을 측정했다. 하지만 첫 실험은 오차범위가 25~50% 수준으로 완벽한 실험이 이뤄지지 못했다.
그후 2000년대에 들어 MEMS 설계와 제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카시미르 힘을 정확히 측정하는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돼 오차범위가 1% 수준으로 정확해졌다.
모히딘 교수팀이 2000년 이후 발표한 실험결과에 따르면 카시미르 힘은 두 도체 평판 사이 간격이 20nm인 경우 0.08기압의 압력을 나타낸다. 하지만 간격이 10nm로 줄면 압력이 1기압에 이를 정도로 커진다. 이 정도의 압력이 작용하면 초소형 기계들은 ‘거침없이’ 들러붙고 만다.
지금까지 세계 여러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종합하면 카시미르 힘은 반데르발스 힘보다도 훨씬 먼 거리까지 작용하며, 물체 모양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전기전도도가 좋은 물질일수록, 또 표면이 따뜻할수록 카시미르 힘이 커진다.
연꽃잎 모방하고, 레이저 쏴 흔들고
카시미르 효과를 비롯한 점착 현상은 초소형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하거나 수명을 크게 단축시킨다. 과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초소형 기계의 표면에너지(끌어당기는 힘에 의한 에너지) 자체를 낮추는 방안과 점착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표면에너지를 낮추는 방법으로는 물방울이 맺지 못하고 쉽게 굴러 떨어지는 연꽃잎의 표면을 모사하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연꽃잎에는 nm 크기의 작은 돌기가 나 있다. 연꽃잎에 물방울이 떨어지면 이 돌기는 물방울과 표면과의 접촉각을 150°이상으로 유지시키며 아래로 떨어지게 만든다. 초소형 기계 표면을 연꽃잎의 미세구조를 본 따 만들면 물방울에 의한 점착이 덜 일어난다. 연꽃잎의 미세구조를 이용하면 먼지와 오물이 잘 붙지 않는 자동차 유리나 습기가 잘 차지 않는 김서림 방지 안경 그리고 비에 젖지 않는 얇은 외투 등을 만들 수 있다.
이처럼 초소형 기계 표면의 끌어당기는 힘 자체를 줄이는 방법 외에도 들러붙은 초소형 기계를 물리적인 힘으로 떼어내는 방법도 있다.
초소형 기계가 들러붙은 바닥 면에 주기가 나노초에 이르는 강력한 펄스 레이저를 쏘면 바닥 면을 움츠러들게 하는 압축응력파가 생긴다. 압축응력파는 바닥 면에 붙은 초소형 기계를 통과해 초소형 기계 윗부분에 닿으면, 반사돼 나오며 기계를 팽창시키는 인장응력파를 일으킨다. 이들 파동은 점착된 기계를 흔들어 바닥 면에서 분리시킨다.
이 기술은 바닥 면 위에 있는 초소형 기계와 유체를 흔들어 미세한 향수 입자를 만드는 향 분사기나 미세한 물방울을 만드는 가습기, 그리고 미세한 잉크 방울을 분사하는 프린터에 응용되기도 한다.
카시미르 힘 ‘완전정복’을 향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작용하는 카시미르 힘을 극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초소형 기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카시미르 힘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 자유자재로 조절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2005년 하버드대 페데리코 카파소 교수는 에탄올에 잠겨 있는 금도금된 폴리스티렌 구와 테플론 판 사이에 반발하는 카시미르 힘이 생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에탄올과 금, 금과 테플론, 테플론과 에탄올 사이에 작용하는 카시미르 힘은 모두 당기는 힘이지만, 이들 힘의 방향을 조절하면 서로 미는 방향으로 합력의 방향이 나타나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이 힘으로 물체를 공중에 띄울 수 있다는 제안까지 했다.
한편 2006년 5월 영국 세인트앤드류대의 울프 레온하르트 교수와 런던 임페리얼컬리지의 존 펜드리 교수는 두 평판 사이에 메타물질을 채워 카시미르 힘을 조절할 수 있다는 연구내용을 각각 발표했다.
메타물질은 빛의 파장보다 작은 금속과 도선을 복잡하게 배열해 만든 신종 물질로, 주위를 지나는 전자기파의 이동 방향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다. 만약 평판 사이에 있는 메타물질로 전자기장의 양자요동을 파괴하면 카시미르 효과를 약하게 할 수 있다.
이들은 나아가 메타물질로 전자기파를 반대 방향으로 구부리면 카시미르 힘을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게 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즉 초소형 기계의 한쪽을 공중에 뜨게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들 과학자들의 시도는 아직 이론적으로 제시됐을 뿐 실제 실험으로 검증된 사례는 아직 없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만 예측된 카시미르 힘이 나노기술의 발전으로 50여년 만에 과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처럼, 이런 시도들도 머지않아 실현되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기대다.
만약 메타물질을 이용해 진공에서 카시미르 힘의 크기와 방향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여러 방향의 카시미르 힘들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켜 스스로 움직이는 동력을 얻거나 진공 중에 마찰 없이 떠다니는 나노기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우주공간에 적용하면 별도의 동력 없이 우주공간을 비행하는 초소형 우주 비행체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과학자가 넘어야 할 벽은 수없이 많지만, 이런 벽을 넘으려는 시도는 날로 넓어지고 새롭게 창조된다.
조영호 교수 >;
영남대 기계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KAIST 기계공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현재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와 기계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0년부터 창의적연구진흥사업 디지털나노구동연구단장으로서 생명체의 극미세 구조와 원리를 모사한 N/MEMS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2008년 과학기술포장 서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