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스크린 속에 살아난 세종시대 로켓 신기전

세계 최초의 ‘탄도미사일’ 복원 한창

백여 명밖에 되지 않는 조선군. 여진과 명나라가 연합한 수천 명의 군사와 맞서고 있다. 여기서 무너지면 뒤를 이어 10만 대군이 조선을 침공하게 된다. 절체절명의 상황. 수적 우세를 앞세워 공격해 오는 연합군.

쉬익~ 쉬익~. 갑자기 수백 발의 화전(火箭, 불화살)이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는다. 보통화살보다 2배가 넘는 거리에서 날아드는 이 화살은 헤아려 보니 반경 70m 내에 100발 이상 쏟아지고 있다. 방패로 막아 보았으나 무용지물. 이 신묘한 화살은 목표물에 도달한 즉시 굉음을 내며 폭발한다.

“이것이 조선이 개발했다는 신무기란 말인가.”
아비규환. 더는 전열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 연합군 지휘관이 내릴 수 있는 명령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퇴각명령!
달아나는 것도 잠시. ‘슈슈슉~’ 기묘한 소리가 천지를 울린다. 하늘을 쳐다보니 조선군 측에서 거대한 불덩어리 하나가 연기를 뿜으며 2km가량의 거리를 날아들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철편이 사방으로 튄다. 정신을 차려 보니 주위에 살아남은 병사는 거의 없었다.

오는 4일 개봉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 ‘신기전’(神機箭)의 한 장면이다. 2003년부터 기획해 5년 8개월간 총 100억 원을 들여 제작한 이 영화에는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조선 초기의 무기 ‘신기전’이 등장한다.

15세기 세계 최초 로켓 병기, 영화에 구현
신기전의 역사는 고려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4세기 발명가이자 과학자인 최무선이 만든 무기 중에 ‘주화’란 로켓 병기가 포함돼 있다. 이 주화를 세종 시절 개량한 무기가 바로 ‘신기전’이다. 세종 말 1477년 편찬된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兵器圖說)에 상세한 설계도가 전해지고 있다. 신기전은 실존했던, 조선 초기 첨단과학기술의 상징 같은 무기다.

영화 신기전의 시나리오는 ‘신기전의 아버지’로 불리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채연석 연구위원이 고증했다. 채 연구위원은 국조오례서례에 포함된 신기전의 설계도가 ‘로켓’이라는 점을 발견하고 이를 세상에 알린 인물. 그의 노력 덕분에 신기전 최초의 설계도는 세계우주항공학회(IAF)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켓 설계도로 공인받았다.

영화 제작팀은 이처럼 모든 시대적 상황에 대해 철저한 고증을 거친 것도 모자라 한번 더 욕심을 냈다. 신기전은 크기에 따라 대·중·소신기전 3가지로 나뉘는데, 3가지 신기전을 모두 제작해 영화를 촬영한 것. 영화에서 강을 건너 날아가 폭발하는 불덩이가 장거리 공격용 무기인 대(大)신기전이고, 하늘을 뒤덮은 수백 발의 불화살이 중·소신기전이다. 구체적으로 중(中)신기전은 끝에 폭약을 장착한 중거리 공격용 화살이며, 소(小)신기전은 약통(추진장치)의 힘을 빌려 보통 화살에 비해 2배 더 날아가는 화살이다.

과학적 고증 의미에선 ‘절반의 성공’
제작팀은 신기전의 발사대로 쓰일 화차(火車), 중·소신기전 100발을 한꺼번에 장착할 수 있는 거치대인 신기전기(神機箭機)까지 만들었다.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기 위해 전통수레 장인인 이대길 옹과 그의 제자 이민우 씨에게 자문을 구하고, 국립중앙과학관의 조언을 얻었다.

대전 국립중앙과학관 과학기술사팀 윤용현 연구관은 “조선시대 목재기술은 현대의 건축기술에 견줄 만했다”며 “화차의 바퀴, 수레의 축 등을 설계하고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찾기 매우 어려울 정도”라고 설명했다.

영화에 나오는 신기전 발사장면은 모두 실사지만,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촬영 이후 컴퓨터그래픽(CG) 보정작업을 거쳤다. 영화를 찍기 위해 제작한 화차는 총 5대. 이 장비들은 영화 개봉 뒤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큰그림 보러가기


물론 제작사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과학적 복원과는 차이가 있다. 화차의 모습은 과거 그대로지만 신기전의 발사대인 신기전기는 화면에서 웅장해 보이도록 실제보다 조금 더 크게 제작됐다. 또 영화에 등장하는 대신기전 발사대 2대는 영화제작팀이 직접 고안한 것이다. 발사대의 모습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여주인공 홍리(한은정 분)가 신기전 개발과정에서 사용했던, 10발을 연속 발사할 수 있는 시험용 발사대도 모두 영화사 자체 기획에 따라 만든 창작품이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전통 화약 대신 현대 화약을 사용했다. 이런 관점에서 철저한 과학적 재현보다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시각적 복원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총감독을 맡은 김유진 감독은 8월 7일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스토리는 가상이지만, 시대적 배경과 무기(신기전)만큼은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고 자랑하면서도 “복원 자체만 볼 때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설명했다.

15년 전 다연발로켓화포 재현
과학에 관심 많은 독자라면 신기전과 화차가 대전 엑스포가 한창인 1993년 복원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채연석 연구위원이 당시 다연발로켓화포인 중·소신기전을 실제로 복원한 뒤 100발을 연속으로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재현된 신기전과 화차는 각각 한국항공우주연구원, 국립중앙과학관 등에 전시돼 있다.

중·소신기전은 화살에 추진체를 연결한 ‘로켓화살’이다. 당시 일반 화살의 사정거리는 100m. 소신기전은 200m 이상을 날아가고 중신기전은 이보다 더 긴 250m까지도 날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중신기전은 폭발기능까지 갖추고 있었다. 약통에서 연소되던 불꽃이 발화통(탄두)으로 옮겨 붙어, 추진력이 사라질 무렵 자동으로 폭발하도록 제조됐다. 현대의 지연신관 개념까지 도입된 첨단무기였던 셈이다. 발화통 내부에 철가루가 포함돼 있어 제한적이지만 적군에 부상을 입히는 효과도 있었다.

중·소신기전의 또 다른 장점은 화차와 결합시킬 경우 당시 찾아보기 힘든 연속발사가 가능하다는 점. 특별 제작된 수레인 화차 위에 신기전기라는 발사대를 얹으면 도화선의 길이를 조정해 중·소신기전 100발을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다. 발사된 100발의 신기전은 모두 반경 70m 안에 떨어진다. 신기전에 ‘세계 최초의 다연발로켓화포’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다.

화차 자체만으로도 과학적 의미는 크다. 300개 이상의 부속품으로 이뤄진 정밀기기로, 현대에도 전통방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흥미롭게도 화차는 손잡이를 바닥에 놓으면 각도가 43~45°가 된다. 이는 이론적으로 최장거리 발사각도에 가깝다.

대신기전, 국방과학연구소 이어 항우연 복원 중
대신기전은 강 건너까지 날아가는 최초의 장거리 미사일이다. 몸체(안정막대)는 대나무로 만들어지며 길이는 5.6m 정도로 긴 편이다. 뒷부분에는 가죽으로 만든 깃(안정날개)을 달았다. 약통은 전통 한지를 탄탄하게 감아 만든다.

역사학자들은 대신기전이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 이민족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거리 공격무기가 전무한 시대인 만큼 현대의 탄도미사일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다. 윤용현 연구관은 “대신기전의 사정거리는 2km에 이르러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였다”고 설명했다.

대신기전의 또 다른 종류인 ‘산화신기전’의 경우는 길이가 5.3m로 약간 짧지만 사정거리와 폭발력 자체는 대동소이하다. 다만 탄두에 철편을 내장하고 있어 살상효과를 높인 것이 특징이다.

대신기전은 중·소신기전이 복원된 지 15년이 지난 최근에야 완벽한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주도적으로 연구해왔다.

한 발 앞서 대신기전을 복원한 측은 ADD다. ADD 측은 지난 4월, 1년간의 연구개발을 거쳐 대신기전 복원을 마쳤다. 가장 까다로운 부분인 전통 흑색화약도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다만 화약 내부에서 산소를 공급하는 물질인 염초만큼은 그 주성분인 질산칼륨(KNO3)으로 대처했다. 몇 개월에 걸쳐 흙, 동물의 소변, 나뭇재 등을 섞어 정제해야 하는 전통방식을 사용하는 방법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로켓에 쓰이는 화약은 일정한 양이 천천히 타 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폭탄과 다른 제어기술이 요구된다. 산화제인 염초의 비율과 구성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이 때문에 연구기관에서도 화약 재현에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채연석 연구위원팀에서도 현재 대신기전을 복원하는 연구가 한창이다. 채 연구위원은 화약 제조를 비롯한 중요과정을 모두 전통방식에 따를 계획이다. 그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신기전 복원을 미뤄뒀던 이유는 뭘까. 그는 “1990년대 당시에는 대신기전을 복원하고 싶어도 전통 한지 같은 재료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면서 “대신기전을 비롯한 각종 고대무기를 복원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제작과정까지 철저히 고증하지 않으면 복원의 의미가 없다”는 그에게 겨레과학을 살리려는 장인정신이 묻어난다.

신기전에 필적한 무기, 최초의 샷건 ‘사전총통’
신기전과 동시대에 등장했던 조선 초기 무기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사전총통’이다. 화약의 힘으로 여러 발의 화살을 한꺼번에 날릴 수 있는 개인용 화포로 현대의 산탄총(샷건)과 유사하다. 길이 26.1cm, 구경 2.2cm 정도의 소형 화살(세전) 4개를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었다.

사전총통은 소신기전과 유사한 성능을 갖췄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신기전이 로켓의 원리로 날아가는 반면 사전총통은 화약이 폭발하는 힘으로 화살을 밀어낸다는 차이가 있다. 사정거리 역시 200m 정도로 소신기전과 큰 차이가 없다. 세종 14년 완성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사전총통은 신기전과 유사한 형태로 연속발사가 가능하다. 화차에 ‘신기전기’를 올리면 신기전 화차가 되고, ‘총통기’(銃筒機)를 올리면 사전총통 발사대로 변모하는 식이다. 총통기에 50개의 사전총통이 장착되는 만큼, 200발(50×4)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었다.

화차와 신기전기, 총통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문종 1년으로, 이미 세종 때 개발이 완료돼 보급이 시작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신기전과 사전총통은 임진왜란을 거쳐 조선후기까지 사용됐다. 현재 총통기 화차는 외형만 복원돼 대전국립중앙과학관에 전시돼 있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8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전승민 기자

🎓️ 진로 추천

  • 역사·고고학
  • 군사·국방·안보학
  • 항공·우주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