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주상복합아파트단지로 이사 온 H씨는 한 달 공용수도세로 겨우 150원만 냈다. 공용수도세는 아파트단지 안의 실개천, 정원, 분수, 공용화장실 같은 시설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아파트 단지에는 운동장만 한 정원이 있다. 이 정원은 수풀이 우거져 한가운데 서면 숲에 들어와 있다고 착각할 정도다. H씨는 이곳에서 매일 아침 조깅을 한다. 2~3일마다 스프링클러가 물을 뿌려서인지 수풀이 싱그럽다. 또한 정원 곳곳에 있는 8개의 분수에서는 물을 하늘 높이 뿜어 한여름의 열기를 식힌다. 이 시설을 실개천이 휘두르고 있다.
H씨가 단돈 150원으로 ‘도심 속 정원’에서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얼까. 그 해답은 하늘에서 내려준 빗물을 잘 관리한 데 있다.
여름 비 집중률 세계 최고
이제까지 빗물은 하늘에서 내리면 땅이나 하수도로 흘러드는 무용지물이었다. 여름철 집중호우는 살림살이와 농작물을 집어삼키는 ‘괴물’이라는 굴욕까지 당했다.
우리나라는 연강수량이 1300mm로 비가 많이 내리는 편이다. 하지만 비는 여름에 집중된다. 비가 많이 올 때와 적게 올 때의 차이도 크다. 이를 ‘강수 분산값’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강수 분산값은 1만 2000mm2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유럽은 강수 분산값이 100~500mm2로 연중 강수량이 일정하고, 일본은 강수 분산값이 약 2000~3000mm2로 우리나라보다 강수 집중도가 낮다. 강수 분산값이 크면 한 해에 가뭄과 홍수를 함께 겪는다. 겨울엔 가뭄으로 건조한 숲에 산불이 나기 쉽고, 여름에는 집중호우로 홍수가 난다. 빗물 양극화 때문에 ‘두 번 죽는’ 셈이다.
홍수와 가뭄 해결책으로 빗물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나라 빗물 이용률은 26%에 불과했다. 도시에 내린 비가 하수관으로 일시에 배출되기 때문이다.
빗물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여름에 집중되는 빗물을 효과적으로 저장해야 한다. 우리나라 국토는 70%가 산악지형이라서 땅에 내린 빗물이 흡수되지 않고 곧바로 강이나 바다로 흘러든다. 이를 저장하면 빗물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을 수 있을텐데 말이다.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주상복합아파트단지인 스타시티는 4개의 건물(A, B, C, D동) 옥상과 정원에서 빗물을 모은다. 옥상과 정원의 넓이는 총 5만m2로 축구장을 7개나 이어놓은 것과 같다. 곳곳에 있는 ‘수챗구멍’에서 모아진 빗물은 B동 지하 4층의 빗물 저장탱크로 이동한다. 저장탱크는 3개로 총 3000t의 빗물을 저장할 수 있다.
저장탱크마다 빗물의 용도가 다르다. 지붕에서 이동한 빗물은 1번 저장조로 유입돼 정원이나 실개천, 공용화장실 용수로 쓰인다. 정원에 떨어진 빗물은 2번 저장조로 유입된 뒤 1번 저장조로 간다. 3번 저장조는 비상용수로 10t짜리 소방차 100대분의 물을 저장하고 있다. 마치 ‘비상금’을 가진 것처럼 주민들은 화재가 나도 곧바로 빗물을 이용해 화재를 진압할 수 있는 것. 스타시티의 빗물 이용률은 67%로 높다. 스타시티는 2007년 6~11월까지 약 6개월 동안 2만t 이상의 빗물을 사용했다. 이를 비용으로 환산하면 4000만 원을 아낀 셈이다.
건물의 옥상과 정원에서 빗물이 수집돼 지하에 있는 3개의 빗물저장탱크에 저장된다(1). 탱크의 저장용량은 총 3000t. 이 빗물을 정원수(2), 분수(3), 공용화장실 용수(4), 수영장 용수(5)로 쓰면 수도요금과 수자원을 절약할 수 있다.
산성비, 먼지비 걱정 없다?
빗물을 실생활에 이용하려면 산성비와 먼지비라는 두 가지 산을 넘어야 한다. 빗물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녹아 pH 5.6인 산성이다. 대기가 오염되면 아황산이온(SO32-)나 질산이온(NO3-))같은 음이온이 늘어난다. 이들이 빗물에 녹아들면 pH가 더 낮아진다(산성화). 반대로 황사현상으로 대기에 미세먼지가 많아지면 칼슘이온(Ca2+)나 마그네슘이온(Mg2+) 같은 양이온이 늘어나 pH가 높아진다(알칼리화).
산성비와 먼지비는 빗물이용시설에 얼마나 영향을 줄까. 2003년 11월 서울대 대학원 기숙사가 국내 최초로 빗물이용시설을 도입했다. 기숙사 지붕(면적 2098m2)에서 모인 빗물은 필터와 홈통(건물의 벽에 붙어 있는 수직 빗물 관으로 지붕에 모인 빗물을 한곳으로 모은다)을 거쳐 200m3 규모의 지하 빗물저장조로 이동한다. 현재 학생들의 화장실 용수와 건물의 정원용수로 사용하고 있지만, 산성비와 먼지로 인한 문제는 없다.
서울대 빗물연구센터 연구팀은 산성비와 먼지비가 발생시키는 문제를 점검하기 위해 1년 동안 서울대 기숙사 빗물이용시설에 저장된 빗물의 pH를 측정했다. 빗물은 저장조에 유입될 때 pH가 6.5~9.0로 산성부터 염기성까지 범위가 넓었다. 그러나 1~2일이 지난 뒤 동일한 빗물의 pH는 6.8~8로 변했다. 서울에 내리는 산성비의 pH가 4.3~5.5인 것과 비교하면 중성에 가까운 편이다. 산성비와 먼지비가 유입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성화가 돼 pH가 7.0에 가까워진 것.
나뭇잎 같은 불순물은 그물망 간격이 0.5mm인 철망에서 1차로 걸러진다. 무거운 먼지는 침전돼 2차로 걸러진다. 미세한 먼지는 필터가 3차로 거른다. 필터란 철망으로 만든 그물로 망의 간격이 0.1mm 이하다. 필터로 거르지 못한 미세먼지는 6개월 동안 빗물저장탱크에 있을 때 탱크 바닥으로 자연스럽게 가라앉는다.
저장조에 처음 유입되는 빗물의 탁도는 최대 200NTU(물의 탁한 정도를 나타내는 단위)에 이른다. 시간이 지나면 특별한 화학 처리를 하지 않아도 수치가 2NTU 이하로 낮아진다. 보통물의 탁도가 10NTU 이하면 맑게 보인다. 이는 중수도(한 번 사용한 수돗물을 생활용수나 공업용수로 재활용하는 시설) 탁도 수질기준을 만족할만한 수준이다.
빗물저장시설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무엇일까. 첫째, 홍수를 예방할 수 있다. 스타시티가 들어선 광진구 일대는 매년 홍수가 났다. 아차산은 바위로 이뤄져 물을 잘 흡수하지 못한다. 비만 오면 물이 흘러들어 침수가 일어났다.
그런데 스타시티 지하에 있는 빗물저장탱크 3개는 빗물을 저장해 홍수 유예 효과를 낸다. 특히 최근 이상강우가 늘어나 언제 얼마나 많은 양의 비가 내릴지 예측하기 힘들다. 이때 빗물저장시설이 위력을 발휘한다. 하수도나 하천을 일부러 만들지 않아도 갑작스런 대형 강우의 충격을 줄여준다.
둘째, 에너지 절약이 가능하다. 빗물이 떨어진 곳에서 바로 빗물을 모아 이용하므로 물을 운반하거나 처리할 때 드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또한 물은 비열이 크므로 열량을 많이 가둬둘 수 있다. 건물에 빗물저장시설이 있으면 건물 내부 온도가 여름에 약 3℃ 정도 내려가는 이유다.
아프리카의 보츠와나는 화폐단위로 ‘비’를 뜻하는 ‘풀라’(pula)를 쓴다. 풀라보다 단위가 작은 화폐인 ‘테베’(thebe)는 빗방울이란 뜻이다. 보츠와나 국민에게 ‘재테크’는 곧 ‘빗물테크’인 셈이다. 이제까지 빗물은 당연히 하수도로 빨리 흘러들어야 하는 것으로만 인식됐다. 그러나 빗물은 미래 물부족 사태에 대비한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뿐만 아니라 홍수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도 예방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빗물은 ‘하늘이 내려준 돈줄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