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이 증서에는 피는 한 방울도 원고에게 준다고 하지 않았소. 분명히 ‘살 1파운드’라고만 적혀 있소. 그러므로 증서의 내용대로 살 1파운드를 가질 것. 그러나 살을 베어낼 때 피고가 한 방울이라도 피를 흘릴 경우에는 원고의 토지나 재산은 베니스 국법에 의거해 전부 국고로 몰수하겠소.”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클라이맥스다.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빚을 갚지 못해 죽을 위기에 처했던 안토니오는 재판관으로 변장한 포샤의 기지 넘치는 판결 덕분에 살아난다. 포샤가 판결문에서 언급한 ‘한 방울의 피’는 문학사상 가장 값진 피가 아니었을까.
사실 어느 피 한 방울인들 귀하지 않을까. 한 방울(60μℓ(마이크로리터, 1μℓ=${10}^{-6}$ℓ))의 피에 들어있는 적혈구의 수는 3억 개. 몸 전체에 무려 25조 개나 퍼져 있는 그 작고 붉은 ‘보석’이 바로 피의 주인이다. 최근 적혈구가 질병 진단의 신예로 떠오르고 있다. 심장에서 발뒤꿈치까지 우리 몸을 구석구석 잘 아는 적혈구만이 가지는 톡톡 튀는 개성 덕분이다.
피 한 방울에 3억 개
지름 7~8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 피 한 방울에 3억 개가 들어갈 정도니 원래 덩치가 작지만 지름이 4μm 밖에 안 되는 모세혈관까지 통과하는걸 보면 적혈구는 날씬하기까지 한가 보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본 적혈구의 모양은 가운데가 막힌 도넛처럼 둥글넓적하다. 도대체 저런 몸매로 좁고 긴 혈관을 어떻게 통과할까.
비밀은 적혈구가 지닌 ‘변형능’. 좁은 골목(모세혈관)을 통과할 때 세포 자체가 길쭉하게 변하는 성질이다. 적혈구는 핵이 없어서 유연하고 그 덕분에 좁은 모세혈관을 휘어진 채로 통과할 수 있다. 연세대 의대 송재우 교수는 “건강한 적혈구는 부피에 비해 표면적이 크기 때문에 바람이 빠져 유연해진 타이어처럼 모양이 자유롭게 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건강하지 못한 적혈구는 단단하게 굳어있기 때문에 모세혈관을 통과하지 못한다. 피가 모세혈관을 통과하지 못하면 피가 막히고 이것은 심혈관계 질환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또 모세혈관이 많은 신장 같은 기관에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혈관을 통과하지 못하는 적혈구의 비율을 조사하면 이들 질환을 사전에 알아차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고려대 기계공학과 신세현 교수와 경북대 의대 서장수 교수팀은 지난 12월 적혈구의 이런 특징을 응용해 피 한 방울로 심혈관계 질환을 진단할 수 있는 바이오칩을 만들었다. 모세혈관을 모방한 시스템에 혈액을 넣어 적혈구가 얼마나 통과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방식이다. 현재 연구팀은 당뇨병과 그로 인한 신부전증이 적혈구가 유연성을 잃게 되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임상시험으로 확인한 상태다.
적혈구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노화다. 송재우 교수는 “적혈구가 오래되면 세포막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 전체적으로 표면적이 줄어든다”며 “상대적으로 적혈구가 팽팽해지면 ‘바람 빠진 타이어’였을 때보다는 변형될 여지가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원인은 ‘당화’ 현상이다. 당화는 적혈구 세포막에 긴 사슬 구조의 당 물질이 붙어 엉기는 현상으로 당뇨병과 같이 혈당이 높아지는 병에서 관찰된다. 당화가 일어나면 적혈구 표면이 코팅되며 갑옷을 입힌 것처럼 단단해진다. 적혈구 특유의 유연성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적혈구 세포막에 있는 단백질이나 세포막 전체가 산소와 결합하면 산화된 세포막이 탄력을 잃으면서 유연함도 같이 떨어진다.
엽전처럼 모여 있는 적혈구는 ‘문제아’
적혈구는 자유자재로 형태를 변형하는 능력 이외에 또다른 재주가 있다. 자석처럼 한 방향으로 달라붙어 ‘기차놀이’를 할 줄 아는 ‘연전현상’(rouleaux)이다. 모양이 엽전을 꿴 것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특한 재주 같지만 인체에는 해가 많다. 건강한 적혈구는 표면에 음전하를 띠고 있기 때문에 서로 밀어내는 성질이 있어 서로 모이지 않는다. 따라서 적혈구가 모였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몸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연전현상은 *다발성 골수종 환자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특성 중 하나다. 더구나 적혈구가 모여서 긴 덩어리를 이루면 모세혈관을 통과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혈액의 점도도 높아져 심혈관계 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적혈구가 연전현상을 보이는 원인은 무엇일까. 현재 가장 유력한 학설은 혈구 주변 수십 nm(나노미터, 1nm=10-9m) 내에서 혈장의 농도가 급격히 낮아지는 층이 생긴다는 농도 저하 이론이다. 이렇게 농도 차가 생기면 삼투압이 발생해 농도가 낮은 적혈구 표면에서 농도가 높은 주위 혈장으로 물이 빠져나간다는 설명이다. 신세현 교수는 “고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액체가 빠져나가면 고체 주위에는 순간적으로 물질이 희박한 층이 생기는데 이 상태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주변의 다른 고체 표면과 결합해 안정한 상태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며 “혈액 내의 적혈구도 불안정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주변의 다른 적혈구와 결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뇨병 때문에 혈액 내 당 농도가 높아지거나 글로불린과 같은 혈장단백질이 많아질수록 혈장과 적혈구 표면 사이의 농도 차가 커진다. 그러면 삼투압도 커지기 때문에 연전현상이 일어날 가능성도 높아진다.
엽전처럼 한 방향으로 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적혈구는 납작한 원반 형태이기 때문에 표면적이 넓은 위아래 부분이 가장 붙기 쉽다. 즉 적혈구 표면의 삼투압이 유발한 불안정한 상태를 극복하려면 아무래도 넓은 면적을 서로 맞대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다.
그 동안 혈액검사는 신체검사의 필수 항목이었지만 의외로 적혈구의 변형능이나 응집성과 같은 물리적 특성은 진단에 이용되지 못했다. 신체검사나 입원 할 때 받는 혈액검사에서는 혈구의 조성과 비율을 검사한다. 대표적인 검사법은 ‘헤마토크릿’. 피를 시험관에 넣고 가라앉히면 혈구만 가라앉고 혈장은 뜨는데, 가라앉은 혈구의 비를 계산하면 혈구의 수와 농도, 헤모글로빈의 양을 추정할 수 있다. 이들 수치는 염증이나 탈수증, 출혈, 빈혈의 척도가 된다.
혈구를 빼고 난 부분인 혈장은 혈액 생화학 검사에 이용된다. 최근 피 한 방울로 심장병을 진단할 수 있는 키트를 개발한 벤처기업 나노앤텍의 박성하 개발팀장은 “혈장 내에는 심장병 표지자, 암 표지자, 호르몬,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마약 물질까지 떠돌아다닌다”며 “이들 물질의 농도가 정상 범위를 벗어나는지 여부를 측정하면 몸 어디에 이상이 있는지를 알 수 있어 진단 키트에 많이 응용된다”고 설명했다.
혈장에서 혈소판을 제거한 혈청은 면역 검사에 쓰인다. 간염이나 매독, 에이즈같은 바이러스성 질병에 감염된 경우 혈액 내에는 해당하는 병원체를 없애기 위해 항체가 만들어진다. 혈청면역검사는 이들을 검출해 바이러스가 있는지 사실을 알아낸다.
서장수 교수는 “지금까지 혈액 검사는 주로 혈액의 생화학적 특성에만 치중했다”며 “적혈구의 점도나 변형능, 응집성도 질환을 나타내는 지표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으므로 검진에 이용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연세대 의대 박성하 교수는 “질병은 종합적으로 판정해야 하기 때문에 혈구 변형능이나 응집도 검사만으로 검진할 수는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임상 결과가 축적된다면 적혈구를 활용한 질병 진단이 기존 혈액 검사의 부족한 점을 메워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다발성 골수종*
면역 단백질인 글로불린을 만드는 세포가 암세포로 바뀌는 혈액암의 일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