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8개월 앞둔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는 실전과 다름없는 맹훈련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땅을 딛고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의 종아리와 넓적다리 근육은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인다. 생물체의 근육은 기본적으로 액틴과 미오신이라는 단백질로 구성된다. 가는 섬유다발로 이뤄진 액틴 위로 미오신이 미끄러지듯 결합하면서 근육이 수축하는데, 모든 과정은 나노미터(nm, 1nm=${10}^{-9}$m) 규모로 미세하게 일어난다.
디지털나노구동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KAIST 바이오시스템학과 조영호 단장은 근육의 움직임을 모방해 초소형 구동기관을 만들고 있다. 생체현상을 모티브로 한다는 점에서 디지털나노구동연구는 생체모방공학과 비슷하지만 관심을 갖는 생체현상의 규모가 마이크로미터(μm, 1μm=${10}^{-6}$m) 이하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개미와 코끼리는 다르다
조 단장은 1990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유학 시절 마이크로미터 규모의 구동기관을 발명해 마이크로전기기계시스템(MEMS)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MEMS는 반도체공정을 기반으로 초소형 정밀기계를 만드는 기술로 손톱 크기의 하드디스크나 머리카락 절반 두께의 기어, 초고밀도 집적회로를 제작하는 데 이용된다.
당시 MEMS 기술은 커다란 구동기관의 크기를 마이크로미터 수준으로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덕분에 과거에는 무전기만 한 휴대전화를 사용했다면 요즘은 청바지 뒷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휴대전화가 등장했다.
기계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자원과 에너지는 절약된다. 하지만 단순히 축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부품의 크기를 초소형으로 줄이면 불필요한 열과 잡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칩의 경우 집적도가 증가하면 온도가 올라가며 회로가 불타버리는 문제점이 있었다. 조 단장은 “코끼리와 개미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생체현상이 서로 다르듯 코끼리의 크기만 줄인다고 개미가 되지 않는다”며 “생물체의 몸에서 일어나는 초미세현상을 이해하는 일이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근육은 수많은 근세포 다발이다. 근세포를 이루는 근섬유의 지름은 수십~수백μm 규모로 다양하고 허벅다리의 근섬유는 좀 더 굵다. 하지만 모두 나노미터 크기의 액틴과 미오신으로 구성된다는 점은 같다. 조 단장은 거대한 근육의 수축과 이완도 단백질의 미세한 움직임에서 시작되듯 세포와 단백질의 구조와 동작원리를 적용하면 초소형 구동기관의 한계인 열과 잡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조 단장의 예상은 적중했다. 2002년 실리콘으로 만든 근육칩은 그 시작이었다. 근육을 이루는 액틴과 미오신이 생체의 전기신호에 따라 맞물렸다가 다시 풀어지는 과정을 모방해 만든 나노구동기는 정전기의 신호에 따라 움직인다. 가로, 세로 길이가 1.2mm로 쌀알보다 작지만 이 안에서 모든 움직임은 나노미터 수준으로 정교하게 일어난다. 조 교수는 “나노구동기를 이용하면 열이나 잡음 발생 없이 반도체의 집적도를 원자 수준으로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2005년에는 극미세 잉크분사기를 개발해 그 해 초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미국 전기전자학회 산하 MEMS학회에서 발표했다. 누구나 고해상도로 출력할 때 잉크젯 프린터의 속도가 느려 짜증난 경험이 있다. 고해상도로 출력하려면 잉크가 분사돼 나오는 노즐의 구멍이 작아져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지만 조 교수는 수십조 분의 1~1L까지 다양한 크기의 잉크 방울을 분사할 수 있는 프린터 노즐을 개발했다. 배경 부분에서는 큰 잉크 방울을, 섬세한 부분에서는 작은 잉크 방울을 선택적으로 분사하기 때문에 출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조 교수는 “노즐 구멍 뒤쪽으로 흐르는 전류의 양을 미세하게 변화시켜 분사하는 잉크 방울의 크기를 조절했다”며 “인체의 근육이 움직일 때 몇 개의 근섬유를 사용하는지 분석해 그 과정을 모방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현재 이 기술은 기업과의 공동연구로 실용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늙은 적혈구 가려내는 시스템 모방하면?
얼마 전 연구단은 당뇨병을 진단할 수 있는 세포검사기를 개발했다. 당뇨병 환자는 적혈구가 노화하며 모세혈관의 혈액순환에 장애가 생기고 합병증을 겪는다. 그래서 학계는 당뇨병 환자의 혈당수치뿐만 아니라 적혈구의 ‘건강’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처럼 시간이 갈수록 늙는 적혈구는 수명이 보통 120일이다. 조 교수는 인체의 비장에서 벌어지는 선택적 적혈구 파괴시스템에 주목했다. 비장에는 0.5~2μm 크기의 미세한 구멍이 있는데, 여기서 늙은 적혈구를 파괴해 혈액 속 적혈구 수의 균형을 맞춘다.
“비장이 적혈구의 유연성을 판단하는 과정을 모방해 가로 2μm, 세로 2.2μm의 필터를 만들었습니다. 이 미세한 필터를 여러 개 연결한 뒤 그 사이를 통과하는 적혈구가 각 단계마다 얼마나 파괴되는지 측정해 건강한 사람의 적혈구와 비교하면 질병에 걸렸는지 진단할 수 있죠.”
그동안 혈액을 채취해 여러 화학물질과 반응시킨 뒤 나온 결과로 질병유무를 알아냈다면 이제는 인체의 질병감지시스템이 하는 방식과 똑같이 건강한 세포와 병든 세포를 가려낼 수 있는 셈이다. 이 기술은 당뇨병뿐만 아니라 다른 질병을 진단하는 데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
다른 연구자가 미처 보지 못한 분야를 먼저 개척하길 즐긴다는 조 교수는 누구보다도 ‘발상의 전환’에 강하다. 그는 “안경에 정밀한 거울을 설치해 눈의 망막 속으로 직접 빛을 쏘는 방식의 나노구동기가 있다면 대형스크린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시신경마다 빛의 자극을 줘 망막에 맺히는 물체의 상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입체안경’이 획일적으로 눈앞의 풍경을 왜곡했다면 이 디스플레이 기술은 원하는 방식으로 눈에 비치는 풍경을 ‘재창조’할 수 있다. 나노미터 규모로 생체현상을 들여다보는 조 교수 또한 사물의 숨겨진 이면을 간파할 수 있게 해주는 ‘요술안경’을 끼고 있는 게 아닐까.
Interview 조영호 단장
“연구단은 ‘아이디어’ 발전소”
디지털나노구동연구단이 이 순간 무엇을 연구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연구단의 홈페이지에도 별다른 자료나 정보가 없다. 바로 정보 유출 때문이다. 생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모방해 나노구동기를 만드는 연구단에서는 아이디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근육을 이루는 단백질인 액틴과 미오신을 모방한 근육칩의 경우도 이러한 발상 자체가 어렵지 기계나 제품으로 만드는 일은 순식간이다. 따라서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단 실험으로 재현해 본 뒤 특허등록 과정을 거친다. 그 다음에 국제학회에 보고하거나 논문으로 발표한다. 당연히 연구단 안에서도 ‘입단속’이 심하다.
지금까지 디지털나노구동연구단이 출원한 특허 수는 국내 23건, 해외 12건에 이른다. 국제적으로 산업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될 때는 미국이나 일본 특허로도 등록해둔다. 특허가 출원돼도 제품으로 만들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이 같은 대비는 필수다.
반도체 생산라인의 클린룸을 방불케 하는 실험실도 철저한 보안 아래 운영된다. 출입할 때 지문인식장치를 거쳐야 하는 것은 물론 약간의 먼지도 허락하지 않도록 에어샤워를 하고 실험복을 갖춰 입어야 한다. 보통 반도체 클린룸의 먼지 기준은 지름 0.5μm 이상인 먼지가 30㎤의 부피당 1000개보다 적어야 하는데, 연구단의 실험실은 이 기준의 10분의 1 수준인 100개를 유지하고 있다.
국내에 MEMS 기술을 뿌리내린 조 교수는 기계공학자다. 하지만 생물학자보다 더 생물에 관심이 많다. 건강한 세포가 몸속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반응하는지, 여름철 제 세상을 누리던 모기와 파리도 겨울이 되면 모두 죽는데 사람은 어떻게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딜 수 있는지 그의 호기심은 끝이 없다.
생물학을 연구하는 동료에게 물어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는 질문은 직접 실험 장치를 만들어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디지털나노구동연구단에 있는 대부분의 실험장비는 직접 설계하거나 반도체장비를 변형해 만들었다.
왜 하필 디지털이란 말이 연구단 이름 앞에 붙었을까.
“나노미터 규모로 생체현상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디지털시스템으로 움직입니다. 근육이 수축할 때도 운동하는 단백질과 운동하지 않는 단백질이 있습니다. 0과 1로 이뤄진 이진법체계를 따른다는 얘기죠. 디지털방식은 아날로그방식에 비교해 잡음이 없고 정확합니다.”
성냥에 불이 붙는 화학반응이 절반만 진행될 수는 없듯 생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 역시 ‘모 아니면 도’식의 간결하고 정확한 디지털시스템을 따른다.
차가운 반도체에서 태동한 MEMS 기술은 이제 나노미터 규모까지 정교해졌고 생체현상을 모방하면서 훨씬 인간적이고 따뜻해졌다. 자연에 존재하는 가장 완벽한 창조물인 인간의 몸속에 물리법칙을 뛰어넘는 답이 있는 셈이다. 앞으로 나노구동기술을 실용화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조 교수의 포부처럼 생체현상의 도움을 받은 기계가 어디까지 진화할지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