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소 씨는 성형외과에서 보톡스 주사를 맞았다. 원래 고운 피부를 가졌지만 눈가에 주름살이 하나라도 있으면 못 참는 성격이다. 피부가 탱탱해진 그는 그날 저녁 우아한 모습으로 할인마트에서 겨우내 먹을 김치를 샀다. 손에 김치 냄새가 밸세라 재빨리 냉장고에 김치를 넣었다. 며칠 뒤면 톡 쏘면서 시원한 맛의 김치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때마침 요구르트 한 병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 속이 안 좋았던 그는 요구르트를 한모금 마셨다.
한때 광고에서 유행한 ‘이영애의 하루’를 패러디했다. 광고에서 이영애가 우아함으로 하루를 살았다면, 무산소 씨는 무엇과 함께 하루를 보냈을까. 답은 ‘혐기성’(嫌氣性) 미생물이다. 보톡스에는 ‘클로스트리디움 보툴리눔’(clostridium botulinum)이란 혐기성 미생물이 만든 독소가 들어 있다.
김치가 알맞게 익는 것도 혐기성 미생물인 ‘류코노스톡 시트리움’(Leu conostoc citreum) 덕분이다. 그리고 요구르트에는 혐기성 미생물인 유산균이 있어 장이 활발히 운동하도록 돕는다. 흔히 ‘혐’(嫌)이라는 말이 붙으면 ‘혐오스럽다’는 단어가 연상된다. 혐기성 미생물은 해로운 생물이 아니다. 산소가 없다는 뜻의 ‘anaerobic’을 일본식 한자로 번역하면서 생긴 오류다.
‘혐기성’ 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들이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혐기성 미생물은 산소가 있는 환경과 아예 없는 환경에 모두 살 수 있는 통성혐기성 미생물과 산소가 있으면 살 수 없는 절대혐기성 미생물로 나눠진다.
혐기성 미생물에게 산소는 어떤 의미일까. 흡수된 영양분이 세포 안에서 산화되면 전자가 나오는데, 이 전자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에너지인 ATP가 생긴다. 산소를 이용하는 호흡 과정에서 대표적인 독성물질인 과산화물(${O}_{2}^{1}$)과 과산화수소(H₂O₂)가 생긴다. 이들은 DNA나 단백질 같은 중요한 세포 속 물질을 산화시켜 손상시킨다. 곧 세포는 부상을 당한다. 생명의 필수조건으로 알려진 산소는 혐기성 미생물에게 치명적인 독인 셈이다.
산소가 내놓는 독성을 해독할 기관이 없는 혐기성 미생물과 달리 호기성 미생물은 활성산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메커니즘이 발달했다. 사람도 몸속에 독성 산소화합물을 해독하는 메커니즘이 있어 죽지 않는다. 단지 주름살이 늘거나 피부가 노화하는 수준에서 멈춘다. 카탈라아제가 과산화수소를 물과 산소로 분해하고, 수퍼옥사이드분해효소(SOD, superoxide dismutase)가 과산화물 두 분자를 과산화수소와 산소로 바꾸기 때문이다.
환경과 사람 살리는 혐기성 미생물 다시보기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을 혐기성 미생물이 지배하고 있다. 인간의 관심에는 멀어져 있지만 무(無)산소 환경에서 사는 혐기성 미생물은 인간에게 유익을 주고 있다.
▷ 수소 만드는 에너지 발전소
문명의 원동력이었던 석유를 포함한 탄소화합물이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부터다. 최근 온실가스를 발생시키지 않는 수소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혐기성 미생물은 인간이 배출하는 쓰레기를 분해해 청정에너지로 만드는 데 유용하다. 더러운 쓰레기도 혐기성 미생물의 힘을 빌리면 깨끗하게 바뀐다는 뜻이다.
수소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깨끗한 에너지다. 에너지효율이 기존 연료보다 약 2.75배 높다. 유럽연합은 ‘CUTE’(Clean Urban Transport for Europe) 프로젝트를 추진했는데, 2년 동안 수소연료전지 버스를 27대 운행해 온실가스를 약 50톤 줄였다.
전세계의 수소에너지 수요가 느는 상황에서 수소를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시스템 개발이 절실하다. 혐기성 미생물은 유기물을 분해해 수소를 만든다. 이를 ‘수소발효’라 한다. 혐기성 미생물의 수소발효 방법을 이용해 수소를 얻으면 수소를 생산하는데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줄일 수 있다.
▷ 고형암세포 죽이는 ‘미생물 의사’
2005년 암으로 사망한 한국인은 총 6만5479명으로 그 해 전체 사망자의 26.7%에 이른다. 암에 걸리면 치료도 힘들 뿐 아니라 환자의 고충도 만만치 않다. 암은 주로 항암제로 치료한다. 그런데 최근 혐기성 미생물을 이용해 암을 치료하는 방법이 개발됐다. 암세포 중 ‘고형암’(solid tumor)는 수많은 세포가 단단하게 뭉친 덩어리다. 이 때문에 고형암이 있는 곳은 암세포가 호흡하느라 산소를 모두 소비해 무산소 환경이 된다. 그런데 기존의 항암제는 산소가 있는 조건에서만 약효가 발휘돼 고형암 치료는 암치료의 난제였다.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대 얀 데이스 교수팀은 혐기성 미생물의 일종인 클로스트리디아(Clostridia)에 종양치료 유전자를 삽입해 쥐의 고형암을 치료했다. 그 결과 혐기성 미생물은 호기성 미생물이 치료하지 못했던 암세포까지 치료했다. 데이스 교수팀은 이를 2007년 6월 6일 영국 에딘버러대에서 열린 제161회 영국미생물학회에서 ‘혐기성 미생물과 암 질환 치료’란 논문으로 발표했다.
클로스트리디아는 무산소 환경에서만 증식하는 혐기성 미생물이다. 데이스 교수는 “암환자 가운데 방사선요법이나 화학요법의 효과를 보지 못하는 환자가 절반 이상”이라며 “고형암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 내성 없는 생균제 사료
최근 동물의 사료에 항생제가 포함돼 문제다. 동물이 항생제가 들어 있는 사료를 먹으면 해당 항생제에 내성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목장주는 항생제를 먹이지 않으면 가축이 병에 걸려 죽거나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혐기성 미생물이 포함된 생균제가 항생제 내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혐기성 미생물은 항생제의 효과를 대신한다. 항생제는 체내의 미생물을 죽이는 약제다. 그런데 체내의 미생물은 영양분과 서식지를 공유하면서 서로 경쟁한다. 항생제로 미생물을 죽이면 해당 미생물뿐만 아니라 장내의 이로운 미생물도 같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동물의 건강에 해롭다. 장 속의 이로운 미생물이 활발히 경쟁할수록 병원균의 침입에 강해지기 때문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장영효 박사는 “생균제 사료는 장 속 미생물의 균형을 맞춰 장 건강을 지킨다”며 “생균제 사료는 화학약품이 안 들어있어 내성도 안 생긴다”고 말했다.
혐기성 미생물은 산소를 사용하지 않고 질소산화물로 에너지를 만든다. 질소산화물은 산소에 비하면 에너지대사 효율이 극히 낮지만, 아직 혐기성 미생물이 산소를 피해 비효율적인 에너지대사를 하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진화론자들의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인간이 살 수 없는 무산소 환경에서 혐기성 미생물이 ‘키다리 아저씨’처럼 우리를 돕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