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껏 심호흡을 했다. 콧속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간 열대의 공기가 폐 안을 따뜻하게 감쌌다. 바람을 타고 흐르는 달콤한 코코넛 향과 코발트블루 빛의 청명한 바다는 빌딩의 그림자에 찌든 도시인을 매료시켰다. 하늘과 바다가 손잡은 짙푸름의 향연은 결국 ‘이방인’의 혼을 쏙 빼놓고야 말았다.
괌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 거리인 남태평양의 섬나라 미크로네시아 연방. 기자는 지난 9월 12일 한국해양연구원 열대해양체험단의 일원으로 이곳에 있는 한·남태평양해양연구센터(이하 해양연구센터)를 방문했다.
해양연구센터는 2000년 한국해양연구원과 미크로네시아 추크 주 정부가 주변 바다를 조사할 목적으로 설립한 과학기지다. 이역만리 떨어진 이곳에서 우리 과학자들의 굵은 땀방울이 남태평양의 푸른 수면에 떨어지고 있었다.
생산성 최고의 바다
미크로네시아는 추크를 비롯해 폰페이, 얍, 코스레 4개 주로 구성된 섬나라다. 동서로 3200km, 남북으로 1200km에 걸쳐 607개의 섬이 흩어져 있다. 때문에 바다의 넓이가 광대하다. 육지 면적은 700㎢(여의도 면적의 80배) 정도이지만 배타적 경제수역은 이보다 4300배나 넓은 300만㎢에 이른다.
우리 과학자들이 미크로네시아 바다를 주목한 건 단순히 넓은 면적 때문만은 아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높은 생산성이다. 극지 바다에 사는 생물은 보통 10년 정도 걸려야 성체가 된다. 그러나 여기선 1년 반 정도면 충분하다. 차가운 바다에선 해양 생물의 기본적 먹잇감인 플랑크톤의 공급이 원활치 않지만 이 지역은 상대적으로 플랑크톤이 많다. 양분이 많은 흙에서 작물이 잘 자라는 것과 같다.
생물 다양성 면에서도 아마존 밀림을 능가한다는 게 과학자들의 견해다. 높은 수온과 낮은 수심은 미크로네시아 바다를 산호초 군락지로 만들었다. 산호초는 해양 생물의 최대 서식지다. 주변 해역에선 어류 4000종과 무척추동물과 조류 100만 종이 어울려 살아간다. 바다 생물의 집합소인 셈이다.
산호초 수호하는 ‘맹그로브’
미크로네시아가 해양 생물의 천국이 된 이유가 뭘까. 과학자들의 손가락은 이상스럽게 생긴 나무를 향한다. 남위와 북위 20° 이하의 따뜻한 지역 해안선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염생식물인 맹그로브다.
맹그로브를 본 체험단원들의 첫 마디는 “모습이 기괴하다”였다. 맹그로브 한 그루 당 수십 개씩 달려 있는 지지대, 즉 가근(假根, 헛뿌리)은 제멋대로 뻗은 문어발을 연상케 했다. 높이 3~4m의 맹그로브가 수백 그루씩 밀집해 있는 군락지 안은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을 정도로 울창했다.
해양연구센터의 책임자인 박흥식 박사는 “맹그로브 군락지는 우리나라의 갯벌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고 설명했다. 얽히고설킨 가근은 해양생물의 서식처이자 산란장이다. 수심이 얕고 물의 흐름도 느려 포식자들의 접근이 쉽지 않다. 수많은 가근과 군락지 바닥의 개흙에 사는 각종 미생물은 오염물질을 흡수하고 영양분을 생산한다.
맹그로브 군락지의 기능은 또 있다. 흙탕물 정화다. 빽빽하고 두껍게 엉긴 가근 무리가 해안가에서 유입된 상당량의 흙탕물을 먼 바다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가근에 걸린 흙탕물의 이동 속도가 떨어지면서 흙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교각이 여러 개 있으면 강물이 흐르는 데 지장이 생기는 것과 같다.
흙탕물 정화 기능은 열대 해양 생물의 주요 서식처인 산호초를 지키는 데 결정적이다. 산호는 식물 플랑크톤과 공생 관계를 이루며 산다. 그런데 바다에 흙탕물이 유입되면 식물 플랑크톤은 광합성을 못해 죽고 만다. 흙탕물이 산호를 죽이는 이유다. 박흥식 박사는 “필리핀 등이 관광지 개발에 나서려고 맹그로브를 베어냈다 산호초가 다 죽는 피해를 입었다”고 설명했다.
태풍이 태어나는 곳
맹그로브 군락을 둘러 본 체험단의 보트가 해양연구센터 선착장에 닿자마자 한바탕 거센 소나기가 몰아쳤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세찬 물줄기가 하늘이 뚫린 듯 대지를 향해 급전직하했다. 해양연구센터 앞마당에는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제법 큰 웅덩이들이 생겼다.
하루에 한 번은 이런 비가 내리는 미크로네시아 주변 바다는 사실 태풍이 태어나는 곳이다. 바다의 수증기를 먹고 자란 태풍이 동아시아로 올라오면서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따지고 보면 이 지역의 기후가 한반도의 날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한반도 연안의 수온변화도 이 지역 주변 환경과 연관됐다는 게 과학자들의 생각이다. 북태평양을 지난 해류가 북적도, 쿠로시오, 대만 해류로 연결되면서 우리나라에 영향을 준다는 것. 한국해양연구원은 해양연구센터를 거점으로 해양 환경 변화에 대응할 중장기 전략을 준비 중이다.
부가가치 높은 흑진주 양식
지금 우리 과학자들은 미크로네시아의 푸른 바다에서 보물을 건져 올리기 위한 작업에 한창이다. 먼저 고개를 내민 건 흑진주다.
해양연구센터 앞바다 200m 지점에 위치한 흑진주 양식장에선 2~3년생 흑접조개가 5~8m 깊이의 바다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연구진은 오는 12월 수확을 기대하고 있다.
흑진주가 해양연구센터의 첫 성과물로 떠오른 이유가 뭘까. 연구를 주도한 박흥식 박사는 “짧은 기간에 가장 확실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연구주제였다”고 설명했다. 신물질 추출을 통한 신약 연구는 장기간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성공여부 또한 불투명하다. 실생활에서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연구를 터부시할 이유가 없었다는 게 박 박사의 설명이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미크로네시아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됐다. 흑진주는 지름 1cm짜리가 보통 40~50만 원이나 한다. 현재 미크로네시아의 생활 수준은 일용직 노동자가 한 달에 3~4만 원을 버는 형편이다. 현지 정부는 흑진주 양식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연구 결과 타히티에선 18~24개월은 키워야 상품이 되지만 미크로네시아에선 12개월이면 충분한 것으로 나타났다. 흑접조개가 잘 자라는 24~29℃의 수온이 꾸준히 유지되는 데다 플랑크톤 등 각종 영양분이 바다를 기름지게 하기 때문이다.
첫 목표는 경제성장 속도가 빠른 인도 시장이다. 인도인들은 검은 보석을 매우 선호한다. 질 좋은 흑진주를 생산하기만 한다면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연구진은 예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