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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를 얻은 벅스버니, 도널드 덕, 톰과 제리

만화 캐릭터 뼈대에 과학과 상상력 입힌 예술 작품

뼈를 얻은 벅스버니, 도널드 덕, 톰과 제리



톰과 제리.

어린 시절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볼 정도로 재미있던 만화다. 제리를 못 잡아 안달인 톰은 결정적인 순간에 조그만 쥐구멍으로 숨는 제리의 꾀에 속아 넘어가 항상 벽에 머리를 ‘꽝’ 부딪친다. 그러면서도 몇 초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제리를 쫓는다.

톰과 제리뿐 아니라 벅스버니, 코요테와 로드러너, 도널드 덕 같은 만화 주인공들은 모두 왈가닥 사고뭉치다.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웃음을 주는 만화를 보며 화면 속 동물에 대한 환상을 키웠다.

그런데 이들을 모아 만화 주인공 ‘자연사 박물관’을 차린 사람이 있다. 그는 일명 ‘사이비 고고학자’ 이형구(38). 그는 만화 주인공의 뼈대를 만들어 그들에게 학명까지 붙였다. 학명은 속명, 종소명(종명), 아종명 순으로 이름을 붙인다. 예들 들어 벅스버니의 학명은 ‘토끼’를 뜻하는 속명인 Lepus 뒤에 종소명으로 animatus를 붙여 ‘Lepus animatus’로, 톰은 고양이를 뜻하는 종소명 catus 뒤에 아종명으로 붙여 ‘Felis catus animatus’라고 명명했다. ‘animatus’는 ‘생명을 불어넣다’, ‘활기를 띄게 만들다’는 뜻의 라틴어로 ‘애니메이션’(Animation)도 여기서 왔다.

그는 지난 6월 10일부터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 애니마투스(Animatus) 시리즈를 전시하고 있다. 만화라는 상상력과 동물이라는 사실성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예술적 감각을 한껏 발휘한 그의 작품세계는 무엇일까. 그 줄다리기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항상 커다란 앞니 두개를 내놓고 웃는 벅스버니는 토끼를 의인화한 캐릭터다.



벅스버니의 S자형 척추

커다란 앞니를 위아래로 ‘딱딱’ 부딪치며 홍당무를 단숨에 먹어치우는 벅스버니. 벅스버니의 트레이드마크는 단연 입 밖에 튀어나온 ‘대문짝만한’ 앞니 2개다.

토끼를 의인화 한 벅스버니는 앞니가 실제 토끼의 것보다 2배 이상 크다. 또 토끼의 앞니는 4개인 데 반해, 벅스버니는 앞니가 2개뿐이다. 벅스버니를 만든 미국 만화가 척 존스가 토끼의 특징을 강조하려고 앞니를 2개만 표현했는데, 이형구 작가도 존스의 표현을 뼈로 옮겼다.

두 발로 걷고 두 손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벅스버니에서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네발로 걷는 토끼가 직립보행하려면 척추가 변해야 한다. 토끼는 척추뼈가 위로 볼록한 모양으로 연결돼있다. 그런데 직립보행하는 벅스버니의 척추는 인간의 것과 비슷한 S자 형이다. 이형구 작가는 직립보행하면서 허리에서 체중을 견디려면 S형 척추가 가장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벅스버니의 척추를 S자형으로 표현했다. 작가의 상상력이 어느 정도 들어간 대목이지만 경상대 수의학과 이희천 교수는 “해부학적으로 S자형 척추일 가능성이 거의 100%”라며 이형구 작가의 의견을 지지했다.

그런데 벅스버니의 골격을 봐도 토끼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있다. 이 교수는 “벅스버니의 두개골이 토끼보다는 고양이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리고 토끼는 긴 귀가 특징인데 작품에는 귀뼈가 없다. 귀뼈는 부드러운 연골로만 이뤄져있어 만약 토끼가 땅에 묻혀 화석이 됐다면 귀뼈는 안 남는다. 이형구 작가가 과학을 기본으로 작품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형구 작가는 벅스버니의 뼈대를 만들기 전에 케릭터에 알맞은 뼈구조를 스케치 했다.
 

 

 

뼈가 무거운 로드러너, 부정교합 코요테

저 멀리서 ‘삐삑’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로드러너. 그리고 길목에서 로드러너를 기다리며 호시탐탐 그를 잡을 기회만 엿보는 코요테. 로드러너는 긴 두 다리를 쭉 벌려 내달린다. 코요테는 ‘넌 딱 걸렸어’라는 듯 로드러너의 뒤꽁무니를 바짝 쫓는다.

로드러너는 미국 남서부지방에 사는 뻐꾸기과 조류이고, 코요테는 미국 북부지방에 사는 개과 육식동물이다. 이형구 작가는 두 캐릭터에서 어떤 골격을 발견했을까.

조류는 목뼈와 가슴뼈가 독특하다. 로드러너의 목은 유난히 길다. 그리고 조류의 목뼈는 7개가 넘는다는 사실도 정확히 표현했다. 목이 가장 긴 동물 하면 기린을 떠올리지만, 사실 목뼈가 가장 많은 동물은 조류다. 조류는 가슴뼈가 마치 역삼각형 모양 ‘방패’ 같다. 로드러너는 몸통이 비교적 작아 가슴뼈도 작은 편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로드러너의 뼈를 단단하고 꽉 찬 듯 표현했다는 점이다. 마치 포유류의 뼈처럼 보인다. 이 교수는 “조류는 몸이 최대한 가벼워야 날 수 있어 뼛속이 비도록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코요테는 코가 앞으로 불쑥 나온 반면 턱이 작다. 코가 아래턱을 가려 아래턱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다. 위턱과 아래턱의 부정교합이 심하다는 뜻. 이 교수는 “코요테는 육식동물인데 부정교합이 심하면 고기를 물어뜯기 힘들다”며 “육식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항상 로드러너를 쫓아다니지만 정작 로드러너를 잡아도 소용없을 수 있다.

그래도 코요테가 고기를 씹는 데는 문제가 없다. 비록 턱은 부정교합이지만 열육치(고기를 자르는 날카로운 이빨)와 어금니는 위아래가 잘 맞아 씹을 수 있다. 이 교수는 “부정교합은 선천적인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코요테도 이 병을 앓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로드러너를 쫓기 전에 수술부터 하는 것이 급선무일 텐데 말이다.
 

도망치는 로드러너와 뒤좇는 코요테의 뼈구조를 표현했다. 목이 긴 로드러너와 턱의 부정교합이 심한 코요테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사람 손 가진 도널드 덕

잘난척하는 수다쟁이 도널드 덕과 개구쟁이 조카 루이, 휴이, 듀이. 이들은 넓적한 부리를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재잘거리고, 툭하면 화내는 다혈질이다. 부리와 붙어있는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도널드 덕의 특징 하면 제일 먼저 부리와 사람 같은 손이 떠오른다. 작가는 도널드 덕을 표현할 때 넓적한 부리에 중점을 뒀다. 위로 말려 올라간 부리를 세심하게 표현했다.

또 이형구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오리 날개 대신 사람 팔을 붙였다. 조류는 원래 종아리뼈가 1개다. 포유류는 뼈 2개가 붙어있다. 그런데 도널드 덕의 종아리와 팔목뼈는 포유류와 같다. 손가락 관절도 인간과 비슷하다. 다행히 오리 날개구조는 인간 팔구조와 비슷하다. 포유류와 조류가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해 어깨뼈에 오리 날개를 붙이든 사람 팔을 붙이든 해부학적으로는 무리가 없다.

그런데 도널드 덕은 잘못 보면 섬뜩하기도 하다. 두개골이 둥글고 뒤통수가 볼록해 사람과 비슷한 느낌이다. 사람처럼 의인화한 캐릭터에 충실하게 골격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류의 두개골은 금이 안 갔다. 뼈 하나로 돼 있다는 뜻이다. 인간 같은 포유류의 두개골은 뼈가 56개나 돼 균열이 많다. 그런데 작가는 코요테의 두개골에는 금을 많이 냈지만 도널드 덕의 두개골에는 금을 하나도 만들지 않았다. 뛰어난 관찰력의 결과인 셈이다.
 

도널드 덕의 조카인 루이, 휴이, 듀이를 표현했다. 오리를 의인화한 캐릭터에서 손은 사람의 것을 달았다.



골반탈골 의심되는 톰

때리고 도망가라. 앙숙인 톰과 제리의 행동방식이다. 가정부나 개의 비위를 맞추려고 기회주의자처럼 행동하는 톰. 제리는 톰이 집에서 몰아내야 할 ‘적’이다. 하지만 톰은 항상 제리의 꾀에 속아 넘어가 가정부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톰의 골격을 보면 고양이라는 생각이 잘 안 든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고양이가 확실하다.

일단 골반이 브이(V)형이 아니라 사각형이다. 사각형 골반은 4발로 걷는 동물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원래 고양이는 하체의 체중만 견디면 돼 천추(골반뼈와 닿는 뼈)가 사각형 모양이다. 사각형 천추는 V형 천추에 비해 골반뼈와 접하는 부분이 좁다. 고양이에게 천추골절이 흔한 이유다. 이형구 작가는 천추의 모양과 크기를 정확히 표현했다.

그런데 고양이를 직립보행하도록 바꾸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형구 작가는 4발로 걷던 고양이 뼈를 ‘그대로’ 세웠다. 이 구조대로라면 톰은 설 수 없다. 만약 선다고 해도 관절염이 생길 수 있다. 작품에 나타난 구조대로라면 뒷다리가 체중을 100% 받는다. 그런데 톰은 골반과 천추가 평행해 자칫하다간 걷는 도중에도 천추가 골반 사이로 쑥 빠질 수 있다. 아니면 관절질환이 생겨 절뚝댈지도 모른다.

발바닥 피부질환에 걸릴 수도 있다. 톰은 발바닥 전체를 땅에 대고 걷는 격이므로 피부가 손상될 수 있다. 사람에 빗대면 종아리까지 바닥에 대고 걷는 셈이다. 종아리 피부는 굳은살이 없어 땅에 닿으면 피부가 까질 수 있다.

이형구 작가는 작업실에서도 하얀 가운을 입고 작품을 만든다.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일까. 그는 해박한 해부학 지식을 바탕으로 만화 주인공에 과학의 옷을 입혀 뼈대를 만들어줬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만화 주인공들이 독자적인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 듯하다. 이것이 대중문화의 환영(幻影) 속에서 가상의 화석을 발굴해내는 ‘고고학자’ 이형구의 작품세계다.
 

01 톰이 금방이라도 제리를 덮칠 듯 달려드는 모습을 포착했다.
02 톰은 골반이 사각형이라 체중을 다 견디기에는 역부족이다. 두 발로 걷는 동물은 사각형 골반보다 V형 골반이 안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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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목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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