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둥글다’는 서양과학의 주장(지구설)은 중국에 기독교를 전파하러온 예수회선교사들을 통해 16세기 후반부터 알려졌다. 그러나 중국인이나 조선인은“땅이 둥글면 지구 아래쪽의 사물은 거꾸로서있는 것이냐”며 서양 선교사들을 조롱했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과학적 사고력이 전혀 없어서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던졌을까.
요즘 중력이론을 아는 대학생에게“중력은 왜 생기느냐”고 묻는다면 이들은 전혀 대답하지 못한다. 과학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한번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시대 우리 학자들은 뉴턴의 이론을 모르고서도 중력의 발생 원인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들의 설명은 터무니없이 비과학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매우 과학적인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다.
흙, 물, 공기, 불 그리고 제5원소
서양 선교사들이 동아시아에 지구설을 전해준 시기는 뉴턴의 중력이론이 과학계의 상식이 되기 훨씬 전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중력현상을 설명해줄또다른 이론이 있었다. 고대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마련해놓은 설명이었다. 고대의 우주구조론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에 둥근 지구가 있다. 우주 전체 가운데 지구에서 달이 운동하는 궤도까지의 공간은 지상 세계이고그바깥은 행성과 밤하늘의 뭇별이 있는 천상 세계였다. 천상 세계는 변화하지 않는 세계로 완전한 원소인‘제5원소’로돼있지만, 지구 중심에서달궤도까지의 공간은 계속 변화가 일어나는 불완전한 세계였다.
지상계의 사물은 불(fire), 공기(air), 물(water), 흙(earth)의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된다. 4원소는 가볍고 맑은 순서로 고귀함이 결정됐으니, 흙은 가장 무겁고 탁하고 천한 원소이고 불은 가장 맑고 고귀한 원소다. 원소들은 각기 자신의 위치가 정해져 있는데, 흙은 가장 무겁고 탁한 원소라 우주에서 가장 낮은 곳인 지구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물, 공기, 불이 차례로 위치한다.
지구 위에 바다나 강이 있다는 점을 볼때 흙 위에 물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상식과 맞아떨어진다. 또한 바다 위로 대기권이 있으니물위에 공기가 있다는 점도 상식과 통한다.
다만 공기층 위에 불 층이 있다는 점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데, 이 또한 고대인의 상식에는잘맞는 내용이었다. 원소들은 항상 자기가 원래있어야할자리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 공기 중에서 불을 피워보면 불꽃은 항상 위로 향하는데, 이는 불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가려는 성질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그러므로 공기층 위에불층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소들이 항상 자기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가지고 중력을 설명할 수 있었다. 돌은 흙으로 만들어져 돌을 공중에 던지면 흙이 원래 있어야 할 위치인 우주의 가장 낮은 곳, 즉 지구 중심으로 돌아가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돌은 지면에 떨어지고 나서도 계속 지구 중심으로 가려는 힘을 발휘해 지면에 붙어 있을 수 있다.
둥근 지구의 아래쪽에서 공중에 던진 돌도 마찬가지로 지구 중심으로 향하는 힘을 가질 것이니 남반구의 사물이나 사람이 지구 밖으로 떨어져나갈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중국에 온 서양 선교사들은 이런 식의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이론으로 지구설과 중력 현상을 잘 설명할수 있었다.
서양 4원소설, 조선에선 비과학적
문제는 중국인이나 조선인이 서양의 4원소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나온 4원소설을 중세는 물론 예수회 선교사들이 교육받던 르네상스 시기까지도 의심 없이 믿어왔다. 하지만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우주가 기(氣)로 이뤄져 있고 모든 사물이 기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4원소를 한자로 번역하면 토(土), 수(水), 기(氣), 화(火)라고할수있는데, 동양의 우주생성론에 따르면화, 수, 토는 오행(五行)에 속한 것으로 모두 기가 변해 만들어진 물질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과 조선의 많은 학자는 서양의 4원소설을 듣고어떻게 화, 수, 토가 기와 똑같은 원소일 수 있느냐고 비웃었다.
서양의 4원소설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원소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려는힘’으로 중력현상을 설명하는 서양과학이론은 중국인이나 조선인에게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기독교와 서양과학을 반대하기로 유명했던 중국인 양광선(楊光先, 1597~1669)은 땅이 둥글다면 다음과 같은 내기를 해보자고 했을 정도였다.
함께 2층짜리 건물에 가서 자신은 2층 마루에 똑바로 서있을 테니까 땅이 둥글다고 주장하는 선교사는 1층의 천정에 붙어서거꾸로 서있어 보라고. 그러면 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믿겠다는 얘기였다.
선교사는 당연히 4원소설에 따라 지구 아래 면에도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서양 4원소설 자체를 믿지 않는 중국인이나 조선인에게는 아무의미도 없는 설명이었다.
달걀에 거꾸로 붙은 개미?
땅이 둥글다는 사실은 천문학적인 증거로 손쉽게 증명할 수 있었다. 월식 때 달에 비친 지구 그림자가 둥글다는 점, 남북 방향으로 먼 거리를 움직여 보면 북극성의 고도가 달라진 다는점, 동서 방향으로 멀리 떨어진 두지점의 시간이 다르다는 점은 확실하고도 쉽게 거론되는 증거였다. 선교사들이 서양천문학을 전해준 뒤부터 서양지식을 배우고 그것이 정확하다는 점을 알게된중국과조선의 학자들은 어쨌든 지구가 둥글다는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을 늘 괴롭힌 것은 왜 지구 아래편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중력 현상이었다.“지구 반대편에서는 건물이나 물건이나 모두 거꾸로 붙어 있어야할것이다. 우물에서 긷는 물도 거꾸로 채우고 저울추도 거꾸로 늘어질 것이다. 천하에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어느 조선유학자의 비판이다.
중력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조선학자 남극관(南克寬, 1689~1714)은 계란위에서 움직이는개미를 생각했다. 달걀을 공중에 매달아 놓고 개미를그위에 올려놓으면 개미가 달걀의 아래쪽에서 거꾸로 붙어 움직일 수 있다. 그는“개미는 달걀에 붙어 있다는 사실만 알지 자신이 거꾸로 붙어 있다는 점은알지 못한다”며“사람은 작고 지구는 거대하므로 지구에 사는 사람은 달걀에 붙어 있는 개미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과학을 조금 아는 요즘 사람이라면 코웃음을칠 설명이지만, 뉴턴의 중력이론도 모르고 서양의 4원소설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고안해볼수있는 가장 상식적인 설명이 아닐까.
‘성호사설’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이익(李瀷, 1681~1763)은 남극관의 설명이 지닌문제점을 잘알고 있었다. 사실 개미가 달걀에 붙을수있는 이유는 발바닥에 있는 찐득거리는 성분 때문이지 달걀 중심이 개미를 잡아당기는 중력 때문은 아니다. 우주가 기로 구성돼 있다는 동양 우주론전통을 이어받은 이익은 중력 현상을 설명할 근거를 기의 회전에서 찾았다.
물이 소용돌이치는 곳에 가루를 뿌려보면 가루가 소용돌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구 주변을 감싸고 있는 기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 안쪽으로 미는 힘이 생겨 사람과 사물이 지구 표면에 붙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이익의 설명이었다.
홍대용(1731~1783)은 조선에 지구자전설을 제안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의 지구자전설도 사실은 중력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고안이었다.홍대용은 지구가 빠르게 회전하면 지구 주변을 감싼 기와 마찰이 생겨 자연스럽게지구 중심 쪽으로 미는 힘이 생긴다고 봤다.
최한기, “뉴턴 역학은 죽은 것”
1860년경부터 조선에 뉴턴 물리학이 소개됐다. 뉴턴의 중력이론을 조선에서 가장 먼저 접한 사람은 최한기(崔漢綺, 1803~1877)였다.그런데 최한기는 뉴턴의 이론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뉴턴 역학에서는 중력이 생기는원인과 힘이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뉴턴은 “물질(질량)이 있는 곳에 중력이 있고 중력이라는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물질(질량)이 어떻게 힘을 만들어낼까. 또 실로 맨 것도 아닌데 지구는 어떻게 사과를 당기는 걸까.이런 질문에 대해 뉴턴은‘프린키피아’라는 책에서“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고 답했다.
과학은 자연에 그런 힘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 한다는 점만 설명하면 된다는 얘기다. 이는 중력 현상에 대한 뉴턴식 근대과학의 설명방식이다. 바로‘왜’(Why, 힘의 발생과 전달과정)는 묻지 말고‘어떻게’(How, 힘이 작용하는 수학적 방식)만 물으라는 뜻이다.
보통 우리는 중력에 대해 ‘왜’를 묻지 않는다. 자라면서 뉴턴의 과학을 배우고 익히면서 뉴턴 방식으로만 질문을 제기하고 대답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과학을 잘 안다는 대학생들에게 중력이 생기는 원인, 매개물도 없는데 먼 거리에 힘이 미칠 수 있는 이유를 물었을 때 대답을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중력에 대한 뉴턴 방식의설명을상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왜’라는 질문을 빼놓지않는다. 조선의 최한기도 마찬가지였다. 최한기는 중력이 생기는 원인과 작용하는 과정을 설명하지 못하는 뉴턴 역학은‘죽은 수학’이라고 말했다. 이런 불만은 동양학자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뉴턴 역학이나온뒤 데카르트 철학을 신봉했던 프랑스의 철학자와 물리학자는 힘이 작용하는 과정을 설명하지 않는 뉴턴 역학은 신비주의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소용돌이 vs. 기
뉴턴 역학에 만족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어떤 미시적인 과정을 통해 힘이 생기고 전달되는지 설명하고 싶어했다. 데카르트주의자들은 데카르트의 설명에 따라 물질 입자로 이뤄진 수많은 소용돌이가 서로 엇갈리고 부딪치면서 힘을 만들어내고 멀리까지 힘을 전달할수있다고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조선의 최한기는 어떤 물체 주변을 감싸며 회전하는 기가 다른 물체를 감싸며 회전하는 기와 서로 교차하면 힘이 발생하고 힘을 전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기의 회전으로 중력현상을 설명하려 했던 전통시대의 학자들은 흔히 요즘의 초등학생만도 못한 비과학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또한 한국과학이 선진국에 비해 뒤떨어진 원인이 비과학적인 조상들 때문이 아닌가 한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현대과학 중심적인 생각에서 나온 커다란 오해다. 흔히 서양과학은 동양과학보다 앞서 있었으므로 하루빨리 받아들여야 했다고 생각한다. 왜 서양의 지구설이나 중력이론을 빨리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하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조선학자들도 할 수 있는 한 가장 과학적인 방식으로 서양과학을 이해하려고 했다. 지구설은 천문학적 증거로 수긍할수있었지만, 중력현상을 설명하는 서양식4원소설이나 뉴턴의 설명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4원소설은 기의 우주론에서볼때너무나 비과학적인 이론이었고, 뉴턴 과학의 중력론 또한 힘의 발생과 전달원인을 설명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이론이었던 것이다.
서양과학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과학의 내용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설명할 것인지 질문의 형식마저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뉴턴 과학을 받아들인 뒤 우리는 한 번도 중력은 왜 생기며, 어떻게 전달되는가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통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그 질문에 계속해서 매달렸다.
지금 우리와 조선시대 사람들 중 누가 더 과학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