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무언가가 있는 곳의 방향을 알려주는‘잭의 나침반’이 나온다. 이 나침반은 보물을 찾는 해적에게는 매력적이지만, 정확한 북쪽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 본래 역할은 하지 못한다. 나침반을 가진 사람에 따라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이 달라지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는 나침반 바늘이 뱅글뱅글 돈다.
실제 나침반도 영화 속 잭의 나침반처럼 가리키는 방향이 항상 일정하지는 않다. 지구 자기장이 끊임없이 바뀌어 북극점의 위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정처없이 떠도는 북극점 |
지구의 자기장은 마치 지구 중심에 커다란 막대자석이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현재 지구 자기장의 북극은 캐나다 북단의 한 섬에 있으며 남극은 호주 태즈메니아섬 남쪽 300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지구의 자기장을 나타내는 자기력선은 남반구에서 나와 북반구로 들어간다.
따라서 우리가 북극이라고 부르는 지점은 사실 지구라는 커다란 자석의 S극이다. 하지만 관습적으로 나침반의 붉은 색 부분이 가리키는 방향을 지구자기장의 북쪽이라고 부른다.
항해할 때 쓰는 자기계라는 장치를 사용하면 자기장의 방향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자기계는 지구자기 북극에 대해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얼마나 벗어났는가를 알 수 있는 편각과, 수평면에 대해 나침반의 바늘이 얼마나 위아래를 향하는지 알 수 있는 복각을 측정한다.
지구 전체 자기장의 방향은 매우 천천히 변한다. 태평양의 깊은 바닥에는 지구자기장 방향으로 자화되며 굳어버린 마그마의 흔적이 있다. 이를 관찰하면 지구 자기장의 변화를 볼 수 있는데, 어떤 과학자들은 100만 년에 2~3번 꼴로 지구의 자북극과 자남극이 서로 뒤바뀐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뤄지는 지구 전체의 자기장 변화는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한 지역에서 자기장의 변화를 몇백 년 간격을 두고 측정해 보면 자기장의 방향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북극점이 떠돌아다닌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영국 런던에서 나침반이 가리키는 북쪽 방향은 1580년과 1820년 사이에 35도나 변했다. 그럼 이런 자기장 방향의 변화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방향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도 없고, 당시 나침반의 바늘이 고정된 채로 남아있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비교적 짧은 시간동안 일어나는 지구 자기장의 변화는 철, 니켈 같은 몇 가지 금속이 자연 속에 남긴 흔적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금속의 구조를 살펴보면 3x10-7m 크기 정도의 매우 작은 자기구역(magnetic domain)으로 나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작은 자기구역들은 각각이 하나의 영구자석이나 다름없다.
보통 이런 자기구역들은 방향이 제멋대로라 전체적으로는 자석의 성질을 나타내지 않는다. 하지만 강한 자석 옆에 놓아두면 이 자기구역들이 변화를 일으킨다. 강한 자기장에 의해 작은 자기구역들이 합쳐지고 점점 커진 자기구역이 외부 자기장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게 되면 자석의 성질이 나타난다.
클립을 자석에 오랫동안 붙여두면 클립도 자석의 성질을 갖는다. 클립 안의 작은 자기구역들이 한 방향으로 늘어서 자석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한 영구자석이라도 뜨겁게 달구면 자석의 성질을 잃는다. 온도가 올라가 분자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 크게 만들어졌던 자기구역들이 다시 잘게 쪼개지며 작은 자기구역들의 방향이 제멋대로 흩어진다.
벽화의 빨간 물감은 ‘나침반 화석’? |
도자기를 굽는데 사용하는 가마의 진흙벽은 지구 자기장 변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고대에 만들어진 가마의 벽과 바닥에 있는 진흙은 철 성분이 있는 산화자철광이나 적철광을 포함하고 있다. 철은 자성을 띠는 자기구역으로 이뤄져 있어 자기구역의 크기와 방향에 따라 자석의 성질을 나타낼 수 있다. 적철광의 자기구역 한 개의 크기는 1mm까지 커지기도 한다.
가마에서 불을 때 진흙이 수백 도 이상으로 가열되면 그 속에 있던 적철광이 지구자기장의 영향을 받는다. 적철광 안에 있는 자기구역들은 서서히 회전해 지구 자기장과 나란한 방향으로 자리잡는다. 가마가 식으면 적철광은 지구 자기장과 같은 방향으로 자기장을 띤 채 굳는다. 당시 지구의 자기북극 방향을 알려주는‘나침반 화석’인셈이다.
가마가 사용됐던 당시의 지구 자기장 방향을 알아내기 위해 고고학자는 먼저 현재의 수평면과 북극 방향을 측정한다. 그리고 가마의 벽에 남겨진 자연산 나침반의 방향으로 가마를 사용했던 당시의 지구 자기장 방향을 알아낸다. 가마의 나이를 방사성탄소동위원소를 사용해 계산하면 구체적으로 몇 년 전 지구 자기장의 방향인지 알 수있다.
한편 고미술 작품 속에도 지구 자기장 변화의 흔적이 남아있다. 벽화를 그릴 때 사용한 빨간 물감에는 산화자철광 가루가 들어있다. 이 가루에 있는 알갱이들은 철 성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알갱이 하나하나를 자석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이 알갱이들은 물감 속을 떠돌아다니다 벽에 칠해질 때 액체 속에서 회전해 지구 자기장과 같은 방향으로 정렬한다. 마치 나침반이 지구 자기장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것처럼 말이다. 물감이 마르면 이 알갱이들은 자기장 방향을 가리키며 굳는다.
따라서 물감 안에서 자철광 알갱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알아내면 벽화가 그려졌을 당시 지구 자기장의 방향을 알 수 있다. 끈적끈적한 테이프를 벽화의 일부분에 댔다가 떼면 물감이 얇게 붙어있다. 실험실에서 이 테이프를 조사해 자철광 알갱이의 방
향을 현재의 지구 자기장의 북극 방향과 비교하면 된다.
달에는 자기장이 없다? |
가마나 벽화에 남은 증거를 보면 지구 자기장 북극의 방향이 조금씩 변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지구의 자기장은 전류가 잘 흐르는 지구 중심에 있는 액체 상태의 외핵 바깥 부분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구 내부의 자기장을 일으키는 물질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지구가 아닌 다른 천체들은 어떨까. 태양 같은 다른 많은 별에도 자기장이 있다. 특히 중성자별은 매우 강한 자기장을 만들어낸다. 또 수성이나 목성을 포함해 태양계 대부분의 행성에도 자기장이 발생한다. 하지만 액체 상태의 핵이 없는 달에는 자기장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달에서 나침반은 무용지물이다.
지구자기장이 시간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더 이상 정확한 위치를 나침반으로 찾기 어려워졌다. 최근에는 인공위성에 전파를 쏘아 위치를 알리면 인공위성 세 대가이 신호를 받아 분석한 뒤, 전파를 쏘아올린 곳의 좌표를 알려주는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를 널리 사용한다. 휴대전화의 친구 찾기 기능이나 자동차 네비게이션, 세계지도 위에 비행기의 위치를 표시해주는 여객기 내부의 화면도 GPS를 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