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애리조나 주 사막엔 호피 인디언이 산다. 과거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가뭄이 들면 이들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의 성공 확률은 100%. 놀라운 수치지만 이건 호피 인디언이 영험해서가 아니었다. 비가 올 때까지 쉬지 않고 제를 지내서다.
흥미로운 점은 적은 양의 비라도 내리면 인디언들은 빠른 시간 안에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호피 인디언은 기우제를 지내기 전, 가장 좋은 땅에 옥수수 씨앗을 뿌린다. 인디언의 주식인 옥수수는 적은 양의 비에도 잘 자라는 작물. 열심히 기우제를 지낸 뒤 옥수수를 먹은 경험이 호피 인디언 사회에서 기우제 성공률 100%의 믿음이 된 셈이다.
사실 자연 조건에 따라 농사의 성패가 결정되는 건 인류의 공통된 숙명이었다. 호피 인디언뿐만 아니라 과거 대부분의 종족이 기우제 전통을 지니고 있던 이유다. 문제는 가뭄이 현대에도 농경활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다는데 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엄청난 속도로 과학기술이 발달해왔지만 가뭄 속에서 농작물이 타들어가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막에는 메말라 갈라터진 대지를 뚫고 살아가는 식물이 있다. 가뭄 속에서 말라죽은 농작물을 바라보는 농부는 이 식물이 사막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묻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인류에게 자연은 영원한 스승이라고 했던가. 과학자들은 메마른 땅에서도 살아남은 식물의 노하우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가뭄이라는 스트레스를 극복한 식물의 유전자와 이 유전자가 만들어 내는 단백질을 찾은 것이다. 이를 통해 소량의 물만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식물의 세포를 만들어냈다. 인공세포가 탄생한 것이다.
인공세포는 유전자를 변형해 특정한 기능을 갖도록 만든 세포다. 유전자를 변형시키면 세포에서 다양한 기능을 하는 단백질을 새로 만들거나 더 많이 만들 수 있다.
인공세포 연구가 가뭄에 견디는 작물을 개발하는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건 아니다. 최근 인공세포는 대체연료 개발의 열쇠가 되고 있다. 지난 1998년부터 식물단백질이동연구단을 이끌며 인공세포 연구를 선도하고 있는 포스텍 황인환 교수는 “인공세포는 바이오 에탄올을 만드는 데 필요한 효소(단백질)를 대량으로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고 말했다.
가뭄 스트레스에 끄덕없는 식물
바이오 에탄올은 글루코스(당)를 발효시켜 만든다. 글루코스는 식물세포벽의 원료인 셀룰로스에서 얻는다. 주변에 널려 있는 식물의 세포벽에서 바이오 에탄올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셀룰로스가 글루코스가 되려면 셀룰레이스라는 효소가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식물에 있는 셀룰레이스는 측정조차 어려운 미량이다. 이 점에 착안한 황 교수는 셀룰레이스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인공세포를 갖춘 작물을 만들어내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연구가 순조롭게 진척되면 ‘황 교수표’ 작물에서는 보통 작물보다 수백 배나 많은 셀룰레이스가 만들어질 것이다.
앞서 밝혔던 가뭄에 견디는 유전자와 셀룰레이스를 대량으로 만드는 유전자의 연결고리는 바로 이것이다. 셀룰레이스가 ‘펑펑’ 쏟아지는 작물이 건조한 땅에서 ‘쑥쑥’ 자랄수록 얻을 수 있는 셀룰레이스는 많아진다. 글루코스는 물론 바이오 에탄올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다는 얘기다. 현재 황 교수는 이 같은 연구결과를 옥수수에 응용, 셀룰레이스가 대량 분비되면서도 가뭄에 저항성이 있는 품종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황 교수는 겨자과 식물인 애기장대에서 환경 스트레스에 저항성을 지닌 유전자를 억제하는 ‘AtSIK’ 유전자와 환경 스트레스에 저항성을 지닌 유전자를 촉진하는 ‘AtSIZ’ 유전자를 발견했다.‘AtSIZ’가 과다 발현되면 염분과 가뭄, 추위에 대한 저항성이 높아진다. 이렇게 되면 열악한 환경에서도 식물이 자랄 수 있어 셀룰레이스를 얻는 것도 그만큼 쉬워진다.
그는 식물이 환경 스트레스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호르몬인 ‘ABA’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규명해 지난해 세포생물학 권위지인 ‘셀’ 9월 22일자에 발표했다. 당시 황 교수는 ‘AtBG1’ 유전자 발현 정도에 따라 애기장대를 제거, 정상, 과다발현으로 구분했다. 과다발현 때 애기장대가 가뭄에 가장 큰 저항력을 지니는 것을 밝혀냈다. 해당 유전자가 과다발현된 농작물을 심으면 ‘가뭄 속 풍작’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깨끗한 에너지 시대 앞당긴다
현재 미국은 옥수수를 이용한 바이오 에탄올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기아 문제를 외면한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바이오 에탄올은 유가 상승과 환경오염에 대처할 수 있는 대안으로 평가받는다.
바이오 에탄올이 비교적 낮은 가격을 유지하는 것도 개발과 생산에 촉진제가 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미국의 휘발유 생산비용은 1갤런 당 2.2달러 수준이지만 바이오 에탄올은 1~1.2달러에 불과하다. 장기적으로 유가가 고공 행진을 한다면 바이오 에탄올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증가할 전망이다.
황 교수는 바이오 에탄올을 개발하기 위해 인공세포의 기능을 높일 계획이다. 그는 “지금은 바이오 에탄올을 만들 때 옥수수 알갱이만 쓰지만 앞으로는 옥수수대와 옥수수잎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환경오염과 에너지 고갈 등 현재 우리 앞에 닥친 문제는 만만치 않다. 그렇기에 이를 풀기 위한 연구에 매달리고 있는 황 교수의 모습이 더욱 빛난다. 오늘도 그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작물로 가득 찬 들판을 상상하며 늦은 밤까지 연구실을 지킨다.
골다공증 예방 홍당무 나올 것
황인환 교수는 약물 성분이 있는 인공세포를 개발하는데에도 힘을 모으고 있다. 이를 응용해 성장 호르몬이 함유된 시금치, 골다공증 예방 성분이 들어간 홍당무를 내놓겠다는 얘기다. 약 대신 음식을 먹는다는 말이다.
그의 연구가 현실화돼 치료 또는 예방 효과가 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선 환자들은 주사기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고, 매번 먹어야 하는 약에서도 자유로워진다. 적어도 겉모양만 봐서는 식품과 약물의 경계가 사라지는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 박수 갈채만 쏟아지는 건 아니다. ‘음식처럼 먹는 의약품’도 기본적으로는 유전자변형식품(GMO)과 같은 원리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공세포의 안전성에 의구심을 보내는 눈길도 있다.
이에 대해 황 교수는 인공세포에 제기되는 위험도에 비해 그 혜택이 훨씬 크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GMO의 위험성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건 없는 상황”이라며 “검증되지 않은 우려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인공세포를 봐서는 안 될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대장균으로 만든 인슐린이 당뇨병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며 “인공세포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지면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시종일관 자신감에 가득 찬 모습으로 연구 방향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런 황 교수도 제자들 앞에서는 ‘살뜰한 아버지’라는 게 연구원들의 귀띔이다. 그는 좋은 공연이 열릴 때마다 연구원들과 대구오페라하우스까지 원정을 떠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학업과 연구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일 것을 염려한 황 교수의 배려다.
지난해에도 인기 뮤지컬 ‘맘마미아’와 ‘명성황후’ 등 웬만한 유명 공연들을 모두 제자들과 관람할 정도로 황 교수의 제자 사랑은 유별나다. 연구단에서 세계적인 성과가 잇달아 나오는 것도 제자를 아끼는 황 교수의 마음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