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광가속기 분야에서 세계적인 대가지만 항상 겸손하고 친절하시죠. 급한 부탁을 드려도 만사 제쳐놓고 도와 주신답니다.”
포스텍 신소재공학과 제정호 교수는 스위스 로잔공대의 조르지오 마가리톤도 부총장 이야기라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제 교수가 ‘방사광 X선 영상’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조언해 준 대선배이자 14년간 우정을 쌓아온 붕우(朋友)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오랜 시간동안 변치 않고 함께 연구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당신은 나의 연구 동반자!
“스위스 로잔공대는 20명이 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세계 명문대학입니다. 사이언스파크를 중심으로 인력을 양성하고 있지요.”
마가리톤도 부총장은 로잔공대를 운영하는 핵심인물로 550편이 넘는 국제학술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비록 낯선 외국 기자와의 만남이었지만 부총장은 아주 친근하게 맞이했다.
“한국의 제정호 교수는 연구를 하는 데 있어 가장 절친한 동반자”라며 마가리톤도 부총장이 말문을 열었다. 그가 제 교수와 인연을 맺은 때는 1993년. X선 산란연구에 관심을 뒀던 제 교수가 미국의 엑손연구소에서 대만중앙연구원의 유광 후 박사와 공동연구를 시작하면서다. 당시 후 박사의 지도교수가 마가리톤도 부총장이었기 때문에 제 교수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다.
마가리톤도 부총장은 “포항방사광가속기를 설립할 때 자문 역할을 했다”며 방사광연구를 시작하는 제 교수에게 “아직 연구되지 않은 X선 영상분야를 연구해보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유럽 방사광가속기위원회장이자 세계적인 방사광가속기 전문가인 마가리톤도 부총장은 제 교수가 연구 방향을 정하는데 큰 힘이 됐다. 뿐만 아니라 마가리톤도 부총장, 후 박사, 제 교수는 국제 컨소시엄을 구성해 X선 영상전용 빔라인을 갖추고 본격적인 공동연구에 돌입했다.
그 결과 2002년 전기도금의 실시간 영상을 네이처에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의학 분야에까지도 응용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두 과학자는 스위스와 한국에서 각국의 과학기술부장관이 수여하는 한국-스위스 우수연구자상을 공동으로 받기도 했다. 마가리톤도 부총장은 “오랜 시간동안 공동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은 서로를 신뢰하고 인정하면서 돈독히 쌓아온 우정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소주 즐기는 스위스 과학자
두 과학자의 우정이 인연이 된 것일까. 마가리톤도 부총장은 한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한국에 오면 이태원에서 쇼핑을 즐기고 소주도 좋아한다. 게다가 스위스에서 타고 다니는 승용차도 우리나라 제품이다. 이런 남다른 애정은 자연스럽게 공동연구에도 영향을 준다.
2005년 12월에는 제 교수가 창의적연구진흥사업 연구계획서를 검토해 달라고 스위스에 있는 부총장에게 급하게 요청했다. 그런데 때마침 부총장은 미국에 사는 딸을 만나러 떠나려던 참이었다. 제 교수는 “이미 비행기 예약은 끝났고, 공항에 도착해야할 시간까지 4시간밖에 없는데도 일일이 모두 검토해주고 떠났다”며 공동연구의 끈이 단순한 협력관계 이상임을 시사했다.
공동연구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한 협력이 많고 연구비를 받아 각자 연구하는 경우가 많다. 공동연구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점이 바로 이런 단점 때문이다. 하지만 마가리톤도 부총장과의 공동연구는 달랐다. 두 사람은 필요한 부분에서는 분야를 나눠 연구했고, 직접 연구자들이 오고가며 실험을 하고 세미나도 열었다. 그동안 주고받은 e메일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다.
제 교수는 “후 박사가 지도교수인 마가리톤도 부총장을 부를 때 ‘헤이~ 조르지오’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하죠”라며 세 사람의 관계를 단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우리나라와는 문화적인 차이도 있지만 교수의 권위를 넘어 동등한 연구자로서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런 관계 속에서 자유스러운 연구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고 결과는 연구 성과로 나타난다.
캄브리아기 화석, 미세혈관도 관측
제 교수는 “X선 영상을 이용해 구리전극 위에 아연금속을 도금할 때 계면에 만들어지는 둥근 수소방울을 영상으로 관찰했다”고 밝혔다. 전기도금은 100년 이상 산업에 이용된 기술이지만 도금 과정의 정확한 메커니즘을 밝히지 못했다. 일반 X선 방사광은 단파장을 이용하기 때문에 진행과정까지 관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 교수는 이런 문제를 X선 영역에 존재하는 여러 파장의 빛(X선 밴드)을 이용해 해결했다. 가시광선이 빨간색에서 보라색까지 에너지의 차이에 따라 띠(밴드)를 구성하듯 X선도 에너지에 따라 띠를 구성할 수 있다. X선을 에너지가 다른 여러 파장대로 이용하면 광량이 크게 늘어나 물체가 반응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런 결과는 2002년 과학저널 네이처지에 발표돼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제 교수는 “X선 밴드를 이용한 영상기술로 캄브리아기 화석을 촬영해 내부에 있는 0.5mm 크기의 곤충화석 모습까지도 확인했고, 조영제를 사용하지 않고 미세혈관까지 관찰했다”고 설명했다. 물질의 구조뿐 아니라 생리의학 쪽 연구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제 교수는 이런 연구 성과를 자신의 업적으로만 내세우지 않는다. 작은 것 하나라도 서로의 노력을 인정해 주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스위스에서 마가리톤도 부총장을 만났을 때도 부총장은 ‘방사광원의 재료과학·의과학 방사선 응용’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논문에는 마가리톤도 부총장과 후 박사, 제 교수 세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다.
마가리톤도 부총장은 “연구가 피곤해서는 안 된다. 연구를 즐기는 사람만이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다”며 “최종목표를 세우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목표만을 위해 노력하면 그 이상의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두 교수의 공동연구 관계는 자연스럽게 제자들로 이어진다. 스위스와 한국을 넘나들며 서로 세미나를 열어 연구 노하우를 교환하고 서로 다른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새로운 연구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들의 연구가 수십 년 뒤 어떤 열매를 맺을지 기대된다.
크기는 경기도 4배, 국가경쟁력은 세계 1위
스위스는 마가리톤도 부총장이 제 교수, 후 박사와 공동연구를 하듯 학교와 기업, 국가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학문과 산업부문 모두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마가리톤도 부총장은 “나는 로잔공대의 부총장으로 있지만 이탈리아에서 태어났고 국적은 미국이다. 어떻게 보면 외국인이 부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셈”이라며 “스위스는 자신의 것만 고집하지 않고 다른 나라와 협력을 굉장히 잘하는 국가”라고 밝혔다.
지난해 8월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에는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계 50개 대학’에 스위스의 5개 대학이 포함됐다. 그중 로잔공대는 유럽에서 6위, 세계 23위를 기록하고 있다. 사실 스위스대학은 미국 대학의 운영방식을 따른다. 하지만 단순히 미국 방식대로 따라하기보다는 미국 방식의 장점만 취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마가리톤도 부총장은 “스위스의 대학은 자신의 뿌리에 미국 소스를 뿌려 독특한 문화를 만든 셈”이라며 “본성을 잃지 않으면서 더 발전하는 모델을 만든다”고 강조했다.
아인슈타인을 배출한 취리히공대와 로잔공대, 두 대학은 스위스 산업의 모태다. 스위스는 세계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으며 국가와 민간기업이 긴밀하게 지원하고, 산업으로 연계하는 통합모델을 만들었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에서 세계 125개국을 대상으로 국가경쟁력 지수 1위에 기록된 것도 그 때문이다. 평가기준 중에서 대학-기업간 연구개발 협력, 과학연구기관의 수준, 기업의 연구개발비 지출 부문에서 모두 1위를 기록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마가리톤도 부총장은 “스위스는 인구가 1000만명도 안 되는 작은 나라지만 세계 1, 2위하는 기업이 여럿 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국제 협력 때문이다. 우리가 혼자 못하니까 서로 협력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다”고 밝혔다.
‘스와치’로 대표되는 정밀시계 산업은 물론 제약분야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있다. 인구 50만명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 바젤에는 조류 인플루엔자 치료제 개발로 유명한 로슈나 노바티스, 세로노 같은 세계적인 제약기업이 들어서 있다. 그 바탕에는 대학의 연구기관이 있고, 각 대학은 자신만을 고집하지 않고 문을 열어 놓고 있다.
로잔공대는 6500명의 학생 중에서 40%가 외국인이다. 또 지난해 4월에는 우리나라 KAIST와 로잔공대가 과학기술협력회의를 열어 교류의 문을 넓히는 노력이 이어졌다. 세계로 가는 문은 언제나 열려있다. 그 문으로 들어가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닐까.
방사광가속기란?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가속시켜 빛을 만들어내는 장비다. 우리나라는 1994년에 포항방사광가속기를 설치해 2006년에 이용자가 1만명을 넘어섰다. 포항방사광가속기는 적외선에서부터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은 물론, 자외선, X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있는 폭넓은 광원을 만들어낸다. 원자, 분자, 단백질, 화합결합의 길이 등 고체 원자의 구조를 비롯해 다양한 생물학적 구조를 밝힐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