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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지면 달력도 없다

우리달력 이야기

편집자 주‘하늘에 數놓은 전통과학’은 천문 학과 수학을 중심으로 우리 전통과학을 새롭게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달력, 제곱근 구하기 등 익숙한 주제를 통해 서양과학과 다른 전통과학 의 묘미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370여년 전인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는 조선에 항복조건으로 청나라의 달력을 받아 써야 한다고 요구했다. 전쟁배상을 요구하고, 매년 일정량의 조공을 바치라고만 하면 될 일을 왜 굳이 조선이 청나라 달력을 써야 한다고 요구한 것일까. 달력은 기껏해야 날짜나 절기 정도를 적어놓은 몇장의 종이묶음이 아닌가.

달력은 사용자들이 모두 같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청나라가 보기에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고 개개인은 청나라라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조선이 청나라와 똑같은 달력에 따라 기념일을 지내고 사신을 파견하는 일은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사실을 매번 확인시켜주는 가장 좋은 본보기인 셈이다. 실제 청나라는 자국 달력에 따라 청나라 황제의 생일, 황후의 생일, 천문학에서 1년의 시작으로 봤던 동짓날, 청나라에 경조사가 있을 때 사신을 파견하라는 항복조건을 제시했다.

동양의 전통에서 달력의 바탕인 천문학은 제왕만 할 수 있으며 달력은 제왕만 반포할 수 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가 조선에 자신들이 내려주는 달력을 사용하라고 강요한 이유는 청나라 황제만 진정한 제왕이고 조선 왕은 속국을 다스리는 일개 신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국산 달력 비밀리에 제작

인조 때 청나라에 항복해 청나라의 속국이 된 조선은 인조의 아들인 효종 때(1654년) 청나라가 사용하는 달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 세종 때 만들어진 ‘칠정산’(七政算)을 버리고 청나라가 채용한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해 달력을 만들었다.

조선은 청나라에게 항복한 속국이었지만 내부적으론 엄연히 왕이 다스리는 국가였다. 때문에 조선왕이 백성에게 위정자로서 신뢰를 얻으려면 독자적으로 천문학을 연구하고 달력을 만들어 백성이 이를 사용하도록 해야 했다. 청나라가 서양천문학에 기초를 둔 ‘시헌력’을 채택한 뒤 조선에서는 북경의 서양선교사들에게 몰래 접근해 조언을 구하고 국내 천문학자들이 연구해 ‘시헌력’으로 ‘국산 달력’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청나라와 같은 달력을 쓰는 것이니 조선왕이 청나라에 복종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낼 수 있고, 백성에게는 국왕이 만든 달력을 쓰게 하는 것이니 위정자로서의 면모도 세울 수 있어 일석이조였다.

사실 조선 전기에도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맺은 이상 조선왕은 명나라 황제의 신하였다. 이때도 명나라는 조선에 자국 달력을 반포해주고

이를 사용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조선왕은 자신이 직접 만든 달력을 백성에게 내려주고 사용하게 하고 싶었다. 자신이 독립된 국가의 왕임을 백성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국 사신이 서울에 왔을 때 조선이 천문학을 연구하고 달력을 자체 제작해 쓰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궁여지책으로 궁궐에 있는 천문관측시설을 중국 사신이 못 보게 위장하거나 조선에서 인쇄한 달력의 겉장을 명나라나 청나라에서 반포해준 달력과 똑같이 만들어 중국 사신의 눈을 피했다. 전통시대의 달력은 날짜를 인쇄한 몇장의 종이묶음에 불과하지만 이처럼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정밀한 천문학이 기본


1772년에 발행된 시헌칠정력. 일상생활에서 쓰는 일용달력과 달리 천문관서에서는 태양, 달, 5행성의 위치만 표시한 달력을 만들기도 했다. 이를 일곱 천체의 달력이라는 뜻으로‘칠정력’이라 한다.


과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달력은 예로부터 그 시대에 가장 앞선 천문학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그래야만 그 달력을 사용하는 모두에게서 좋은 달력, 혹은 옳은 달력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세종대왕이 ‘칠정산’이라는 당시 세계 최고의 달력을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엄밀하게는 달력과, 그것을 만드는 기초가 되는 천문학과 계산법을 구분하지 않아 생겨난 혼동이다. 예로부터 달력은 역서(曆書)라고 하고, 달력을 만드는데 필요한 천문학과 계산법을 역법(曆法)이라고 불러왔다.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칠정산’은 바로 달력을 만드는데 필요한 역법을 말한다.

달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태양과 달의 운동을 관측해 1년과 1달의 길이를 정확히 정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1태양년의 길이는 달력에 쓰이는 모든 계산의 기초다. 칠정산에서는 ‘세실소장법’이라고 해서 1태양년의 길이를 100년에 0.0002일씩 짧아지게 조정하도록 돼 있다. 고대부터 1년의 길이를 측정하고 비교한 결과 실제 1년의 길이가 조금씩 짧아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칠정산은 시간에 따라 1태양년의 길이를 조정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까지 200년간이나 큰 오차 없이 사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시대 최고로 정밀한 천문학에 기초를 두고 만들어진 달력이라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오차가 생기기 마련이다. 로마제국의 시저가 채용했던 율리우스력은 1582년 그레고리력으로 바뀌기까지 달력의 춘분 날짜와 실제 태양이 춘분점에 위치하는 날짜가 11일이나 차이가 났다. 이때 달력의 토대가 되는 천문학 이론, 자료, 그리고 계산법을 바꿔 정밀도를 높이는데,

이를 ‘개력(改曆)’이라고 한다. 세종의 ‘칠정산’도 당시에는 세계 최고였지만 오차가 조금씩 누적돼 결국 효종 때에 이르러 ‘시헌력’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달력 계산법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효종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시헌력은 코페르니쿠스, 티코 브라헤, 케플러 같은 서양천문학자가 이룩한 천문학적 성과와 계산법을 채용한 역법이다. 이들 서양 천문학자의 연구성과는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중국에 전해졌다. 그리고 청나라가 새로운 역법을 채택해 달력을 만들자, 조선에서도 같은 역법을 사용해 달력을 만들었다.

10집에 한 부밖에 없는 귀중품
 

조선 선조 때 반포된 1594년(갑오년) 달력의 첫 장. 세종 때 만들어진 달력 계산법인 칠정산에 따라 제작 됐다. 年神方位之圖라는 이름 아래 그려진 그림은 그 해에 각 방위를 지배하는 각종 신의 배치를 나타낸다.


19세기 초반의 학자인 이규경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반포된 달력의 총 부수는 약 14만부였는데, 이는 전국 가호의 10분의 1에 못 미치는 수치였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30만부 정도를 인쇄한 해도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오늘날처럼 한집에 귀찮을 정도로 달력이 많지 않았다. 때문에 달력은 국왕이 고위직 관리에게나 하사하는 물건으로 소중하게 인식됐고 기껏해야 중앙이나 지방의 관서, 고위관리, 그리고 상류층 양반가문에서나 인쇄된 달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일반 백성은 공식적으로 인쇄된 달력을 지체 높은 양반가에서 빌려 간단하게 몇몇 중요한 날짜만 베껴서 만든 임시 달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달력은 청나라 황제가 조선왕에게 내려주는 것이나, 왕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이나, 양반가에서 서민에게 베끼도록 허락해주는 것이나, 모두 주는 쪽은 지배자이며 받는 쪽은 피지배자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캘린더 마케팅이라고 해 달력에 제품 광고를 넣고 ‘제발 이 달력 좀 써주세요’라며 애원하는 오늘날의 상황에 비춰보면 참 이해하기 힘든 의미가 전통시대 달력에 들어있는 셈이다.

친구 만나기 좋은 날


현대의 달력은 제품광고를 넣고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케팅에 이용된다. 하지만 전통시대 달력은 왕이 신하에게 내려주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달력에는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문화적 의미도 담겨있다. 현재 쓰고 있는 우리 달력을 잘 보면 양력날짜 아래에 작은 글씨로 음력날짜, 24절기, 국경일, 기념일이 표시돼 있다. 또 한식, 초복, 중복, 말복 같은 날도 나타나 있다. 날마다 60갑자로 따진 간지나 열두 띠 동물을 볼 수 있는 달력도 있다.

이는 모두 날짜에 문화나 관습이 반영된 결과다. 절기는 농경문화와 관련돼 있고, 한식은 음식문화와 조상의례, 복날은 여름철을 나는 풍습, 그리고 간지는 이사나 혼례 날짜를 정하는 택일 풍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통시대 달력에는 지금보다 훨씬 다방면으로 날짜의 길흉을 따지고 날짜에 따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따져놓았다. 예를 들어 칠정산에 따라 만들어진 1594년의 정월 달력을 보자.

1일(一日)이라는 날짜 아래에 “庚辰金滿虛雨水正月中宜會親友 不宜裁種”이라고 씌어있다. 이 내용은 정월초하루가 간지로는 경진(庚辰), 오행으로는 금(金), 열두 운세 중에서는 만(滿), 별자리로는 허(虛)에 해당하고, 절기로는 우수(雨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월에는 친구를 만나기 좋지만 종자를 손질하는 일은 좋지 않다고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정월의 다른 날짜 아래를 보면, 목욕하기(沐浴), 공부하기(入學), 제사지내기(祭祀), 결혼하기(婚姻), 외출하기(出行), 병치료(治病), 화장실 만들기(作厠), 묘 옮기기(移葬) 등 생활의 다방면에 좋은 날과 좋지 않은 날을 구분해 놓았다. 이는 지금으로 치면 미신이라고 불릴 법한 명리학(命理學)에 따라 판단된 그날의 운세에 따라 적어놓은 내용이다. 어쨌든 우리 조상이 오랫동안 믿고 따라왔던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미신적이라는 면만 빼면 지금 우리가 현충일에 순국선열의 희생을 기념하고, 복날에 개고기를 먹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 날짜에 어떤 관습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쌍춘년과 황금돼지해의 허풍
 

1594년 1월치 달력. ‘正月大’는 정월이 큰달이라는 뜻이며, ‘建丙寅’은 정월의 사주팔자를 따질 때 정월 의 간지가 병인이라는 뜻이다.


2006년을 ‘100년만의 쌍춘년’이라거나 2007년을 ‘600년만의 황금돼지해’라고 하는 것도 달력과 날짜에 부여된 관습적 의미에 착안해 상업적으로 과장한 결과다. 쌍춘년에 결혼을 하면 백년해로한다고 하고 황금돼지해에 낳은 아이가 재물을 많이 얻고 큰 인물이 된다고 해 결혼이나 출산 붐으로 이어진다. 매년 입춘은 양력으로 2월 4일이다. 음력 2006년은 윤달이 포함돼 양력으로 2006년 1월 29일에서 2007년 2월 17일까지 총 385일이고 음력 1년 안에 입춘이 2번 들어 쌍춘년(雙春年)이 됐다. 음력에서는 ‘19년7윤법’이라고 해 19년에 7번의 윤달을 둔다. 윤달이 있는 해는 음력 1년의 길이가 길어져 어김없이 한해에 입춘이 2번 들게 되니 쌍춘년은 사실 거의 2~3년마다 생기는 셈이다. ‘100년만의 쌍춘년’이라는 소리가 얼마나 과장인지 알 수 있다.

황금돼지해도 마찬가지다. 돼지해는 12년마다 돌아오지만, 그 중에서 간지가 2007년처럼 ‘정해(丁亥)’년인 경우는 60년에 한 번이다. 여기서 정(丁)이 불을 의미하므로 정해(丁亥)는 ‘붉은 돼지’라고 부른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명리학자들도 인정하지만, 이를 더욱 부풀려 600년에 돌아오는 황금돼지라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다. 600년만의 황금돼지해는 명리학 책에도 없다.

사주팔자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사람은 연월일시에 간지의 규칙을 부여해 특정한 시간은 특정한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고 여겨왔는데, 이 관습적인 심리를 이용해 100년만의 쌍춘년이나 600년만의 황금돼지해라고 과장하니 더욱 쉽게 이런 거짓말을 믿는 것이다. 이는 바로 우리나라 사람이 달력에 대해 지니고 있던 관습적 의미가 얼마나 깊은지를 잘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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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전용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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