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해가 밝았다. 돼지는 십이지(十二支)의 마지막 동물로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한 가축 중 하나다. ‘돼지’라는 말은 가끔 사랑스런 호칭으로 쓰기도 하지만, 혐오스러운 욕설로 더 많이 쓴다. “돼지 같은 녀석”이라는 말에 담겨있는 욕심 많고, 더럽고, 미련한 돼지의 이미지는 과연 올바른 것일까. ‘아낌없이 주는 돼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돼지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깨달을 것이다.
Pig Story 1
옛날에 돼지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돼지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소년은 돼지에게 와서 놀았습니다.
돼지는 사랑하는 소년에게 길들여지기 위해 자신을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소년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자신의 삐죽한 송곳니를 감췄고,
소년이 볼을 부빌 때 기분 좋도록 억센 털을 부드럽게 했습니다.
소년은 돼지를 무척 사랑했고… 돼지는 행복했습니다.
사람들이 돼지를 가축으로 키우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약 8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의 조상이 늑대인 것처럼 돼지의 조상은 멧돼지다. 맛있는 살코기와 기름을 가진 멧돼지는 신석기인에게 귀중한 식량이었다. 그러다가 이들은 멧돼지가 가축이 되기에 좋은 장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멧돼지는 잡식성이어서 무엇이든 잘 먹고 야생에서도 20~30마리가 함께 살 정도로 어울려 사는 습성이 있어 우리 안에 여러 마리를 가둬놓고 키울 수 있다. 성장속도가 빨라 생후 1년만 지나면 새끼를 가질 수 있고 자궁이 길어 한번에 5~8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더 좋은 것은 기후에 대한 적응력이 좋아 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장점 때문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지금부터 약 6500년 전, 이집트는 약 5000년 전, 중국은 약 4500년 전부터 돼지를 기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유입되기 시작했다. 동유럽과 북아시아의 슬라브족처럼 농경을 하며 서서히 이주한 민족이 돼지 사육을 널리 퍼뜨렸다.
돼지의 조상인 멧돼지는 매우 강하고 영리한 동물이다. ‘저돌(猪突)적이다’라는 말 때문인지 멧돼지가 미련하게 돌진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멧돼지는 삐죽하게 솟은 송곳니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싸움꾼이다. 머리를 숙였다가 상대의 급소를 향해 올려쳐 길고 깊은 치명상을 입힌다. 맛있는 살코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호랑이 같은 대형 맹수 이외에 멧돼지의 천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비록 멧돼지의 강인함은 많이 희석됐지만 멧돼지의 후손인 돼지도 이런 습성을 물려받았다.
흔히 돼지가 더럽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돼지우리를 잘못 설계했기 때문이다. 돼지는 땀샘이 거의 발달하지 않아 체내의 수분을 거의 오줌으로 배설하기 때문에 다른 동물보다 오줌양이 2배나 많다. 멧돼지가 그러하듯 돼지도 배설장소를 따로 만들어주면 그곳에서만 배설한다. 배설장소가 없으니 돼지는 오줌바닥에서 뒹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축 중에 소나 닭보다 돼지가 깨끗한 것을 훨씬 좋아한다.
사람이 다루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일까. 돼지에게는 특이한 습성이 있다. 전남 광주 우치동물원의 최종욱 수의사는 “돼지는 꼬리를 잡으면 앞으로 돌진하고 코를 꿰서 당기면 뒷걸음친다”며 “능숙한 수의사는 벽을 등지고 돼지 코를 잡은 뒤 치료한다”고 설명했다.
Pig Story 2
하지만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소년도 점점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돼지를 찾아갔을 때 돼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나랑 같이 떡갈나무 숲에서 뒹굴면서 즐겁게 놀자.”
“난 너랑 놀기에는 다 커 버렸는걸. 난 배가 고프고 돈이 필요해.”
“미안하지만 내겐 돈이 없는데.” 돼지가 말했습니다.
“대신 내 살코기를 조금 가져다 배를 채우고, 남는 것은 도회지에서 팔지 그래.”
사람들이 돼지를 사육한 이유는 단연 살코기와 기름을 얻기 위해서다. 돼지고기는 다른 고기에 비해 섬유질이 가늘고 연해 씹기 좋다. 쇠고기보다 철, 인, 비타민B1이 10배 많고, 필수지방산인 리놀레산도 5배나 많아 건강에 좋다. 특히 겨울에 돼지는 체내에 비타민B1을 다른 계절보다 20% 이상 더 축적한다. 따라서 돼지고기에도 과일처럼 ‘제철’이 있다면 겨울이 제철인 셈이다.
돼지고기는 쇠고기, 닭고기와 함께 사람이 가장 많이 먹는 육류로 다양한 요리법이 있다. 돼지고기가 주식이었던 유럽인은 돼지고기를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햄, 베이컨, 소시지 같은 저장식품을 개발했다. 이들은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인 뒤 참나무나 벚나무로 훈제해 보존성을 높였다.
돼지고기 저장식품 중에 가장 값비싼 것은 생햄이다. 생햄은 이름대로 열을 전혀 가하지 않고 만든 햄이다. 스페인의 최고급 생햄 ‘하몽 이베리코’는 떡갈나무 숲에서 도토리를 먹고 자란 16개월 된 흑돼지의 뒷다리로 만든다. 소금 이외에 인공적인 첨가물은 전혀 넣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는 저장고에서 30개월 동안 숙성시켜 만든다. 홍수가 나면 대피시켜야 할 순서로 첫째가 하몽 이베리코, 둘째가 여자와 어린아이, 셋째가 남자라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생햄을 만드는 과정에는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돼지고기 요리는 삼겹살 구이다. 사실 삼겹살이 국민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식당에서 처음 판매한 것이 1970년대말이라고 하니 삼겹살 구이의 역사는 채 30년이 안된다.
삼겹살의 인기에 힘입은 탓일까. 우리나라 일인당 돼지고기 섭취량은 미국, 호주, 일본에 이어 4위다. 한국육류유통수출입협회의 2005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 한명이 일년 동안 먹는 돼지고기는 17.4kg으로 쇠고기(6.6kg)와 닭고기(7.4kg)보다 많다. 전통적으로 독일, 프랑스, 브라질, 멕시코 등의 나라가 돼지고기를 많이 먹는다. 반면 이슬람교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Pig Story 3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서 돼지는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절뚝거리며 돌아왔습니다.
돼지는 기쁨에 넘쳐 몸을 흔들며 말했습니다.
“얘야, 숲에서 나랑 뛰면서 즐겁게 지내자.”
“난 다리를 다쳐서 뛸 수가 없어.” 소년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내게 아픈 다리를 고칠 능력은 없는데.” 돼지가 말했습니다.
“대신 내 뼈를 가져다 쓰지 그래.”
사람들이 먹는 용도가 아닌 돼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 시작은 당뇨병에 걸린 사람에게 필요한 인슐린을 돼지로부터 추출한 일이다. 불과 100년 전만해도 당뇨병은 불치의 병이었다. 당시 당뇨병에 걸린 환자는 특별한 치료법이 없어 갈수록 쇠약해지고 끝내 혼수상태에 빠져 죽었다.
1921년 캐나다 토론토대 외과의사 프레데릭 반팅이 개에서 인슐린을 추출하면서 동물에서 추출한 인슐린을 사람에게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뒤 당뇨병 환자를 위한 인슐린의 주된 공급처로 돼지가 이용됐다. 음식에 불과했던 돼지가 병을 치료하는데 기여하기 시작한 셈이다.
최근에 사람들은 그동안 등한시했던 돼지 뼈를 이용할 방법도 찾기 시작했다. 작년 10월 인제대 의용공학과 신정욱, 김영곤 교수는 돼지 뼈를 특수처리해 인공뼈를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개발된 인공뼈 ‘TS-GBB’는 사람의 뼈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아니고 수술 등으로 손실된 뼈를 보충하는 역할이다. ‘TS-GBB’는 인간의 뼈와 유사한 돼지의 해면골 뼈에서 유기성분은 없애고 무기성분만 남겼다.
외과수술을 할 때 뼈를 보충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보통 수술 당사자의 골반뼈를 떼어다 이식한다. 이런 수술을 여러 번 반복하면 골반뼈가 부족하게 된다. 또 척추 고정 수술을 하거나 부러진 뼈가 아물지 못하는 질환에 걸리면 부족한 뼈를 보충해야 한다. 이전까지는 죽은 사람의 뼈를 가공했지만 감염의 위험과 비싼 가격이 문제였다. 김영곤 교수는 “아직 인간의 뼈를 직접 대체할 수준은 아니지만 돼지 뼈가 매우 유용한 의학용 재료임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Pig Story 4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돌아오자 돼지는 하도 기뻐서 거의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 온, 얘야.” 돼지는 속삭였습니다. “와서 놀자.”
“난 힘이 없어서 너와 놀 수 없어.” 소년이 말했습니다.
“내 약해진 심장 때문에 얼마 못살 거라고 의사가 말하더군.”
“그래…. 그럼 내 장기를 가져다 네 망가진 심장을 대신하렴. 그리고 이리로 와서 잠시 쉬도록 해”.
소년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돼지는 행복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사람에게 필요한 단백질을 만드는 돼지를 탄생시켰다. 1999년 5월 농업진흥청이 개발한 형질전환 돼지 ‘새롬이’는 빈혈치료제 ‘에리스로포이에틴’(EPO, Erythropoietin)을 만드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 EPO는 1g당 가격이 5억원에 달하는 고가 의약품으로, 새롬이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암퇘지의 젖 10L에서 EPO 1g을 얻을 수 있다. 수정란에 빈혈치료제를 만드는 유전자를 주입하는 방법을 사용해 만든 새롬이는 작년 6월 16일 민간기업 PMG바이오파밍에 특허권이 이전됐다. 현재 새롬이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후손들은 4세대까지 약 50마리로 늘어난 상태다.
또 사람들은 돼지의 장기로 손상된 인체 기관을 대체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가축 중에서 돼지가 사람과 가장 비슷한 덩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실제 돼지의 심장, 췌장 등의 장기는 사람의 장기와 크기가 거의 같다.
문제는 돼지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할 때 생기는 면역거부반응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다. 이종(異種)간 장기 이식에서 나타나는 초급성 면역거부반응은 장기이식한 뒤 24시간 안에 일어나 이식한 조직을 죽게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면역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아예 제거한 돼지를 만든다.
작년 하버드대 이식생물학연구센터는 면역거부를 일으키는 유전자(α-Gal)를 제거한 돼지의 심장을 원숭이에 이식해 179일 동안 생존시키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이종간 장기이식에서 나온 최고 기록이다. 연구팀은 돼지 신장을 원숭이에 이식해 83일간 생존시킨 기록도 갖고 있다. 충남대 형질전환복제돼지연구센터 박창식 소장은 “기술적, 윤리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수없이 많지만 이종간 장기 이식은 언젠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종간 장기 이식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도 만만치 않다. 서울대 수의학과 우희종 교수는 “면역은 생물의 생존 시스템”이라며 “이종간 장기 이식은 생물의 개체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사람과 함께한 그 순간부터 돼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사람에게 주었다. 돼지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본다면 돼지는 올 한해 더 행복해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