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작은 악기는 뭘까. ‘나노하프’(nanoharp)다. 크기가 불과 적혈구 하나 정도란다. 1999년 미국 코넬대 응용 및 공학 물리학과 해롤드 크레이그헤드 교수팀이 나노기술로 개발했다.
비록 현 하나의 지름이 50nm(나노미터, 1nm=10억분의 1m)라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을 만큼 가늘고, 진동수가 380MHz(메가헤르츠, 1MHz=100만Hz)라 귀로는 결코 들을 수 없을 만큼 높은 가락이 나오지만 나노하프는 음악을 연주하는 진짜 악기다. ‘악기는 음악의 과학’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음악은 수학, 악기는 과학
굳이 나노기술처럼 첨단 과학을 끄집어내지 않아도 ‘악기=과학’이라는 공식은 쉽게 성립한다. 보이지 않는 악기의 소리를 볼 수 있게 만든 것이 과학이기 때문이다. 소리를 스펙트럼으로 분석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소리는 물리적으로 공기 중에서 퍼져나가는 진동이다. 진동에는 세기의 차이가 있다. 이 세기의 차이가 곧 압력의 변화고, 이 변화가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일어날 때 주기가 된다. 이런 물리적인 소리를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이 작곡이며, 작품을 다양한 색깔로 바꾸는 도구가 악기이자, 악기를 통해 혼을 불어 넣는 사람이 연주자인 셈이다.
역사적으로도 음악과 과학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13세기 유럽 대학에서는 문법, 수사학, 논리학을 ‘3학’으로, 산술, 기하, 천문, 음악을 ‘4과’로 정하고 이들을 통틀어 ‘자유 7학과’라고 불렀다.
당시 음악이 산술과 같은 범주에 속했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음악은 소리를 소재로 삼았을 뿐 박자나 선율, 화성(harmony), 음색 등을 수학적인 관계로 파악하는 ‘과학’이었다.
‘만물을 지배하는 것은 수’라고 주장했던 고대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의 이론에 따라 중세에는 5음 체계를 기본으로 삼고 고대 음악의 종교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수학적인 아름다움을 모체로 해 여러 음을 동시에 내는 다성음악의 발달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16세기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시대가 열렸다. 그는 음과 음을 조합할 때 평균율을 사용하는 등 대단히 수학적인 작곡가였다.
바흐 이후 악기의 발달이 혁명적으로 이뤄졌다. 예를 들어 작은 소리를 내는 쳄발로나 하프시코드에 이어 피아노포르테(지금의 피아노)가 등장하면서 건반악기가 완성됐다.
깎고 닦고 조이고
현악기에서는 비올(viol)족의 악기가 진화해 과학적으로도 심미적으로도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한 바이올린이 등장했다. 명기(名器)라고 불리는 스트라디바리우스, 아마티, 과르네리도 이때 만들어졌다.
실제로 바이올린은 겉보기에 간단하지만 70여개의 부분이 정교한 계산 결과에 따라 조합된 매우 과학적인 악기다. 두께가 3~6mm인 얇은 판자 2개를 맞이었을 뿐인데 증폭기(마이크) 없이도 넓은 공간에서 소리를 전달하는데 문제가 없다. 때문에 대부분의 악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성능이 끊임없이 개선되고 있는 반면 바이올린은 300년이 지난 지금도 오히려 연구의 대상이다.
한 예로 17세기에 제작된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목재의 밀도가 높아 풍부하고 다양한 음색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 2003년에야 밝혀졌다.
3년 전 필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계절 학기에 바이올린을 직접 제작하는 수업을 시작했다. 0.1mm의 작은 차이로도 소리가 달라질 만큼 바이올린이 과학적인 악기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장인을 위해 바이올린 제작을 가르치는 학교는 있지만 대학에서 교양 수업으로 가르치는 경우는 세계에서 처음이었다.
목표는 소리가 나는 원리를 악기라는 기계적인 도구를 통해서 이해하고, 이를 다시 음악으로 체득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절반가량 완성된 바이올린을 해체한 다음 각 부분을 면밀히 관찰했다. 손가락 한마디 크기 정도인 작은 대패로 나무판을 깎아 두께를 조절하고, 17세기와 동일한 방식으로 천연 풀을 칠하고 조여 앞뒤 판을 붙였다.
판을 붙이기 전에는 좋은 소리를 만들기 위해 앞판의 소리를 모아주는 베이스 바의 모양도 다듬었다.
바이올린의 형태가 어느 정도 완성된 다음에는 칠을 했다. 알코올에 천연색을 섞고 바니시를 넣은 도료를 써야 한다. 보통 20~30번 칠해야 하기 때문에 칠하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과정이다.
칠이 마른 뒤에는 줄과 액세서리를 달고 ‘사운드 포스트’를 세워야 한다. 사운드 포스트는 지름 5~6mm, 길이는 5cm 정도인 막대기인데, ‘소리의 영혼’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바이올린이 완성되면 무향실(소리가 전혀 반사되지 않도록 특수 설계된 방)에 들어가 소리의 스펙트럼을 분석해야 한다. 좋은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때 스펙트럼 분석 결과를 귀로 들은 결과와 비교하면 재미있다. 사람은 소리를 판단할 때 시각적인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색이나 모양이 뛰어난 바이올린에 점수를 더 준다는 뜻이다. 그래서 스펙트럼으로 분석한 결과와 귀로 분석한 결과가 종종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수업이 끝날 즈음이면 학생들은 과학과 음악이라는 두 분야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느 음악인보다 음악을 잘 이해하고 애정을 갖게 된다.
연주회에 등장한 자작 바이올린
그 동안 수업을 통해 완성된 바이올린만 15대다. 제작비에 비해 모두 상당히 좋은 소리를 낸다. 2004년 바이올린을 그냥 묵혀두기 아까워 ‘제1회 KAIST 뮤직 페스티벌’을 열었다. KAIST의 이공계 학생들에게는 ‘이 바이올린이야말로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정서적인 ‘장난감’이 아닐까’하는 생각에서였다.
뮤직 페스티벌에는 학생들이 직접 제작한 바이올린을 선보였다. 앰프와 스피커도 전자공학과 조규형 교수와 산업디자인학과 졸업생인 김형민 씨가 설계한 것을 사용했다.
약 60명의 연주자 중 객원 연주자 2명을 빼고 모두 바이올린을 제작한 학생들과 음악동아리 학생들이 연주를 맡았다. 반응은 뜨거웠다. 단순히 과학과 음악이 만났다기보다는 양쪽이 같은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볼 수 없는 소리를 형상화하고 끊임없이 갈구하는 인간의 욕망에는 분명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 중의 하나가 악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아닐까.
오는 9월 10일 KAIST에서는 제2회 뮤직 페스티벌인 ‘록클래식’(rocklassic)이 열릴 예정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학생들의 구슬땀이 녹아든 바이올린이 등장한다. 록클래식에서 또 한번 과학과 음악의 만남에 흥분하며 젊음과 열정에 몸을 불사를 것이다.
다성음악 : 독립된 선율을 가지는 둘 이상의 성부로 이뤄진 음악을 말한다. 폴리포니(polyphony)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