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실 분 계십니까?”
“땅, 땅…, 버스~, 오라이~!”
1985년 시민자율버스가 등장하면서 사라진 사람들이 있다. 흰 장갑에 조그만 가방. 머리에는 고무줄 끈이 달린 찐빵모자를 쓰고 토큰으로 창문을 톡톡 두드리던 버스 안내양. 하지만 그들은 운전기사를 보조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말만 잘 하면 공짜로도 태워주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니….
유전자는 자신의 염기서열대로 아미노산을 조합해 단백질을 만들어 낸다. 이때 아미노산이라는 손님을 실어 나르는 버스 역할을 하는 것이 tRNA다. 하지만 버스가 준비되었다고 아미노산이 무조건 타는 것이 아니다. 버스 안내양의 안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등장한 버스 안내양이 단백질합성효소(ARS)다.
사실 과학자들은 단백질합성효소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그저 아미노산을 버스에 태우는 안내양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심을 끌지 못한 단백질합성효소의 마음을 누가 알아주랴. 하지만 서울대 약대 김성훈 교수는 이 단백질합성효소에게서 막강한 능력을 발견했다.
운전기사와 안내양의 관계
“우주에는 수많은 천체가 있어요. 그들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절묘한 조화를 이루지요. 마치 무슨 끈이라도 연결된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실제로 가서 보면 그 끈은 보이지 않죠. 생명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단백질합성효소를 비롯한 여러 물질들이 생명이라는 우주 속에서 어떤 조화를 이루며 서로 연결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김 교수는 결국 ‘단백질합성효소 네트워크’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버스 안내양으로만 보았던 단백질합성효소가 주변의 다른 물질과 함께 무슨 일을 벌이는 현장을 감지한 것이다.
단백질합성효소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단백질인 P18이 뭔가 의심쩍었다. 김 교수는 P18을 만드는 유전자가 완전히 손상된 쥐를 수정시켰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배아가 죽어버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유전자가 반만 손상된 쥐를 관찰해 보니 일부는 죽고 일부는 살아남는다는 점도 알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살아남은 쥐들에게서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 그들 몸에 백혈병을 비롯한 각종 암이 발생한 것이다.
P18이 뭔가 특별한 기능을 한다는 의미였다. 김 교수의 끈질긴 추적에 P18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실제 암에 걸린 환자들을 살펴보니 P18을 만드는 유전자가 손상돼 있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몸은 손상된 유전자를 수선하는 능력이 있어요. 하지만 이 능력이 떨어지면 손상된 유전자들이 쌓여 암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죠. 쥐의 유전자 손상실험을 통해 P18이 유전자를 수선하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할 수 있게 되었죠.그런 의심은 연구를 가속시켰어요. 그래서 새로운 사실을 밝혀 냈지요.”
김 교수의 추적은 계속 됐고 마침내 하나의 결실을 맺었다. 단백질합성효소에 붙어 있던 P18이라는 버스 안내양이 암 억제 기능을 하는 대표적인 단백질인 운전기사 P53을 뒤에서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김 교수는 이 내용을 2005년 1월 세포생물학 권위지인 ‘셀’에 발표했다.
수상한 P38, P43
‘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것은 P18뿐만 아니다. 김 교수는 이미 낌새가 이상한 P38과 P43도 추적해 그 정체를 밝혀 낸 전적이 있다.
P38 유전자가 자신의 염기서열 중 일부가 떨어져 나간 불량 P38을 만들어내면, P38은 불량 P38을 잡아먹고 사라져 버린다. P38이 없어지면 폐 세포가 과대 증식해서 죽어버린다. 폐 세포가 죽는다는 의미는 폐암과 관련됐다는 얘기다. 내용은 2003년 ‘네이처 제네틱스’에 소개됐다.
P43이라는 녀석도 마찬가지다.
암에 걸린 쥐에게 P43을 투여하는 실험을 했다. 그냥 놔둔 쥐는 20여일 뒤 암 덩어리가 커졌지만 P43을 투여한 쥐는 암 증식을 거의 멈췄다.
“위암에 걸린 쥐에 P43 단백질을 주사했더니 아무 것도 투여하지 않은 쥐보다 생존율이 2.5배나 올라갔어요. 그리고 다시 항암제 택솔과 함께 투여했더니 생존율이 4배까지 올라갔지요.”
추적의 성과는 컸다. P43은 암 세포의 혈관 형성을 막아 암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덕분에 제약회사와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중국 제약회사로 기술 수출이 이어졌고 국내 제약회사와는 또 다른 신약개발이 시작 됐다.
또 새로운 상처치료제의 개발도 가능해졌다. P43을 피부 섬유세포에 처리하자 세포 증식이 증가하며 피부에 탄력을 주는 콜라겐이 합성됐다. 조직의 재생을 촉진한다는 의미였다. 이런 P43의 기능은 화상, 욕창 같은 피부 재생용 치료제를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또 다른 추적의 성과
최근 김 교수는 ‘새로운 염증유발물질 발견’이라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추적 대상은 단백질합성효소 중 하나인 KRS. 암과 같은 난치병의 발생과 관련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연구했다. 결국 KRS가 유방암, 전립선암 등의 세포에서 분비돼 면역세포를 활성화시키고 강력한 염증을 일으키는 물질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KRS는 유방암 등의 세포에서 대량 생성된다. 세포에서 분비되는 KRS의 농도를 측정하면 암이나 면역 질환을 진단할 수 있는 표지 물질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김 교수의 연구는 미국 국립과학원회보에 주요논문으로 게재됐다.
김 교수의 연구는 그가 택한 ‘네트워크’라는 단어처럼 최근 연구 결과들을 속속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결과들은 생명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궁극적인 목표에서 나온 작은 결실일 뿐이다. 단백질합성효소 네트워크 연구를 통해 P18에서 KRS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성과가 많았다. 하지만 김 교수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런 네트워크 속에서 생명의 본질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벽 없는 실험실을 만드는 생명공학의 건축가 -김성훈 교수
과학기술부 창의적연구진흥사업단에 선정됐던 1998년. 그때 김 교수는 자신의 연구가 ‘3D’를 통해 전개될 것을 예견했다. 연구 자체가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것이란 뜻인가? 아니면 Display, Design, DRAM을 뜻하는 새로운 3D의 의미?
“창의연구단은 9년 계획으로 진행됩니다. 처음 3년은 ‘Discovery’ 단계로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제겐 노력이 많이 필요했던 시기였지요. 그 다음은 ‘Development’ 단계로 정해진 방향에 따라 진보를 거듭하는 단계입니다. 마지막은 ‘Drug’로 신약개발 단계입니다.”
김 교수가 말하는 3D는 정말 3D(Three dimension) 현실로 다가온다. 단백질합성효소에 네트워크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해 암 억제 단백질 P18의 새로운 기능 발견이라는 진보를 거듭해 왔고, 이제 신약개발의 길에 서 있다.
“네트워크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신약개발에 이르기까지는 다양한 생각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처음 제안을 했던 97, 98년에는 생물을 알면서 수학, 물리에 정통한 사람을 찾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저도 마찬가지였구요.”
연구단에는 바이오시스템 융합연구팀(iRGB)이라는 이름의 팀이 있다. 통계물리학, 컴퓨터공학, 생물정보학, 생명과학을 전공한 네 사람이 모인 약대의 외인구단이다.
“지금 바이오시스템 융합연구팀이 하고 있는 것은 신약개발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좀 더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지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개발된 모든 세포 내 네트워크에 대한 정보를 모아 신약개발에 즉각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를 구축하는 것이죠.”
이들의 역할은 유전자 서열, 단백질 상호작용, 약물구조, 약물 타깃 간 상호작용 정보 등을 통합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이런 데이터베이스는 궁극적으로 신약개발 기간을 단축시켜 줄 것이다.
요즘 김 교수는 제약회사의 사장들과 자주 만난다. 3D의 마지막 단계가 이미 시작돼 지금은 그 결과물을 손에 쥐려고 발로 뛰고 있는 것이다.
항상 ‘벽 없는 실험실’을 강조하는 김 교수. 내 것만을 위해 꼭꼭 자물쇠를 걸어두는 것이 아니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함께 가자는 뜻이다. 현재 미국 최고 연구기관이라고 손꼽은 스크립스연구소에도 현지 연구실이 있고, 미국, 호주, 유럽, 이스라엘 등 여러 바이오텍 연구소들과도 공동 연구 네트워크가 마련돼 있다.
생명이라는 커다란 비밀을 찾아 벽 없는 실험실을 만든 생명공학의 건축가 김교수. 그가 곧 신약개발이라는 3번째 벽을 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