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 끝으로 경복궁이 보인다. 청와대는 온데간데 없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입헌군주국.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 아니라 황제폐하다. 드라마 궁은 ‘좌우당간’ 이렇게 시작된다. 영국에 윌리엄 왕자가 있다면 우리에겐 ‘이신’ 황태자가 있고, 버킹검 궁이 영국 왕실의 상징이라면 우리에겐 경복궁이 있다. 주인없이 늙어가는 지금의 경복궁이 아니다. 드라마 속에 그려진 경복궁은 1867년 흥선 대원군이 복원한 경복궁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아름답다.
드라마 한 회가 영화 한 편
드라마의 주요 배경이 경복궁이지만 제작팀은 단 한 컷도 경복궁에서 촬영하지 못했다. 정통 사극이 아니어서 문화재청이 촬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태조 왕건’처럼 대형 세트장을 새로 지은 것도 아니다. 허황된 순정만화를 퓨전 드라마로 재현하기까지 제작팀은 컴퓨터 그래픽(CG)으로 경복궁의 기왓장 하나까지 모두 만들어냈다.
현재 남아있는 경복궁은 조선조 말 고종황제가 거주할 때 크기의 15% 정도에 불과하다. 때문에 제작팀은 원형에 가까운 경복궁 영상을 만들기 위해 전각 200개를 CG로 복원했다. 이를 위해 드라마 촬영 전 3개월간 역사학자 4명과 함께 고증 절차도 밟았다.
드라마 궁의 시각효과를 책임지고 있는 민병천 감독은 “좀더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기 위해 고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그는 먼저 경복궁 내부의 전각 배치를 컴퓨터 화면에서 조정했다. 우리나라 궁궐은 높이가 비슷비슷해 정면에서 보면 대문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물에 가려진 전각들을 위로 추켜세우자 경복궁이 마치 중국 황궁처럼 보였다. 몇번의 작업을 되풀이한 끝에 제작팀은 위압적이지 않으면서도 웅장하고 단아한 드라마 속의 경복궁을 만들어냈다.
제작팀은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전각 지붕, 담장 하나하나를 3D 영상으로 제작했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경복궁의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다. 처음 궁에 들어가는 황태자비 ‘채경’ 앞에서 당당한 위용을 자랑했던 경복궁은 모두 제작팀이 따로 제작한 32개의 3D 전각 조각들을 엮어서 만들었다.
TV화면에는 기껏해야 5cm 정도로 보이는 3D 영상 하나의 실제 크기는 무려 15m다. 용량이 워낙 커서 전각 하나를 1도 움직이는 데만 4분이 걸린다. 경복궁 전체 영상은 한 컴퓨터에 다 담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CG가 드라마에 사용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E. R.’ ‘24’ 같은 외국 드라마는 화려한 CG를 활용해 마치 영화 한 편 같은 드라마 한 회를 제작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드라마에서 스튜디오에 세트장을 짓는 대신 CG를 드라마 스튜디오 삼아 촬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설의 고향’에서 사람이 구미호로 변하는 장면에 CG가 쓰일 때만 해도 CG는 ‘모여라 꿈동산’이라고 조롱받았다. 실체감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CG는 실사와 구분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섬세하다.
민 감독은 최고의 CG 장면으로 황태자부부의 가례장면을 꼽았다. 그는 “이 장면이 CG인 줄은 시청자들도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례장면에는 실사가 거의 없다. 촬영은 MBC방송국 앞길에서 단출하게 이뤄졌지만 최종 방송분에서는 그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다.
배경은 태평로로 옮겨졌고, 사람 한 명 없던 거리에는 10만 명이 넘은 인파가 몰렸다. 제작진은 환호하는 관중들을 블루스크린 안에서 촬영한 다음 가례장면 속으로 옮겨 심는 크로마키 기법을 사용했다. 가례행렬이 지나갈 때 바로 옆에서 환호하는 사람들 또한 이렇게 만들어졌다.
연기자 얼굴의 잡티까지 잡아내는 HDTV의 섬세함 때문에 드라마 CG 작업이 녹록치만은 않았다. 작은 부분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 감독은 “영상에는 만족하지만 카메라 움직임이 단조로운 것이 옥의 티”라고 지적했다.
‘궁’ 두 번째 시즌에는 경복궁 미니어처를 활용할 예정이다. 미니어처를 이용하면 위에서 경복궁 전체를 비추는 장면이나 경복궁 내부를 가로지르는 장면 촬영이 가능해져 더욱 생동감 있는 화면을 연출할 수 있다.
황태자 부부의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 못지않게 재창조된 경복궁을 챙겨보는 재미도 쏠쏠한 것이 드라마 궁의 또 다른 인기비결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