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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디자인한다

하트모양 장미꽃 한입 크기 배춧잎

어느 날 소를 끌고 가던 잭은 길에서 한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잭에게 콩과 소를 맞바꾸자고 한다. 고민 끝에 잭은 콩을 갖기로 한다. 집에 돌아와 앞마당에 콩을 심은 잭. 다음날 아침 잭이 눈을 떠보니 콩나무가 하늘 끝까지 자랐다. 콩나무를 타고 하늘나라에 도착한 잭은 황금계란을 낳는 닭과 금주머니를 갖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노인이 잭에게 준 것은 ‘요술콩’이었던 것이다.

영국 민화인 ‘잭과 콩나무’는 누구나 어릴 때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유명한 이야기다. 잭의 요술콩은 식물을 연구하는 필자에게도 매우 구미가 당기는 소재다. 요술콩처럼 빨리 자라는 식물을 만들 수는 없을까. 참살이가 각광받는 요즘 아예 집 모양처럼 생긴 식물을 만들어 살아 숨쉬는 집에서 사는 것은 어떨까.
 

괴테의 과학 연구를 집대성한 루돌프 슈타이너의 '자연의 공개된 비밀'. 1883년에 출판됐다. 표지의 그림은 괴테가 직접 그린 해바라기의 세밀화다.


잎은 植物之大本

이런 상상력에서 시작된 연구가 ‘식물 분자 생체디자인’(Plant Molecular Biodesign)이다. 식물 분자 생체디자인은 식물의 발생인자와 생체기능 조절인자를 이용해 말 그대로 새로운 식물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애기장대의 유전자를 조작하면 길쭉한 꽃잎과 뚱뚱한 잎 등 여러 모양의 애기장대를 만들 수 있다. 자신이 머리로 상상한 식물을 직접 설계해 ‘맞춤형 식물’을 만드는 셈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아마도 식물의 잎 모양과 종류가 너무나 다양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꽃잎의 모양과 색깔도 마찬가지다. 꽃잎과 잎을 별개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꽃잎은 잎이 변형돼 진화한 기관이다. 결국 잎 모양과 발생 분화 과정을 이해하면 식물 전체의 형태가 형성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다양성과 진화도 이해할 수 있다. 분자 생체디자인은 이런 연구를 토대로 발전해왔다.

과학자들이 식물의 모양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한 지는 오래됐다. 예를 들어 18세기 독일의 위대한 문호인 괴테는 유명한 식물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1790년 펴낸 ‘식물변태론’(Metamorphose der Pflanzen)에 들어있는 식물 삽화는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게 묘사된 것으로 유명하다.

괴테는 형태학을 연구하며 “모든 것은 잎이며, 이 간단한 형태에서 아주 다양한 것이 만들어 진다”고 썼다. 괴테는 꽃술과 꽃밥 대신 꽃잎을 피우는 겹피기 식물을 예로 들어 직접 스케치했다. 잎이 다양한 형태로 변화할 수 있는 기본기관이라는 사실을 괴테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줄기에서 우산이 피었나. 잎자루를 잘라 펼치면 일회용 우산을 대신할 근사한 우산이 된다. 벽지 대신 살아있는 잎을 벽에 바른다면 아토피 걱정도 사라진다. 아예 집 모양의 나무를 만들어버리자. 고정관념만 버리면 식물 생체디자인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ABC 모델에게 물어봐

식물학자로서 괴테의 업적은 일반적인 의미의 과학적인 연구보다는 식물연구를 통한 자기 철학의 표출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초부터 애기장대를 이용한 분자유전학적인 연구를 통해 괴테가 언급했던 꽃잎과 꽃술의 겹피기에 대한 설명이나 꽃잎이 잎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어느 정도 옳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ABC 모델’이다.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의 메이에로비츠 교수팀은 ABC 모델을 이용해 겹꽃이 생기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설명에 따르면 꽃받침과 꽃잎, 수술과 암술은 제각기 만들어져야 할 곳이 유전자군에 의해 조절되는데, 이 유전자들이 변이를 일으키면 수술과 암술대신 꽃잎이 만들어져서 겹꽃의 구조를 갖게 된다.

ABC 모델은 식물학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 석사과정 학생이었던 필자도 이 연구에 흥미를 갖게 돼 식물의 모양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시절 길을 지나다가 모퉁이에서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일본에서는 무궁화를 잘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겹꽃 구조였다. 이 때는 무심코 지나쳤지만 이 무궁화 역시 ABC 모델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ABC 모델은 식물에서 최초의 생체디자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화인 무궁화. 홑꽃인 경우 꽃잎 5개가 밑동에서 서로 붙어 있다.


한 입에 쏘~ 옥 꼬마 배춧잎

잎 모양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종류가 매우 다양해서 복잡해 보인다. 하지만 ‘축’ 개념을 도입하면 잎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축을 중심으로 잎의 좌우, 윗면과 아랫면(배복성), 편평함 등을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이 축이 어떤 식으로 조절되는지 알아내면 잎의 모양을 인위적으로 바꿀 수 있다.

한 예로 잎의 윗면과 아랫면의 구분을 없앤다면 어떤 모양을 만들 수 있을까? 답은 연필과 같이 가늘고 긴 원통형이다. 둥근 연필을 굴리면 위로 올라오는 곳이 윗면이 되기 때문에 방향성이 없어진다.

잎의 좌우대칭을 없애면? 1996년 이스라엘의 한 연구팀은 좌우대칭인 토마토 잎의 유전자를 조작해 파슬리처럼 좌우대칭이 아닌 잎으로 변형시키는데 성공했다.

필자는 잎의 길이와 폭을 미묘하게 조절하면 잎 모양이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해 폭과 길이를 조절하는 유전자들을 찾아내고 그 기능을 밝혀왔다. ROT3 유전자는 브라시노스테로이드라는 식물 성장 호르몬의 활성을 조절해 잎의 길이에 영향을 미친다. AN은 세포골격을 조절해 세포의 뼈대를 변화시켜 잎의 폭을 조절한다. 재미있게도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에도 이와 유사한 유전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 유전자는 진화 초기부터 공유된 것임이 밝혀졌다.

필자의 연구팀은 잎의 길이를 조절하는 유전자를 꽃잎에 발현시키는 방법을 이용해 꽃잎의 길이가 길어진 식물을 만드는 생체디자인을 세계 최초로 성공시켰다. 또 잎의 모양이 같더라도 세포의 크기와 세포의 수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최근 밝혀냈다. 예를 들어 잎의 모양이 비슷한 식물 A, B가 있다고 하자. 이 때 잎 A에는 40마이크로미터(㎛)짜리 세포가 100개 있고, B에는 400㎛짜리 세포가 10개 있다. 이 경우 잎의 외형은 똑같아 보이지만 내부 구성은 완전히 다르다. 외형이 같은 집을 짓더라도 벽돌 수를 늘리느냐 벽돌 크기를 키우느냐에 따라 내부 구성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경우다.

현재 연구팀은 식물 생체디자인을 식품에 활용하는 방법을 고안 중이다. 예를 들어 들깨 잎의 크기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시킬 수 있다면 수확할 때 농민의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한 입에 쏙 들어가는 배춧잎을 개발한다면 이 역시 새로운 농업 상품이 될 수 있다. 잎의 결 구성을 조절해 씹히는 질감까지 높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잎 모양을 조절할 수 있다면 비단 토끼 모양으로 자라는 나무 뿐이랴.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파란 장미의 매력에 빠져봅시다

일본의 위스키 제조회사인 산토리(Suntory)와 호주의 벤처회사인 플로리진(Florigene)은 1990년부터 파란 장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파란 장미는 생체디자인의 일종이다. 현재 파란 장미 프로젝트는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어 2007년쯤에는 시판이 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파란 장미 프로젝트의 성공은 식물을 연구하는 생명공학자의 미래라고 할 만큼 중요하고 그 영향력이 크다. 파란 장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파란 장미가 성공한다는 것은 식물생명공학의 앞날이 밝다는 말과 같다.

산토리에서는 이미 파란 카네이션을 개발해 몇 가지 품종을 일본과 미국, 유럽에서 판매하고 있다. 필자는 박사학위 수여식 때 지도교수였던 도쿄대 분자세포생물학연구소의 우치외야 교수에게서 푸른 카네이션 20송이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푸른 카네이션이 시판되기 전이었는데, 한 송이 가격은 500엔(약 5000원)으로 책정돼 있었다. 비싼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그렇게 의미 있고 값진 꽃다발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혹시 모른다. 10년쯤 뒤에는 연인에게서 달콤한 사랑 고백과 함께 하트 모양의 장미꽃을 선물 받을지도. 예고 없이 소나기라도 뿌리는 날에는 꽃집에서 우산 모양의 잎 하나만 사면 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거의 없다. 다행히 최근 국내 젊은 과학자들이 식물의 발달분화에 관한 연구회를 조직해 생체디자인과 관련된 연구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식물 생체디자인은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아주 높은 분야다. 조만간 국내에서도 젊고 유능한 과학자들이 많이 나타나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여줄 것이다. 여러분도 푸른 장미의 매력에 빠져보지 않겠는가.
 

잎 모양을 조절하는 방법^김경태 교수는 잎의 길이와 폭을 조절하는 유전자를 찾아 냈다. 이를 이용해 10여종의 서로 다른 모양의 애기장대 잎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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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김경태 교수
  • 진행

    이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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