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과학이 서로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대체 언제부터일까. 1797년 1월 28일자 영국의 배스 헤럴드지에 실린 작자 불명의 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기술’이 얼마 전에 그녀의 언니 ‘자연’을 만나 언니가 무료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자기가 만든 안드로이드를 보라고 집으로 불렀다.
‘자연’ 부인이 와서, 처음에는 기분이 좋아 동생을 열렬히 칭찬하다가 터질 듯 한껏 웃어 대더니 황홀한 듯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러나 신기한 인형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부인은 표정이 다소 심각해지더니 가슴 속에 남몰래 질투심이 스며들면서 그녀의 이마가 도도한 모습으로 변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녀는 ‘기술’에게 말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니, 이 배은망덕한 것아! 네가 감히 이토록 불경스럽게 자연이 하는 일을 모방하다니.”
“남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이 천한 것아, 이제는 부디 이렇게 네 마음대로 하지 마라. 이처럼 내 영역을 네가 침범하다가는 언젠가 남녀 인간들까지 만들어 내겠구나.”
-게이비 우드의 <;살아있는 인형>;에서
사실 미술 곳곳에는 과학이 녹아있다. 정확한 인체조각을 위해서는 해부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했고, 2차원 평면 캔버스에 3차원의 현실공간을 재현하기 위해 화가들은 원근법을 공부했다.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을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화학을 공부하며 자신만의 물감을 제작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과학자이자 훌륭한 예술가인 인물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만난다. 이분법적인 가치관이 세상을 바라보는 보편적 방식으로 확산되면서 원래는 하나였던 예술과 과학은 어쩔 수 없이 둘로 나뉘어 각자의 목소리와 색깔을 키워나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더 이상 둘을 도식적으로 나눠 사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예술의 감성 이 과학의 이성을, 과학적 창의성이 예술의 기교를 담아내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백남준에서 휴보까지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가나아트갤러리는 2003년부터 ‘10년 후’라는 제목으로 공동 기획전을 매년 연다. 올 1월 세 번째를 맞이한 ‘10년 후’ 전시의 화두는 로봇이다. 로봇산업은 21세기 가장 각광받는 산업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특히 공학의 전 장르를 망라하는 종합적이고 선진적인 분야이자 경제에 미칠 영향도 매우 커 여러 분야에서 관심을 갖고 기술과 자본을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로봇이 단순히 산업적인 관심 대상은 아니다. 대량 생산을 위해 양산한 산업 로봇들이 인간을 닮아가면서 인간과 로봇 간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고민들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예술 작가에게 로봇은 막 창조된 새로운 생명체이자 상상의 자극제로 다가서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전시는 인간과 로봇의 공존을 전제로 인간과 로봇,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상상하는데 목적이 있다. 특히 ‘백남준에서 휴보까지’라는 소제목이 상징하는 것처럼 과학자와 예술가가 함께 하나의 주제를 고민하고 작품으로 만든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과 임옥상의 작품은 노동을 대신하는 자동기계를 생산해 삶의 질을 높이려는 한 인간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
백남준의 ‘파이버옵틱’(Phiber Optik)은 예술과 과학기술에 대한 상징적 담론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미국의 유명한 해커 마크 애븐의 아이디어를 타이틀로 한 이 작품은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예술과 과학에 대한 개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작가는 정보를 제공하는 텔레비전의 원래 기능을 거세한 채 하나의 오브제로 이용했다.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보자는 것을 오토바이를 탄 텔레비전 로봇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임옥상의 ‘테팔로봇’은 주부를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자는 의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테팔로봇은 가슴에 달려있는 토스트기로 빵을 굽고 커피메이커로 향긋한 원두커피를 만든다. 전기밥솥으로 만든 로봇 머리에서는 따뜻한 밥이, 믹서에선 신선한 과일주스가 넘쳐난다.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주부들을 위한 진정한 꿈의 로봇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세계적인 가전제품업체 ‘테팔’의 후원으로 제작한 것이어서 예술과 산업의 성공적인 협업 사례로 꼽히고 있다.
최근 최고의 팝아티스트로 각광받고 있는 낸시 랭은 로봇과 생명체가 결합한 새롭고 독특한 개체를 선보였다. 그녀는 KAIST 전산학과 연구팀의 도움을 얻어 자신의 새로운 생명체 ‘터부요기니’를 반도체에 심었다. 틀에 박힌 캔버스에서 벗어나 색다른 작업 방식을 보여준 그녀의 실험은 반도체 기술과 만나면서 참신함을 더한다.
ICU디지털미디어랩이 만든 ‘나노로봇’은 공기처럼 우리 주변에 퍼져있을 미래의 로봇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사람의 움직임과 소리에 반응하는 작은 로봇들을 천정에 가득 매달아 놓은 이 작품은 인간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기를 꿈꾸는 미래 로봇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KAIST 가상현실연구소와 국민대 의상디자인과팀이 공동 작업한 입는 컴퓨터(웨어러블 컴퓨터)는 인간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선 기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몸의 컨디션을 감지하고 쾌적함을 유지하는 똑똑한 운동복은 사람과 기계의 결합이 머지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이번 전시는 과학이 예술가의 상상력을 표현하는 도구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마치 화성인과 금성인처럼 이들은 서로 세상을 보는 다른 언어와 가치관을 갖고 있어 의견을 나누고 조율하는데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둘의 만남이 이제 시작에 불과하므로 끊임없는 시행착오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일 것이다. 예술과 과학의 경계뿐 아니라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는 이런 시도가 미술계는 물론 과학계에서도 유용한 방법론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