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ESTJ야. 넌?” “난 INFP야.”
“그럼 넌 카운슬러, 노사관계 전문가, 법률중재자, 언어치료사가 어울리겠네.”
“뭐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없잖아.”
여고생 둘이 머리를 맞대고 검사 결과를 함께 맞춰 보고 있다. 그들이 손에 든 것은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성격유형검사. 몇 년 전부터 중고생과 대학생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검사다. INFP는 내향, 직관, 감정, 인식 성향을 뜻하는 것이고, ESTJ는 외향, 감각, 사고, 판단 성향을 말한다.
최근 일선 중·고교에서는 학생들에게 MBTI 등의 적성검사를 권하고 그 결과로 진로를 상담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진로를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적성검사로 자신의 성향이 어떤 직업에 적합한지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정부는 이공계 기피현상을 막기 위해 장학금과 병역혜택을 주는 등 갖가지 대책을 내놨다. 그러나 학생들은 과연 자신의 적성이 이공계에 적합한지, 이공계를 지망한다면 어떤 전공을 선택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결국 시험 성적에 맞춰 진학하거나, 아니면 학교에서 제공하는 간단한 적성검사에 의존해야 할 판이다.
적성검사의 춘추전국시대
전국에 적성검사 열풍이 불고 있다. 80개가 넘는 적성검사 프로그램이 대학입시를 앞두고 진로선택 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손짓하고 있다. 수시입학제가 도입된 뒤로 ‘겨울=입시철’이란 등식이 깨지면서 이 열풍은 한동안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덩달아 300여개의 심리테스트 웹사이트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지난해의 ‘혈액형 열풍’에 못지않다.
많은 대학들은 아예 적성검사로 입시를 치르고 있다. 지난 2000년 한양대를 시작으로 경희대, 홍익대, 아주대, 인하대 등이 대입 전형에 전공적성검사를 포함시켰다. 전공적성검사 결과는 최대 50%까지 대입 사정 기준에 반영된다. 한양대 입학관리실장 최재훈 교수는 “기존 적성검사들을 참고해 자체 개발한 것”이라며 “학생들의 잠재력을 평가하기 위해 도입했다”고 밝혔다. 시중 서점가에는 이들 대학의 전공적성검사를 대비하는 ‘문제집’들이 팔리고 있다.
그러나 이 적성검사들은 사실 학생의 적성이 어떤 학과에 적합한지 알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언어능력, 공간지각력 등 수학능력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검사에 가깝다. ‘전개도의 모양을 유추하시오’라든가 수열의 특징을 찾아내는 식의 문제는 과거 수능시험에도 많이 등장했던 것들이다. 한국MBTI연구소 김종구 선임연구원은 이들 전공적성검사를 가리켜 “아이큐(IQ) 테스트”라고 잘라 말했다.
최재훈 교수도 “적성검사와는 성격이 다르다”며 “수능·내신 우수학생들의 90% 이상이 전공적성검사에서도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바꿔 말하면 전공적성검사가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뽑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도 적성검사를 적극 도입하는 추세다. 기업 적성검사의 원조는 지난 1993년 개발된 LG그룹의 ‘기초직무능력평가’(FAST)다. 1995년엔 삼성그룹도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삼성직무적성검사’(SSAT)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밖에 SK, 코오롱, 쌍용, 포스코, 농협 등이 입사시험에 적성검사를 넣고 있다. 진학에서 취업까지, 적성검사는 이제 ‘반드시 지나야 할 문’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객관적 도구로 선택에 확신 가진다
학생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MBTI 성격유형검사다. 일련의 설문에 ‘Yes’와 ‘No’로 답해 나온 결과를 정리해 자신의 성격과 성향을 아이디어뱅크형(INTP), 사업가형(ESTJ) 등 16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그에 알맞은 직업을 제시한다.
김종구 선임연구원은 “진로를 결정할 때는 자신이 무엇에 재미를 느끼는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며 “MBTI 검사는 자신의 성격유형을 알려주므로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서강대 교양학부 김정택 교수는 “실제 진로선택에서 MBTI 검사결과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자신의 적성에 맞는 분야를 알려면 스트롱(strong) 직업흥미검사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추천했다. 스트롱 직업흥미검사는 미국의 직업심리학자 에드워드 스트롱이 개발해 진로와 직업상담 분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적성검사다. 2001년부터 한국심리검사연구소에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춘 MBTI와 스트롱 적성검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설문을 통해 각 분야에 대한 개인의 흥미를 묻고, 그 결과로 개인이 어떤 활동에 가치를 두는지, 어떤 직업에 적합한지 등에 관한 정보를 제시한다. 크게 현장형, 탐구형, 예술형, 사회형, 진취형, 사무형의 6가지로 직업을 분류한다. 검사 후 개인별 결과표를 참고하면 자신의 적성에 맞는 분야에서 선택 가능한 직업들이 제시돼 있다. 진취형인 경우 대중연설, 법·정치, 상품유통, 조직관리가 적합하며 구체적으로 대기업 홍보실, 법률회사, 마케팅회사, 자동차대리점 등에서 일할 수 있다고 소개한다.
중·고생을 위한 검사로는 지난 1999년 한국에 도입된 스트롱 진로탐색검사가 있다. 진로를 선택하기 위한 준비가 돼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진로성숙도 검사가 추가된 것이다. 개인의 흥미유형을 파악해 직업세계를 탐색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부산대 교육학과 심혜숙 교수는 “이들 적성검사가 진로지도에서 갖는 비중은 아주 크다”고 말한다. 그는 “학생들이 객관적인 도구를 통해 자기 선택에 확신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적성검사는 활용가치가 높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종구 선임연구원은 “스트롱 직업흥미검사는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개발된 지 2~3년밖에 지나지 않아 통계적 모델을 완성하기엔 데이터가 부족한 것이 단점”이라며 “학교 단체검사 등으로 데이터를 충분히 쌓으면 신뢰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대 교육학과 신종호 교수는 적성검사의 효과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다.
“많은 학생들이 적성검사를 받지만 그 결과만으로는 자신이 선택하려는 직업을 갖기 위해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적성검사만으로 ‘내 적성은 이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죠.”
적성검사 결과로 제시된 직업들이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김정택 교수도 “스트롱 검사만으로 진로선택에 받을 수 있는 도움은 제한적이므로 다른 적성검사 결과를 참고해야 한다”고 권했다. 심혜숙 교수는 “검사 결과에만 의존하면 실제 학생의 흥미나 적성과 어긋날 수 있으므로 개인 생활기록부를 참고하거나 전문가와의 개별 면접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교사와 전문가의 상담이 필수
신종호 교수는 “적성검사는 집단 수준의 추상적 정보를 제공하는 선에서 그친다”며 “유용한 진로지도를 위해서는 개개인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전문가의 상담 지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적성검사는 진로선택의 기초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보조수단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김종구 선임연구원은 적성검사와 병행해 방학기간 중 청소년상담소 등의 복지기관에서 운영하는 단체 워크숍 등 진로상담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가할 것을 제안했다.
미국, 영국 등에서는 학기 중과 방학에 걸쳐 학교 안팎에서 교사와 전문가가 연계해 적성검사를 실시하고 학생과 상담하는 진로지도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김 선임연구원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기관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국내에 그대로 가져와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대 대학생활문화원 선혜연 상담원은 “외국의 적성검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며 “진로선택 과정에서 부모와 교사의 역할이 큰 우리의 실정에 맞춰야 하므로 우리나라의 검사결과에 근거해서 검사자의 성향을 판단하는 기준 수치를 수정해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적성검사로 자신의 흥미와 성향을 알았다면 진로를 선택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신종호 교수는 대표적인 것으로 ‘모델링’(modeling)을 꼽았다. 최근 배아줄기세포 복제에 성공한 황우석 교수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인 사람을 진로선택의 모델(본보기)로 삼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닮고 싶은 모델을 찾아라
신 교수는 “스스로 ‘나는 누구처럼 훌륭한 과학자가 되겠다’는 식의 목표를 세우는 것이 진학 동기를 부여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고 조언했다. 이공계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모델로 삼을 수 있는 유명 과학자들을 선정하는 사업엔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srm.dongascience.com)이 있다.
지난 2002년부터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 동아일보, 동아사이언스가 학술연구·산업·사회문화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인정받은 과학기술인을 선정해 발표한다. 이공계로 진출하려는 중·고생들은 이들의 인터뷰를 참고하면 동기 부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각 기관에서 제공하는 진로선택 정보를 참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노동부가 운영하는 고용안정정보망(www.work.go.kr)에서는 청소년용 스트롱 직업흥미검사와 청소년적성검사(ABA)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서울특별시교육연구원도 진학진로정보센터를 열어 진로관련 적성검사와 온라인 상담실 등을 운영한다. 한국과학문화재단은 8월 12일부터 21일까지 대전 엑스포과학공원에서 ‘2005 이공계 진로안내엑스포’를 개최해 이공계 전공과 진로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진로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려는 의지다. 스트롱 진로탐색검사에서는 자신이 갖고 싶은 직업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탐색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로준비도’를 진로선택을 위한 중요한 항목으로 꼽고 있다. 신종호 교수도 “자신이 특정 분야에 관심이 있다면 적성검사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그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자세히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뇌파로 적성검사?
적성검사의 개념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최근 유행하고 있는 뇌파(EEG)검사. 뇌파검사의 효용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뇌파를 통해 개인의 성향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뇌파를 이용해 개인의 적성을 안다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뇌파는 뇌의 여러 부위에서 측정된 파를 합한 것일 뿐 특정 부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며 “개인의 성격과 뇌파가 관련돼 있다고 보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다만 뇌에 자극을 줬을 때 생기는 ‘사건 관련 전위’(ERT)의 하나인 ‘p300’파가 일부 성격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편적 연구결과가 있을 뿐”이라고 권 교수는 밝혔다.
국내 항공사들도 조종훈련생을 선발할 때 적성검사와 함께 뇌파를 측정한다. 정상적인 경우 뇌가 쉬고 있을 때는 α(알파)파가 나온다. 그런데 쉬고 있을 때 δ(델타)파가 측정되면 뇌 활동 이상을 의심해 볼 수 있다. 권 교수는 이에 대해 “정신분열증, 간질 등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며 “지금의 연구결과로는 뇌파로 적성을 검사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