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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50년 전만 해도 인류는 전파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전파를 통신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1888년 독일의 물리학자 하인리히 헤르츠가 전파의 존재를 발견했음을 세상에 알렸고 이로써 전파시대는 개막됐다. 이 실험은 물리학계를 뒤집은 큰 사건이었다.

전기와 자기가 인류에게 알려진 것은 엄청나게 오래된 일이었지만 그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매우 늦게 시작됐다. 그리스인들이 처음으로 전기와 자기 현상에 대해 언급한 후 2000년도 더 지난 1600년에야 영국인 의사 윌리엄 길버트가 ‘자석에 관하여’라는 책을 출판했고, 이것이 효시가 됐다.

하지만 전문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질 때까지는 한 세기 이상을 더 기다려야 했다.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전기와 자기는 본격적인 실험 연구의 대상이 됐다.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전기와 자기의 알려지지 않았던 성질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했다.

18세기에는 전기와 자기 중에서도 정전기 현상만 연구됐다. 이런 상황은 19세기로 접어들면서 급변했다.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알레산드로 볼타가 1800년에 볼타 전지를 발명하면서 일정한 세기로 계속 흐르는 전기, 곧 전류를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영국의 험프리 데이비는 전류를 사용해서 전기 분해 방법을 개발했고, 이로부터 기존의 화학적 방법으로 분리할 수 없었던 많은 원소를 찾아내기도 했다.

1820년 덴마크의 물리학자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는 다시 한번 전기와 자기 연구에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우연히 전류가 흐르는 도선 주위에 놓인 자침이 흔들리는 현상을 보고 전기와 자기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로써 전기와 자기는 전자기학으로 통합됐다.

유럽 대륙에서는 프랑스의 앙드레 마리 앙페르와 독일의 빌헬름 베버 등이 전자기 현상에 관한 수학적 이론들을 정립했고, 영국에서는 데이비의 제자인 마이클 패러데이가 전자기 현상에 대해 다양한 실험을 했다. 패러데이는 이 과정에서 전자기 유도 현상을 발견했다.

패러데이는 자신의 실험에서 관찰한 다양한 전자기 현상을 역선이 펼쳐진 공간이라는 의미의 ‘장’(場, field)이라는 개념을 써서 설명했다. 그러나 패러데이는 대학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이 작업은 나중에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탁월한 수준으로 수학 훈련을 받은 제임스 클럭 맥스웰에 의해 이뤄졌다.

맥스웰은 1856~1865년에 장 개념에 입각한 전자기학을 수학적 이론으로 정교화했고, 흔히 ‘맥스웰 방정식’이라고 불리는 4개의 방정식으로 모든 전자기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수학적 이론은 유럽 대륙의 물리학자들에게는 매우 낯설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전자기 현상을 장으로 설명하는 방식에 반대했고 대신 뉴턴의 만유인력처럼 원격 작용하는 힘의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맥스웰은 한창 일할 나이에 암에 걸려 1879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이 맥스웰의 이론을 더욱 다양한 형태로 여러 현상들에 적용했다. 맥스웰 방정식이 함축하고 있는 가장 놀라운 사실은 광속으로 퍼져나가는 전자기적 요동(파동)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빛이 전자기파의 일종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맥스웰의 추종자들은 이 전자기적 요동의 검출가능성만 알았을 뿐 그 누구도 실제로 전자기파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독일의 헤르츠였다.

헤르츠는 대륙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영국의 장 개념에 익숙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헬름홀츠가 원격 작용이라는 대륙적 틀 안에서 맥스웰의 이론을 통합하려고 했던 덕택에 헤르츠는 맥스웰의 이론에 친숙했다.

1885년 실험실이 잘 갖춰져 있었던 칼스루에공대 물리학 교수가 된 헤르츠는 본격적으로 맥스웰의 이론에 대한 실험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1886년 그는 우연히 전자기파(전파) 검출에 성공하게 된다.

그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위해 시범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는 유도 코일이나 라이덴병으로부터 도선을 통해 진동 방전을 일으켰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비슷한 모양의 고리형 도선에 있는 간극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전자기파를 검출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헤르츠는 자신이 전자기파를 검출한 것인지 몰랐다. 그는 이것을 공진현상이라고 생각했고 고리형 도선을 진동 전류의 검출기로 사용할 수 있겠다고만 생각했다.

이 우연한 발견은 헤르츠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실험 장치를 꾸며 집중적인 연구에 돌입했다. 그가 사용한 축전기는 한 쌍의 금속 막대로 이뤄져 있었는데, 두 막대의 끝은 거의 맞닿을 만큼 근접해 있었다.

이 막대들이 스파크를 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반대 부호의 전하를 공급받으면 전류가 그 간극을 따라 막대를 통해 흘렀다. 이 때 떨어져 있는 독립된 고리형 회로의 간극에도 스파크가 발생했다. 이로부터 헤르츠는 전자기파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888년 3월 헤르츠는 큰 방의 한쪽 벽에서 반사시킨 전자기파로 정상파를 만들고 고리형 검출기를 사용해 정상파의 배와 마디의 위치를 알아내 전자기파의 파장을 측정했다. 그는 이렇게 구한 파장을 고유진동수와 곱해 전자기파의 전파속도를 구했고, 그 값이 빛의 속도와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
 

전자기파가 빛러럼 반사, 굴절되며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낸 헤르츠의 1888년 실험 장면.


이후 몇 달 동안 헤르츠는 평행한 전자기파를 만들어 전자기파의 직진, 반사, 굴절 등을 입증했고 도선으로 만든 편광판을 이용해 전자기파가 횡파라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이렇게 그는 전자기파가 빛이나 열복사선과 같은 성질을 띤다는 것을 보일 수 있었고 결국 맥스웰 이론을 실험으로 입증했다.

헤르츠는 자신의 실험이 맥스웰 이론을 검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륙에 있던 헤르츠의 동료들에게는 그의 실험이 낯설었고, 그의 발견은 영국에서 먼저 인정받았다. 맥스웰의 추종자였던 영국인 올리버 헤비사이드는 1891년 “3년 전까지 전자기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것은 어디에나 있었다”라며 헤르츠의 발견을 높이 평가했다.

재 현 실 험

헤르츠의 전파 실험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한 젊은이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굴리엘모 마르코니였다. 어릴 때부터 물리학과 전기에 관심이 많았던 마르코니는 1886년 이탈리아의 유명한 물리학자 리기 교수의 실험실에서 일하던 중 리기 교수가 헤르츠의 전파실험을 재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전파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된다.

1894년 알프스에서 휴가를 즐기며 전기에 관한 잡지를 보던 마르코니는 헤르츠의 실험에 대한 기사를 읽고 전파를 통신 수단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전파를 사용한 원거리 통신에 성공했고 이 공로로 1909년 노벨상을 받았다.

그러나 헤르츠는 마르코니가 자신의 실험을 재현하기 시작한 1894년에 만성패혈증으로 죽고 말았다. 헤르츠가 좀더 살았다면 1909년에 마르코니와 노벨상을 공동 수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헤르츠의 이름은 전파의 주파수 단위인 헤르츠(Hz)로 사용되면서 영원히 기려지고 있다.

헤르츠는

하인리히 헤르츠는 1857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유명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집안의 공방에서 여러 가지 도구 만들기를 즐겼다. 헤르츠는 뮌헨대에서 공학도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지만 물리학에 흥미를 느껴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인 베를린대의 헬름홀츠 밑에서 본격적으로 물리학을 공부했다. 이후 1885년 칼스루에공대 물리학 교수가 됐고, 이곳에서 전자기파를 검출하는 뛰어난 업적을 냈다. 1889년에는 본대의 물리학 교수가 됐다. 헤르츠는 매우 겸손한 인품을 지녔고, 실험이나 이론에 모두 능한 드문 능력을 보인 물리학자였기 때문에 그의 스승인 헬름홀츠는 헤르츠를 특별히 아꼈다. 그러나 헤르츠는 1894년 만성 패혈증으로 3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물리학자 헤르츠
 

2005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구자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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