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쏘아올린 아폴로 11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했다. 이로써 미국은 우주개발 경쟁에서 소련을 제치고 선두 지위를 확고하게 구축했다. 1972년 아폴로계획의 마지막 주자인 아폴로 17호까지 무사히 우주 비행을 마치자 아폴로우주선은 미국의 우주기술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됐다. 이듬해 NASA는 이런 분위기에 박차를 가했다. 그간 한번밖에 쓸 수 없어 경제성이 낮다는 비판을 받은 우주선 대신 계속해서 지구와 우주를 오갈 수 있는 우주왕복선 개발을 시작한 것이다.
월남전으로 인해 미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우주왕복선의 개발비가 예상보다 늘어나 개발 계획 자체가 취소되는 등 NASA는 여러 난관에 부딪쳤다. 하지만 1981년 NASA는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를 성공적으로 개발했고, 컬럼비아호는 그때까지의 발사체 기술을 집대성한 최고의 결정체로 인정받았다. 덩달아 NASA의 위상도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이런 NASA의 위상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두번째 우주왕복선인 챌린저호의 폭발이었다.
1986년 1월 28일 서늘한 아침바람이 부는 가운데 플로리다주 케네디우주센터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챌린저호의 이륙을 보기 위해서였다. 5번이나 이륙이 지연된 끝에 결정된 날이었다. 그 날은 NASA에서 우주왕복선을 띄운 이래 가장 기온이 낮았다.
‘투, 원, 제로.’ 오전 11시 38분 드디어 기다리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요란한 폭발음을 내며 챌린저호가 발사대를 떠나 하늘로 솟아올랐다. 발사대를 떠난 지 약 73초 후 챌린저호에서 섬광이 일더니 이내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는 저멀리 파편들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주시하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추진체가 떨어져나가는 단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아니라 7명의 승무원 전원의 목숨을 앗아간 챌린저호 폭발 순간임을 알게 됐다.
챌린저호 폭발 사고는 임무 수행 중 우주비행사가 목숨을 잃은 최초의 사고였다. 25회나 무사히 우주비행을 마치고 NASA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던 챌린저호가 폭발하자 미국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특별지시를 내려 진상을 조사할 대통령직속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조사위원회는 3개월 동안 무려 6000여명을 동원해 1만5000여장에 달하는 조사서를 작성하고, 17만장에 달하는 서류를 조사했다. 수백 건의 사진, 비행 기록, 사진 증거물, 잔해들이 자세히 조사됐다.
그 결과 조사위원회는 챌린저호의 폭발 원인이 오른쪽 고체 로켓 추진기 아래쪽 이음매에 생긴 결함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봉인에 쓴 ‘오링’(O-ring)에 결함이 있었던 탓이었다. 로켓이 추진되는 동안 이 이음매의 오링이 부식되면서 고열 가스가 새어나와 주연료 탱크에 불이 옮겨 붙어 폭발했던 것이다.
문제는 NASA가 이미 오래전부터 오링의 부식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고 발생 1년 전에 이미 로켓 추진기 설계기사는 NASA에 오링의 결함을 보고했었다. 특히 1986년 1월 15일 챌린저호 발사 2주전 챌린저호의 발사를 결정하기 위해 열린 화상회의에서 공학자였던 보이스졸리는 오링의 부식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온이 12℃ 이하로 떨어지는 날은 피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기술적으로 뒷받침할만한 결정적인 자료들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NASA가 그의 주장을 무시한 것은 객관적인 데이터가 부족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NASA는 안전의 문제보다는 비행 계획을 엄수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점을 들어 챌린저호의 발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NASA의 야심찬 계획이 한 몫 했다. NASA는 1986년을 우주왕복선 사업의 획기적인 해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총 14번의 발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챌린저호 발사가 계속 연기되면서 이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NASA 관계자들은 한번 정도 발생한 오링의 부식 문제는 무시할만한 것으로 여겼다. 안전을 우선할 경우 오링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려면 로켓의 설계 자체를 바꿔야만 했다. 그러자면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사위원회는 챌린저호의 발사를 명령하고 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 소통을 막아버린 NASA와 로켓 추진기 설계회사의 경영진에 사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챌린저호 폭발로 그때까지 ‘무엇이나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던 NASA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됐고 예산 지원도 감소했다. 우주비행사들이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결함이 있는 챌린저호로 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능한 우주비행사와 공학자들이 NASA를 떠나는 일도 발생했다. NASA는 예상된 위험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7명의 아까운 목숨과 명성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조사위원회는 우주왕복선 발사 결정 등에 우주비행사와 공학자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할 것을 권고했다. 또 우주비행사의 탈출 시스템의 안전도를 높이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했다. 이후 NASA는 1988년 9월에야 우주왕복선 비행을 재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챌린저호 사고 후 17년만인 2003년 컬럼비아호가 지구로 귀환하던 도중 폭발해 NASA는 또다시 우주왕복선 폭발이라는 망신을 당했다. 챌린저호의 교훈으로 부족했던 것일까.
월남전으로 인해 미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우주왕복선의 개발비가 예상보다 늘어나 개발 계획 자체가 취소되는 등 NASA는 여러 난관에 부딪쳤다. 하지만 1981년 NASA는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를 성공적으로 개발했고, 컬럼비아호는 그때까지의 발사체 기술을 집대성한 최고의 결정체로 인정받았다. 덩달아 NASA의 위상도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이런 NASA의 위상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두번째 우주왕복선인 챌린저호의 폭발이었다.
1986년 1월 28일 서늘한 아침바람이 부는 가운데 플로리다주 케네디우주센터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챌린저호의 이륙을 보기 위해서였다. 5번이나 이륙이 지연된 끝에 결정된 날이었다. 그 날은 NASA에서 우주왕복선을 띄운 이래 가장 기온이 낮았다.
‘투, 원, 제로.’ 오전 11시 38분 드디어 기다리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요란한 폭발음을 내며 챌린저호가 발사대를 떠나 하늘로 솟아올랐다. 발사대를 떠난 지 약 73초 후 챌린저호에서 섬광이 일더니 이내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는 저멀리 파편들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주시하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추진체가 떨어져나가는 단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아니라 7명의 승무원 전원의 목숨을 앗아간 챌린저호 폭발 순간임을 알게 됐다.
챌린저호 폭발 사고는 임무 수행 중 우주비행사가 목숨을 잃은 최초의 사고였다. 25회나 무사히 우주비행을 마치고 NASA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던 챌린저호가 폭발하자 미국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특별지시를 내려 진상을 조사할 대통령직속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조사위원회는 3개월 동안 무려 6000여명을 동원해 1만5000여장에 달하는 조사서를 작성하고, 17만장에 달하는 서류를 조사했다. 수백 건의 사진, 비행 기록, 사진 증거물, 잔해들이 자세히 조사됐다.
그 결과 조사위원회는 챌린저호의 폭발 원인이 오른쪽 고체 로켓 추진기 아래쪽 이음매에 생긴 결함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봉인에 쓴 ‘오링’(O-ring)에 결함이 있었던 탓이었다. 로켓이 추진되는 동안 이 이음매의 오링이 부식되면서 고열 가스가 새어나와 주연료 탱크에 불이 옮겨 붙어 폭발했던 것이다.
문제는 NASA가 이미 오래전부터 오링의 부식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고 발생 1년 전에 이미 로켓 추진기 설계기사는 NASA에 오링의 결함을 보고했었다. 특히 1986년 1월 15일 챌린저호 발사 2주전 챌린저호의 발사를 결정하기 위해 열린 화상회의에서 공학자였던 보이스졸리는 오링의 부식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온이 12℃ 이하로 떨어지는 날은 피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기술적으로 뒷받침할만한 결정적인 자료들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NASA가 그의 주장을 무시한 것은 객관적인 데이터가 부족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NASA는 안전의 문제보다는 비행 계획을 엄수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점을 들어 챌린저호의 발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NASA의 야심찬 계획이 한 몫 했다. NASA는 1986년을 우주왕복선 사업의 획기적인 해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총 14번의 발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챌린저호 발사가 계속 연기되면서 이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NASA 관계자들은 한번 정도 발생한 오링의 부식 문제는 무시할만한 것으로 여겼다. 안전을 우선할 경우 오링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려면 로켓의 설계 자체를 바꿔야만 했다. 그러자면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사위원회는 챌린저호의 발사를 명령하고 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 소통을 막아버린 NASA와 로켓 추진기 설계회사의 경영진에 사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챌린저호 폭발로 그때까지 ‘무엇이나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던 NASA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됐고 예산 지원도 감소했다. 우주비행사들이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결함이 있는 챌린저호로 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능한 우주비행사와 공학자들이 NASA를 떠나는 일도 발생했다. NASA는 예상된 위험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7명의 아까운 목숨과 명성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조사위원회는 우주왕복선 발사 결정 등에 우주비행사와 공학자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할 것을 권고했다. 또 우주비행사의 탈출 시스템의 안전도를 높이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했다. 이후 NASA는 1988년 9월에야 우주왕복선 비행을 재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챌린저호 사고 후 17년만인 2003년 컬럼비아호가 지구로 귀환하던 도중 폭발해 NASA는 또다시 우주왕복선 폭발이라는 망신을 당했다. 챌린저호의 교훈으로 부족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