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의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가 지난 2월 8일로 가동 10돌을 맞았다. 1995년 차갑던 노심이 ‘마법의 불꽃’을 밝힌지 꼭 10년째를 맞은 것이다. 올해는 하나로가 최대 출력으로 운영되는 첫해이기도 하다.
최대 출력 30메가와트(MW)의 이 원자로는 그동안 ‘선진 과학 입국’이란 기치 아래 국내 과학 실험의 산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원자로 건설비만 1000억원, 각종 실험 장치 설치비를 포함해 총 2000억원 이상이 이 거대 사업에 투입됐다. 2004년만 해도 350건의 중성자빔 실험이 실시됐으며 1000여명의 국내 과학자가 이곳을 찾았다.
하나로의 운영목적은 일반 원자로와 다르다. 발전용 원자로와 달리 하나로는 전기를 생산하지 않는다. 대신 핵분열로 발생한 중성자를 이용해 원자 단위의 각종 측정 실험과 성분 분석을 한다. 핵연료 생산을 위한 예비실험과 원자로에 사용되는 각종 소재를 연구하는 것도 이 연구로의 몫이다. 중성자빔를 쪼여 성능 좋은 반도체를 만들기도 하며 동위원소를 이용해 의약품을 생산하기도 한다. 이처럼 하나로는 말 그대로 다목적 연구로인 셈이다.
1985년 원자력연구소 공릉동 시대가 저물 즈음 착수된 하나로 사업에 걸었던 국민적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다목적로인 하나로를 보는 시선은 차가웠다. ‘다목적로=가난한 나라의 연구용 원자로’란 단어가 꼬리표처럼 쫓아다녔다.
하지만 연구목적에 따라 맞춤형 원자로를 마음껏 지을 수 있는 선진국에 비해 ‘먹고살기 빠듯한’ 개발도상국에겐 이 정도 수준의 연구로도 그나마 감지덕지해야하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미국의 대외 원조를 받아 연구로를 운영하던 한국에게도 전문 연구로는 꿈에서나 지을 법한 ‘천상의 성’이었다. 연구용 원자로는 크게 전문연구로와 다목적연구로로 나뉜다. 대개 미국과 일본, 유럽 등 원자력 선진국에선 연구 목적에 따라 구조와 운영방식이 다른 원자로를 짓는다. 원자로에 사용되는 재료를 시험하는 재료시험로, 중성자빔으로 미시세계를 측정하는 빔원자로, 동위원소 생산로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의 재료시험로(MTR)이나 기술시험로(ETR), 일본의 JMTR, 중국의 ETR은 이미 잘 알려진 전문연구용 원자로다. 2000년대 들어 중성자빔이나 동위원소를 뽑아내는 전문생산로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 전문 연구로는 건설비는 물론 운영비 또한 비싸 개발도상국들에겐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막대한 비용에 질린 대다수 국가들은 다목적로를 선호한다.
처음부터 한국이 연구용 원자로를 국산화한다는 얘기를 믿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당시는 원자로마저도 원조받던 시기였다. 하지만 지난 10년 세월은 ‘무시’를 ‘관심’으로 바꿔놓기에 너무나 충분했다. 1987년 건설 계획을 처음 받아든 당시 설계자들은 상당한 미래안을 가진 듯하다. 연구로 공인 기준인 20MW이상 출력을 고집했고 20~30년뒤 연구 방향성을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그동안 실험장치가 차질없이 도입된 것도 모두 이런 미래적인 설계 덕분이다.
하나로이용연구단 운영팀 전병진 박사는 “당초엔 연구용 원자로 하나만 짓기로 했던 것이 어느새 이렇게 몸집이 커졌다”고 회고한다. 사실 운전 초기만 해도 원자로 주위엔 실험장치다운 장치는 거의 없었다.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운영이 시작된 후인 1995년 이후였다. 연구팀이 도입한 실험장치가 대략 어느 정도인지는 현재 진행중인 연구만 보면 금새 알 수 있다. 중성자 빔을 이용한 측정분석과 동위원소생산, 원자로 재료 시험, 방사화학 분석실험이 지금까지 성공리에 진행되고 있다.
중성자빔 연구의 산실
하나로 원자로는 국내 몇 안되는 측정분석시설로 손꼽힌다. 물체의 내부 구조를 밝혀내는 측정분석실험은 모든 과학 연구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연구로 생각하면 된다. 보통은 X레이 산란이나 초고압전자, 핵자기 공명현상이 측정에 이용되지만 하나로는 중성자를 이용한다. 중성자로 물질 구조를 밝혀내기 시작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중성자를 이용해 물질을 연구한 선구자인 클리포드셜과 버트람 브록하우스는 그 공로로 199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연쇄 핵분열로 생긴 중성자는 물체에 부딪히면 진행방향과 에너지가 바뀐다. 이 진행 방향을 분석해 보면 물체 내부구조를 쉽게 알아낼 수 있다. 3축 분광기라는 장치로 중성자빔을 쪼여주면 중성자가 진동을 일으킨 물체의 동역학적 성질을 찾아낸다. 이같은 방식으로 중성자빔은 최고 1000억분의 1m크기의 물체 구조를 알아낸다. 거의 원자 수준의 구조까지 밝혀내는 셈이다. X레이로 나노구조를 규명하는 포항광가속기나 정전기장을 사용하는 초고압전자현미경보다 정밀도면에서 한수 위에 있다는 얘기다.
하나로이용기술개발부 김영진 박사는 “중성자를 이용하면 결정구조 뿐만 아니라 자기구조나 스핀배열 등 내부의 동적인 상태까지 알아낼 수 있어 액체나 생체막 구조까지 측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강한 중성자 빛을 내려면 원자로는 다량의 중성자를 생산해야 한다. 하나로 역시 최대한 많은 중성자를 생산하도록 설계됐다. 짧은 시간에 많은 중성자가 튀어나오도록 노심 크기를 직경 40cm, 높이 70cm로 최대한 줄였다. 그만큼 중성자 밀도와 단위부피당 출력은 크게 올라간다. 반면 같은 출력의 발전용 원자로 보다 5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규모다. 짧고 굵게 타버린 탓에 연료는 수시로 교체된다. 이 때문에 연평균 150일은 연료 교체를 위해 가동을 중단한다. 이처럼 연구용 원자로를 유지보수가 까다롭기 때문에 23일 운전, 12일 정지’는 정례화됐다.
10년간 쌓아온 공든탑 이젠 결실로
이밖에도 지난 10년간 중성자를 이용한 연구성과는 꽤 화려하다. 그 중 중성자 핵변환 도핑을 이용한 반도체 제작은 현대판 연금술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중성자 도핑은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최고급의 전력용 실리콘 반도체를 만든다. 고순도의 실리콘 단결정에 중성자를 쪼이면 극미량의 실리콘(Si)이 인(P)으로 바뀐다. 결과적으로 부도체가 반도체로 바뀐 격이다. 이를 얇게 썰어 웨이퍼로 만들면 자기부상열차와 연료전지차에 들어가는 최고급 반도체가 된다. 연구팀은 이미 KTX에 반도체를 공급하는 일본기업에 이 기술을 역수출해 국산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의료 연구에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 중 붕소중성자포획치료법(BNCT)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붕소는 열중성자를 잘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 일단 중성자와 반응하면서 알파입자와 리튬-7로 쪼개진다. 이렇게 핵분열된 두 파편은 주위 암세포를 정확히 죽이게 된다. 김영진 박사는 “붕소를 흡수한 세포만을 정확히 공격할 수 있어 일반세포에 대한 방사선 조사효과를 줄이면서 효과적으로 암세포를 선택적으로 없앨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치료방식은 암 가운데 특히 치료가 어려운 뇌암치료에 적합하고 방사선 조사나 화학치료법보다 환자 고통을 줄일 수 있어 현재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연구단 역시 하나로 원자로 주변에 BNCT 실험장치를 설치하고 현재 동물을 대상으로 임상실험 중이다.
하나로는 방사성동위원소를 제조하는 생산공장 역할도 해왔다. 원소는 순수 자연 상태에서 92종에 불과하지만 하나의 원자번호안엔 무게가 다른 여러개의 다른 원소가 존재한다.
원자로에서 인위적으로 방사성을 띠게 한 방사성동위원소는 의료 및 생명과학분야에서 방사선이용기술의 기본 물질로 사용된다.
현재 하나로가 생산 중인 방사성동위원소수는 모두 10여종. 이 가운데 I131은 하나로가 생산한 대표적인 의료용 방사성동위원소로 주로 갑상선 진단과 치료에 사용되고 있다. 이밖에도 비파괴검사, 방사성추적자, 종자개량, 식품보존 등 방사성동위원소가 쓰이는 활용범위는 꽤 넓다. 연구로는 핵기술 국산화에도 기여했다. 대다수 연구단 관계자들은 “지난해 국산화에 성공한 연구로용 핵연료도 하나로가 없었다면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수천도 이상의 고온 고에너지 환경에서 견뎌야하는 핵연료는 수많은 실험의 산물. 따라서 연구로는 핵연료 제작에 필수요건인 셈이다. 생산된 핵연료가 제대로 동작하는지 살펴보는 일도 하나로 연구자들의 몫이다.
하나로이용연구단 박경배 단장은 “하나로는 순수 연구시설이지만 실제 국민생활과 산업에 직결된 연구를 꾸준히 해왔다”고 설명한다.
최신 냉중성자 연구 장치 도입
연구단은 2008년까지 약 1000억원의 예산을 들여 냉중성자 연구시설을 새로 도입할 계획이다. 김영진 박사는 “열중성자를 이용한 측정시설이 순수 연구목적용이라면, 냉중성자 연구시설은 본격적인 나노기술과 바이오기술 지원시설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초속 2200m로 날아가는 열중성자는 에너지가 너무 커서 파장이 짧아 나노단위 물질 구조를 측정하기가 어렵다. 에너지가 큰 만큼 분석대상의 물질 구조를 파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좀더 큰 물질 내부 구조를 파악하려면 파장이 좀더 길고 낮은 에너지를 갖는 중성자가 필요하다. 냉중성자는 열중성자를 수소 감속제에 넣어 에너지를 크게 떨어뜨려 만든다. 이렇게 초속 510m로 떨어진 냉중성자는 각종 측정실험의 기본 도구로 쓰인다.
사실 냉중성자를 뽑아낼 수직구멍을 미리 뚫어놓지 않았다면 냉중성자연구장치 설립은 자칫 시작부터 좌초될 뻔했다. 이를 막은 것은 설계자의 ‘선견지명’ 덕이다. 1987년 설계 당시 훗날 냉중성자 이용을 예측한 설계자는 다행히도 설계에 이를 반영했다. 원자로엔 다른 실험장치와 마찬가지로 냉중성자원 설치를 위한 수직구멍과 여분의 부지가 마련됐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 나노기술과 바이오기술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냉중성자연구시설 설치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이들 기술이 순수 연구를 벗어나 산업화되면서 이용층이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기업으로 옮겨간 것. 그만큼 수요자층이 늘어난 것이다.
이에 따라 연구단은 현재 원자로가 설치된 건물 옆에 현재 규모보다 큰 별도의 냉중성자연구시설을 건설할 계획이다. 이 건물에는 나노 크기의 물질구조를 규명할 냉중성자 소각산란장치와 반사율 측정장치, 실험장치 제작시설이 들어선다. 하나로의 모습도 크게 바뀌게 된다. 원자로 내에는 열중성자를 냉중성자로 감속할 액체수소 냉각장치가 새로 붙게 된다. 하나로의 이 새로운 프로젝트는 국내외 연구자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미 국내 연구자들과 이용자들은 냉중성자 장치의 공동 개발에 나섰고 해외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도 결성됐다.
현재 일부기술에 대한 국산화도 어느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 특히 핵심 기술인 냉중성자 유도관에 들어갈 특수 유리기판의 정밀 가공과 생산이 가능해져 해외 의존도를 크게 끌어내렸다. 이 중성자 거울 기술을 성공적으로 확보하면 자체 수요뿐만 아니라 방사광, 천체망원경 등 다양한 X선 거울로도 응용할 수 있다. 이처럼 냉중성자 산란장치가 완성되면 고분자물질, 단백질 집합체, 금속 세라믹, 초전도체 등 국내 나노 구조 연구에 탄력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연구단 박경배 단장은 “이번 냉중성자 사업은 하나로가 동북아 지역의 핵심 중성자 산란연구센터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연구단은 오는 4월11일부터 13일까지 지난 10년간 하나로의 성공적인 운영과 이용을 기념하는 국제심포지움을 개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