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 미국 대학 도서관에서 ‘인류가 발견한 고고학 유물 100선’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유물 중에는 유일하게 한국에서 발견된 ‘신안 보물선’이 끼어 있었다.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신안 보물선이 동양을 대표하는 귀중한 배라는 것을 알고 뿌듯함을 느꼈다.
1975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신안 보물선을 한국 배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러나 이 배는 1323년 원나라에서 만들어진 중국 무역선이다. 길이 34m, 폭 11m, 260t 규모로 당시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배다. 항해도중 암초에 좌초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동아시아 배 중에서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 이 배는 동아시아의 조선 기술과 무역 규모를 짐작케 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인류의 보물’ 신안 보물선이 어부들에 의해 발견된 지 29년만에 복원돼 지난해 12월 목포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대중에 공개됐다. 개펄에 파묻혀 있던 배의 오른쪽은 제 모습대로 복원됐지만 사라진 왼쪽이나 앞과 뒷 부분은 철골로 뼈대를 만들었다.
특히 복원 과정에서 신안 보물선이 서양 조선 기술보다 200년 가까이 앞선 세계 최고 수준의 배라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최항순 교수는 “복원된 신안선의 구조를 분석했을 때 항해 속도는 시속 8노트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서양 배가 이 정도 속도에 이른 것은 약 200년 늦은 15세기 끝 무렵”이라며 “14세기 당시 동아시아의 조선 기술이 서양을 월등히 앞선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대륙을 처음 발견했을 때 이용한 배나 바스코 다 가마가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한 배가 신안선과 거의 비슷한 속도를 낸다. 최 교수는 이 같은 연구를 지난해 12월 열린 신안보물선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V자 모양의 고대 쾌속선
신안선이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비결 중 하나는 배가 날렵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서양 배를 비롯해 많은 나라의 배들은 배 밑바닥이 편평하거나 U자 모양이었다. 그러나 신안선은 V자 모양이어서 저항을 적게 받아 현대 요트처럼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다.
이런 배는 상대적으로 불안정해질 수 있는데 신안선은 독특한 구조를 이용해 거친 파도와 오랜 항해를 잘 견딜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배는 배 밑 부분과 갑판 아래 빈 공간에 ‘격벽’이라는 역삼각형(▼) 모양의 칸막이 7개가 있어 배를 지탱한다. 당시 서양 배는 격벽 없이 바닥에 V자 모양의 나무 막대로 배를 지탱했다.
최 교수는 “구조역학으로 볼 때 신안선은 3m 높이의 파도를 헤치며 항해할 수 있었다”며 “기록에 따르면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면 중국을 떠나 한국에 도착했다”고 설명했다. 또 격벽으로 나뉜 배 밑 공간 중 하나에 물이 들어오더라도 다른 공간으로 물이 차지 않기 때문에 항해를 하며 수리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오랫동안 신안선을 연구해 온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 김용한 실장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보면 ‘인도양에서는 항해 도중 배고픈 고래들이 배의 옆구리를 들이받곤 하는데 아랍 배는 쉽게 침수되지만 중국 배는 배에 구멍이 나도 잘 견딘다’라고 써 있다. 신안선은 이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조선사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가 중국 명나라 ‘정화의 배’(정화보선)다. 정화는 당시 명나라 해군 장군으로 15세기초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까지 항해하며 중국의 위세를 떨쳤다. 이 배는 남아있지 않지만 문헌상 130m 길이로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목선 중 가장 크다. 정화의 배 길이가 과장됐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당시 중국이 최고의 조선 기술로 태평양과 인도양을 누빈 것은 분명하다. 정화의 배보다 100년 앞선 신안선은 이 같은 중국의 앞선 항해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신안선의 우수성은 이밖에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신안선의 돛대다. 당시 비슷한 크기의 서양배는 돛대가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신안선은 돛이 3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김용한 실장은 “망망대해에서는 바람의 방향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돛대가 여러 개 있을수록 오랜 항해에 유리하다”고 설명한다.
또 신안선은 바닷물에 닿는 부분을 감싸는 포판재를 이용해 목선의 가장 큰 약점인 바다벌레의 공격을 막았다. 김 실장은 “신안선은 나무 판들이 서로 엇갈려 맞춰져 있는 등 현대 조선에 사용된 기술이 도입돼 있다”고 말했다.
신안선은 1975년 5월 어부의 그물에 배에 실려 있던 도자기가 걸려 올라오면서 처음 발견됐다. 잠수부를 동원해 조사한 결과 고대 중국배가 바다밑 개펄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1981년부터 본격적으로 인양 작업에 들어갔다. 영화처럼 기계나 커다란 풍선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잠수부들이 일일이 나무 조각 하나하나를 들고 올라오는 방식이었다. 잠수부들이 갖고 올 수 있도록 배 전체를 4등분으로 자르기도 했다. 인양에는 4년이 걸렸다.
바다 밑에 흩어진 조각들을 다시 이어 붙이는 복원 작업은 1994년부터 시작됐다. 그 전에 바다에서 가져온 720편의 배 조각들은 대기에 노출돼 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먼저 소금기와 이물질을 빼낸 뒤 수분을 PEG라는 특수 물질로 대체했다.
11년에 걸친 복원작업
실제 복원을 한 것은 전체 조각 중 490여편이다. 포판재나 너무 작은 조각들은 복원에서 제외됐다. 전체 조각을 5분의 1 크기로 축소한 모형을 만들어 조립한 뒤 그 모형에 맞춰 실제 나무 조각을 끼워 맞췄다. 복원 작업에 참가한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학예연구실 이철한 연구사는 “조선소처럼 지게차와 크레인을 동원해 하나하나 조각을 맞췄다”며 “배의 가장 밑에 있는 용골에서 나무 판을 한 단씩 쌓아올리다가 5단을 넘어서자 목재가 너무 벌어져 다시 해체해야 했다”고 고생담을 털어놨다.
문환석 학예연구실장도 “신안선은 비록 중국 배지만 세계적인 보물인데다 우리나라 수중 고고학의 장을 연 귀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최근 중국이 외국에서 발견된 자국 배를 되찾아 오려는 시도를 하고 있어 이 배를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안선이 보물선으로 불리게 된 것은 배에 실려 있는 막대한 무역품 특히 도자기 때문이다. 배에서 발견된 약 2만 점의 도자기는 대부분 중국제며, 고려청자 7점과 약간의 일본 도자기도 있었다. 이 도자기는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되는 것들이었다. 중국은 당시 세계 각지와 해상 무역을 하고 있었는데 신안선이 다닌 바닷길은 비단길에 빗대 ‘도자기의 길’이라고 불린다. 해상 무역에는 한국과 일본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그렇다면 당시 고려의 해상 무역과 조선 기술은 어땠을까. 고려 시대 배 중 신안선처럼 커다란 배가 발견된 적은 아직 없다. 지금까지 고려 시대 배 2척이 바다밑에서 발견됐다. 1983년 전남 완도(11세기), 2004년 군산 십이동파도(14세기) 앞바다에서 발견된 10t급 규모의 연안선이다. 260t급 신안선에 비교하면 아주 작은 편이다.
그러나 국립문화재연구소 김용한 실장은 “당시 고려도 자신의 배로 해상 무역에 활발하게 참여했고, 한 때 원나라의 압력으로 일본을 침공하기 위해 크고 작은 배 900척을 짧은 기간에 만들었던 점을 생각하면 고려의 조선 기술도 매우 뛰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이 탔던 배가 갑판 위에서 말을 탈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신안선과 비슷한 규모다. 또 단국대 사학과 정수일 교수는 ‘한겨레’에 실은 글에서 “9세기 무렵 바다를 주름잡았던 장보고의 신라선도 250t급 규모였다”고 주장했다. 당시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고 문헌을 그대로 믿는다면 고려의 조선기술도 중국과 함께 서양보다 훨씬 앞선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