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4일부터 4일간 일본 도쿄의 신주쿠에서 제20회 도쿄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열렸다. 아시아에 판타지영화의 물꼬를 튼 도쿄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그 역사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들로 가득 찼다.
일본 도쿄의 최대 번화가이자 아시아 최대의 환락가로 익히 알려진 신주쿠 거리는 언제나 젊은이들로 북적댄다. 그 중에서도 복잡하기로 악명이 높은 신주쿠역에서 영화제가 열리는 가부키초의 도큐 밀라노극장을 찾아가는 길은 이상한 나라에 들어서는 앨리스의 여정과 같다. 일단 마법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새로운 판타지의 세계가 펼쳐진다.
재작년까지 도쿄의 시부야에서 개최됐던 영화제는 작년부터 신주쿠구와 가부키초 상가진흥조합의 후원으로 신주쿠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다. 영화의 거리로 소문난 가부키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스크린수는 15개. 평소에도 영화관람객들로 붐비지만 영화제 때문인지 더욱 복잡한 느낌이다.
밤샘하는 판타 팬들
“줄을 서서 밤새 기다려도 행복하다.” 도쿄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대하는 관객들의 이야기다. 도쿄판타라는 깜찍한 애칭으로 불리는 영화제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지나가는 빈말이 아니었다.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는 일은 도쿄판타의 팬이라면 거쳐야할 하나의 유행이 된 것이다.
상영관이 단 한곳에 불과하고 변변한 부대행사 없는 영화제. 관람객은 기껏해야 1만5000명밖에 안 되지만 20년의 명성에 걸맞게 열성 마니아들은 1년 내내 이때를 손꼽아 기다린다. 이들이 있기에 도쿄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함께 일본 판타지영화를 발전시켜가고 있다.
도쿄판타는 저널리스트였던 고마츠자와 요이치의 영화에 대한 열정에서 20년 전 시작됐다. 지금은 호러, SF, 어드벤처 등 다양한 판타지 장르가 어울린 영화제로 성장했다. 알려지지 않았던 보석 같은 작품들이 영화제를 통해 일본에 소개되면서 일본영화가 한층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더욱이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이야기들이 컴퓨터기술의 발달로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상황은 판타지 영화에 날개를 달아줬다. 흔히들 거론하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 등은 최첨단 영화기술의 산물인 것이다.
일본 북부 홋카이도의 유바리시에서 개최되는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도쿄판타의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 한국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도 이곳에서 힌트를 얻어 시작됐다고 한다. 초창기 영화제에 뛰어들었던 신인들은 중견영화인으로 성장해 일본 영화계 곳곳에서 활약 중이다.
가장 판타스틱한 나흘
10월 14일 오후 6시. 전야제가 시작되기 직전, 가부키초의 밀라노극장 입구에 줄지어선 사람들이 극장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극장 안은 금새 인산인해를 이뤘고 카탈로그와 기념품을 파는 상점엔 넘쳐나는 관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먼길을 떠났다 방금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들떠있었다.
“기다리던 도쿄판타 2004! 하루 종일 그리고 올나잇으로, 멋진 영화와의 시간을 함께 즐깁시다”라는 오바 와타루테 PD의 선언과 함께 영화제가 시작됐다. 이어 현란한 특수조명과 화려한 무대장치가 설치된 ‘판타 어트랙션 극장’에서는 디지털 리마스터링(아날로그식으로 완성된 녹음내용을 디지털 방식으로 재녹음한 완성본) 방식으로 일본어를 더빙한 팀 버튼 감독의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상영됐다. 다양한 빛깔의 조명이 극장 안을 화려하게 수놓자 객석이 영화 속 배경처럼 느껴졌다. 곧이어 관객들은 ‘크리스마스의 악몽’ 속으로 빠져들었다. 영화의 등장인물처럼 ‘핼러윈 키즈’로 열연한 오쿠보 초등학생들은 관객들의 박수 갈채를 받았다.
영화제 포스터와 조형물로 장식된 극장 앞 광장에서는 크진 않지만 여러 부대행사도 열렸다. 관객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시네마틱 카페’가 운영됐고 재즈콘서트도 공연됐다. 영화제 관계자·신주쿠구청장·관객들이 참가한 ‘영화와 가부키초’ 포럼도 열려 영화제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을 수렴했다. 나카야마 구청장은 “신주쿠 가부키초가 가까운 장래에 환락가가 아닌 ‘영화와 문화의 거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영화제를 만들어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올해 영화제에선 단편경쟁부문 ‘디지털쇼트상품 600초’ 15편을 포함해 모두 41편이 상영됐다. 이 중 미국의 ‘크리스마스 악몽-디지털 리마스터링판’과 페막작 한국의 ‘분신사바’, 미국의 ‘톱’, 태국의 ‘본 투 파이트’,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옮긴 ‘철인28호 인터내셔널 버전’, ‘기동전사 Z건담-별을 잇는 사람’ 등이 많은 관심을 끌었다. 특히 차세대를 담당할 크리에이터 발굴을 목적으로 개최된 ‘디지털쇼트상품-600초’와 한국과 태국영화의 흐름을 보여준 ‘한류VS타이도’(태국의 길)에 대한 관객의 호응이 높았다.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돼 관객을 충격과 공포 속으로 내몰았던 미국의 ‘톱’은 ‘프리미엄 호러 나이트’ 부문에 상영되면서 관심을 끌었던 작품. 살인 게임을 즐기는 사이코 살인마의 덫에 걸린 두 명의 남자가 겪게 될 운명을 그린 서스펜스 스릴러물인 ‘톱’은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들 때문에 미국 개봉시엔 재편집판이 상영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쿄판타의 오리지널 버전은 일본 관객들을 경악케 했다. 각본, 원안, 주연을 맡았던 리 웨넬은 게스트로 초청돼 팬들과의 깜짝 만남을 가졌다.
‘기동전사 Z건담-별을 잇는 사람’은 TV판 50부작을 기초로 재편집하고 새로운 장면을 삽입해 만들어진 3부작 중 1부. 영화제를 통해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 중 하나로, 건담에 대한 일본인의 사랑을 확인케 해준 작품이었다. 1부에서는 지온공국과 지구연합의 1년 전쟁이 끝난 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철인28호 인터내셔널 버전’은 동명의 만화를 배우를 동원해 영화로 재탄생시킨 작품. 로봇 애니메이션의 원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철인 28호’는 그동안 만화와 애니메이션·드라마로 여러 차례 제작됐고, 올해는 실사영화로 만들어졌다. 블랙옥스가 출현해 대도시 동경을 파괴하자 아버지가 남겨준 철인 28호로 블랙옥스와 대적해 싸우는 카네다 세이타로의 모험이 일본 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한국영화는 한류의 열풍을 증명하는 듯 했다. 지난 2002년과 2003년에 ‘화산고’와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각각 개막작으로 선정돼 좋은 평가를 받았다. 금년에는 ‘가위’, ‘폰’에 이어 세 번째로 초청된 안병기 감독의 ‘분신사바’가 폐막작으로 상영돼 호평을 받았다.
600초에 거는 승부
도쿄판타엔 재능있는 크리에이터를 찾아내기 위한 고민과 열정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영화제 집행위원인 시오다 도키토시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역사지만 영화제를 지속하다보니 매너리즘에 빠진다. 매너리즘을 타파하고 새로운 재능을 가진 감독을 발굴해내기 위해 단편경쟁인 ‘디지털쇼트상품 600초’를 기획했다”고 말한다. 600초, 즉 1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내에 1초의 과부족 없이 영화를 만들게 함으로써 재능과 끼를 겸비한 크리에이터를 발굴해내려는 것이다.
이런 노력으로 작년 그랑프리 수상작은 국내외의 여러 영화제에 초대되는 성과를 이뤄냈다. 올해에는 각본부문 ‘600초:WORDS’가 추가돼 단편부문의 경쟁은 더욱 확대됐다. 이토 세이코 프로듀서는 “도쿄판타니까 할 수 있는 차세대를 이끌어갈 젊은 크리에이터들의 재능을 발굴하는 장소로서 영화제를 봐달라”고 주문했다.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SF
철인28호의 고향이자 일본 SF애니메이션의 최전선에서 열린 영화제답게 관객들은 SF영화에 대한 애정을 아끼지 않았다. ‘기동전사 Z건담’을 보기 위해 천리를 마다하지 않았고, 이미 수차례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봐와서 지겨울 법도 한 ‘철인28호’를 다시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집행위원회는 과감히 과거 1960∼1970년대 제작됐던 ‘감마3호 우주대작전’(1968)과 ‘스파이더맨’(1978)도 상영목록에 올렸고 관객은 화답이라도 하듯 몰려들었다. 호러, SF, 어드벤처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상영된 도쿄판타였지만 일본 관객들의 SF영화에 대한 애정은 대단했다.
다양한 SF애니메이션과 영화가 생산되고 SF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이 있는 한 일본에서의 SF영화제는 승산이 있어 보였다. 집행위원인 시오다 도키토시는 SF영화제의 가능성에 대해 “관객이 원하고, 장르의 특화가 잘 이뤄진다면 얼마든지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혁신적인 SF영화가 끊임없이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의 도쿄판타스틱영화제를 만든 것은 돈이 아니었다. 영화제는 한 개인의 열정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관객들의 영화제이다. 정부나 기타 지방자치단체의 경제적 후원 없이도 성공적인 영화제로, 20년의 역사를 가진 영화제로 거듭난 것은 일본 영화팬들의 애정이었다. 도쿄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적은 예산으로도 성공적인 국제영화제를 치러낼 수 있음을 보여줬다.
“성공하는 영화제를 위해선 보통 영화관에서 볼 수 없는 작품들을 소개해야 한다. 새로운 재능의 발견과 테마를 통해 발굴한 영화들을 보여주는 영화제야만 관객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 영화제와 소통한 관객들은 다시 영화제를 지속시키는 힘이 되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600초’를 통해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고 관객과 함께 호흡해 나가려 한다.” 시오다 도키토시 집행위원의 말처럼 영화제도 결국 관객들의, 관객을 위한 문화행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