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에 가까운 어머니께서 컴퓨터로 영상시와 이메일을 보내주세요. 힘들고 지칠 때 어머니를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나지요.”
서울대 화학부 백명현 교수(56)의 어머니 양민용 여사(78)는 전형적인 ‘아침형 어머니’다. 지금도 오전 4시면 일어나서 영어와 컴퓨터 공부를 하신다. 한순간도 낭비하는 일이 없다. 끊임없이 배우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가야금 뜯는 어머니, 바이올린 켜는 딸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지식이다. 지식을 쌓는 데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백 교수의 어머니는 지식을 강조했다. 이런 어머니의 교육철학이 백 교수가 세계적인 화학자가 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신동’과 ‘천재’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던 백 교수는 당시 전라북도에서 유일하게 서울 경기여중에 합격하면서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과학과 수학에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는 창의적인 과학 수업을 하시던 과학 선생님의 영향으로 과학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질문과 토론 방식으로 진행된 과학 수업은 초등학교 때부터 길러온 과학적인 사고를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기회였고, 선생님의 적절한 칭찬은 그의 생각을 더욱 북돋아주었다.
“자기 계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어머니는 정서교육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고 저에게 바이올린을 사주셨어요. 어머니는 가야금을 뜯고 저는 바이올린을 켰죠. 정규과목뿐 아니라 미술, 체육, 무용 등 예체능 교육에도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어머니의 전인교육덕분에 백 교수는 공부만 잘하는 모범생이 아니었다. “전 과목 공부도 마찬가지였지만, 바이올린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경기여고 시절 그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정도로 바이올린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아버지는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의 아버지는 한양대 수학과 교수를 지냈다. 그는 아버지에게 수학과 과학에 대한 소질을 물려받은 것 같다고 얘기한다.
실제로 백 교수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수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1학년을 마칠 즈음, 전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뭔가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고 싶은데, 수학을 전공해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 수학의 이용 분야가 넓다는 생각은 못한 것 같아요.”
이런 생각에 그는 전공을 화학으로 바꿨다. 당시의 이런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는 지금까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질을 만들고 있다. 자신의 결정을 헛되이 하지 않은 셈이다.
이온교환수지, 다공성화합물, 초분자다공성화합물. 이름은 너무 생소하지만 실제로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질이다. 이런 물질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초분자 디자이너
그는 새로운 초분자를 만드는 ‘디자이너’다. 천으로 옷을 디자인하듯이 그는 분자를 갖고 초분자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그는 초분자를 만들기 전에 특정 기능을 갖도록 미리 디자인한 다음, 레고 블록을 만들 듯이 원하는 초분자를 하나하나 조립한다. 조립된 초분자는 원하는 기능이 나오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자인이에요. 원하는 기능을 갖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초분자를 디자인해야 하는지 미리 정해야 해요.”
그는 이런 연구를 하는 데는 창의력이 요구된다고 얘기한다. 자신의 창의력은 어렸을 때부터 길러온 감성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감성은 예체능 교육에서 얻었을 것이라고.
초분자는 분자가 2개 이상 모여 있는 거대분자다. 쉽게 말해 레고 블록 조각 하나하나가 일반분자라면, 레고 블록을 조립한 형태는 초분자다. 초분자화학은 원하는 기능과 모양을 마음대로 조립해 원하는 물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최첨단 화학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일반적으로 고체에 압력 등 자극을 가하면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런데 백 교수가 세계 최초로 만든 신물질은 자극에 대해 생물처럼 움찔거리며 반응을 한다.
또 반도체칩의 기능을 분자 크기에서 실현시키는 기억소자, 수소 기체를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는 용기의 재료 등도 만들어냈다. 이런 연구결과들의 활용범위는 무궁무진하다. 현재보다 수만배 처리능력이 뛰어난 슈퍼컴퓨터를 만들고 환경친화형 수소자동차에 장착될 연료통을 개발하는 데 밑거름이 된다.
이런 세계적인 연구로 그는 1997년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국제 과학 학술지인 ‘배위 화학 리뷰’(Coordination Chemistry Review’s)의 편집위원으로 선정됐다.
또 ‘유럽 무기화학 저널’(European Journal of Inorganic Chemistry)의 편집고문, ‘국제 순수 및 응용 화학 총연합회’(IUPAC) 무기 화학 분과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세계의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항상 새로운 도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언제나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생고생해서 완성한 최신 연구논문을 외국 학자들이 믿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아무도 그런 연구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속상하지만 더 정확한 결과를 얻기 위해 연구하는 동안, 다른 학자들에 의해 관련 논문이 나오면서 그의 주장이 비로소 인정을 받게 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백 교수의 어려움을 가장 알아주는 사람은 남편이자 서울대 화학부 동료인 서정헌 교수다. 대학 동기였던 그들은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했고 함께 유학을 떠났다.
서 교수는 힘든 유학생활 동안 그의 곁을 든든히 지켜줬다. 지금 까지도 때론 부부로 때론 동료로 때론 경쟁자로 학문과 인생을 같이 하고 있다.
백 교수는 한 분야에 대해 업적을 인정받게 되면 미련 없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길 좋아한다. 그에게 시련은 늘 새로운 변화의 계기였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찾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려는 그의 정신은 끊임없이 변화하려는 어머니의 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연구는 한참 지난 유행가를 부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것은 언제나 흥분을 가져다주지요.”
신물질은 내 손안에
요즘 그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새로운 분야에 몰두해 있다. 초분자와 나노물질을 접목해 두가지 성질을 가진 새로운 물질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실제로 최근 세계 최초로 초분자에 실버나노입자가 들어 있는 물질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초분자에 나노입자가 들어 있을 뿐, 그가 생각하고 있는 초분자-나노 물질은 아니다.
초분자-나노 물질은 초분자의 성질과 나노입자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새로운 성질을 가지고 있는 물질이다.
이 결과가 물질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만들지 못한 신물질이 나올 가능성은 크다.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자기 계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비결이라고 얘기하는 백 교수.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야.” 지금도 틈틈이 떠올리는 ‘어린왕자’의 이 구절은 백 교수를 끊임없이 새로운 모험으로 떠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청소년들이 어린왕자처럼 순수하고 맑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