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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관 다스려 난치병에 도전한다

암엔 핏줄 많고 심장병엔 부족

 

혈관 다스려 난치병에 도전한다


“드디어 우리가 해냈어!”

지난 여름 늦은 시간까지 불을 밝히고 초조한 마음으로 실험결과를 기다리던 KAIST 혈관내피연구실의 조정현 박사와 석사과정 학생 김경은씨는 서로 마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현미경에 연결된 모니터에 생쥐의 기관지와 귀의 모세혈관에서 마치 나뭇가지처럼 새로 자라고 있는 혈관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1주일 전 이들은 생쥐의 꼬리 정맥에 ‘콤프-안지원’ 이라는 물질을 투여했다. 콤프-안지원은 건강한 혈관 생성을 유도하는 단백질로, 연구팀이 지난 5년간 심혈을 기울여 세계에서 처음 개발한 물질이다. 콤프-안지원은 건강한 혈관이 부족해 고통받고 있는 심장병이나 뇌졸중 환자의 치료제로 사용될 전망이다. 이를 이용해 혈관이 생성되는 메커니즘을 연구하면 혈관이 지나치게 많이 만들어지는 암을 정복하는데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몸의 혈관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질병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자.

만성질환 30% 이상에 혈관 생성 관여

혈관은 인체에서 2가지 경로로 만들어진다. 발생 초기에 장기와 조직이 형성될 때는 어린 혈관세포가 증식, 분화해서 그물 모양의 혈관을 만든다. 이 과정을 ‘혈관형성’ (vasculogenesis)이라고 한다.

또다른 경로는 ‘혈관신생’ (angiogenesis). 이는 원래 있던 모세혈관으로부터 새로운 혈관이 생성되는 과정이다. 마치 나무줄기에서 가지가 뻗어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혈관내피세포는 활발히 증식해 혈관이 만들어져야 할 곳으로 이동하고 혈관을 만드는데 필요한 효소도 많이 분비한다. 발생 초기에는 주로 혈관형성이, 그 이후에는 주로 혈관신생이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정상적인 경우 혈관신생은 상처가 치유될 때, 여성의 배란기에 자궁벽이 두꺼워질 때, 수정란이 태아로 자랄 때 일어난다. 이를 제외하고 혈관신생은 여러 성장인자와 그 수용체의 복잡한 작용을 통해 엄격하게 억제된다.

그러나 암이나 류마티스 관절염 같은 질병의 경우 혈관신생이 제대로 조절되지 못한다. 실제로 암이나 류마티스 관절염이 생긴 부위에는 혈관이 지나치게 많이 분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암, 관절염, 에이즈, 당뇨병 환자는 혈관신생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일어난다. 당뇨병 환자 눈의 망막에 비정상적인 혈관이 과다하게 증식해 혈액이 새어나오면 심한 경우 시력을 잃기도 한다. 반대로 심장병, 불임, 조직경화증, 뇌졸중, 만성궤양 환자는 혈관신생이 비정상적으로 적게 일어나 혈액이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다.

이런 질병들은 현대인이 앓고 있는 만성질환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때문에 혈관신생을 조절하는 것이 의학과 생물학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혈관신생 조절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진행돼 왔을까.

혈관 만드는 단백질 발견

1971년 미 하버드대 소아병원의 주다 포크만 박사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혈액이 공급되지 않으면 암조직이 일정한 크기 이상 자라지 않는다는 것. 즉 암조직은 혈관이 만들어지도록 촉진하는 물질을 분비해서 자신에게 연결되는 혈관을 만들고, 그 혈관을 통해 충분한 영양과 산소를 공급받아 자란다는 말이다. 외과의사인 포크만 박사는 암환자를 수술하면서 암조직 내부와 주변에 혈관이 많이 모여있는 것을 관찰하고 이 같은 주장을 폈다.

지금은 이 이론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불과 30여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포크만 박사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혈관의 생성을 촉진하는 물질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4년 암세포에서 혈관내피세포의 증식을 돕는 단백질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혈관이 만들어지는 것을 촉진하는 물질이 있으니 반대로 방해하는 물질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 포크만 박사는 연구를 계속한 끝에 1996년과 1997년 혈관신생 억제 단백질인 ‘안지오스타틴’ 과 ‘엔도스타틴’ 을 각각 발견했다.

한편 시칠리아 태생의 산부인과 의사 나폴레옹 페라라 박사도 혈관신생 연구에 접근했다. 그는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박사 후 연구과정 때 배양 중이던 혈관내피세포에 젖소의 뇌하수체 추출물을 투여했더니 세포들이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하는 것을 관찰했다. 1988년 미국 생명과학회사인 제네텍에 입사한 후에도 그는 어떤 물질이 혈관내피세포를 증식하게 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몇달 동안 밤도 주말도 없이 연구에 몰두했다.

1989년 마침내 페라라 박사는 혈관신생의 가장 핵심적인 단백질인 ‘혈관내피세포 성장인자’(VEGF, 이하 혈관성장인자)와 그 유전자를 찾아냈다. 포크만 박사가 분리한 혈관신생 촉진 단백질의 정체를 밝힌 셈이다. 페라라 박사는 암세포가 정상세포보다 혈관성장인자를 많이 분비해 증식하는데 필요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는 혈관을 만든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혈관성장인자가 많을수록 암조직이 더 잘 자라는 것도 관찰했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에 착안한 페라라 박사는 혈관성장인자가 작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항체를 만들면 암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혈관을 만들지 못하게 한다면 암조직이 더이상 자라지 못할 거란 얘기다. 실제로 그가 만든 항체 ‘아바스틴’은 임상시험에서 결장암 환자의 생존기간을 30%나 늘리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아바스틴은 2004년 1월 미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암 치료제로 승인받았다.

혈관 생성 억제하면 암 치료 가능

페라라 박사가 발견한 혈관성장인자는 혈관형성과 혈관신생을 촉진하는 대표적인 물질이다. 발생 초기 배아에는 세포가 수십-수백개 존재한다. 이때는 세포 생존에 필수적인 산소를 각 세포끼리 전달해 공급받는다. 하지만 배아의 크기가 1-2mm3를 넘으면 세포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세포들이 모두 산소가 부족한 상태가 된다. 따라서 이때 세포들은 혈관성장인자를 분비해 자신의 주변에 혈관을 만들어 혈액을 통해 골고루 산소를 공급받는 것이다.

암이 진행될 때도 마찬가지다. 암세포는 정상세포보다 과다하게 증식하기 때문에 쉽게 산소가 부족해진다. 혈관이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해주지 않으면 암조직은 1-2mm3 이상 자라지 못한다. 따라서 암세포는 주변에 혈관을 만들기 위해 혈관성장인자를 많이 분비하고 이와 결합하는 수용체의 발현도 증가시킨다.

그런데 혈관성장인자는 혈관뿐만 아니라 림프관도 새로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암조직을 관찰해보면 그 주변에 혈관뿐만 아니라 림프관도 많이 분포해 있다. 학계에서는 림프관은 주로 암이 전이되는데 쓰일 것이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암세포가 주변의 림프관 안으로 들어와 이를 타고 인체 내 다른 조직으로 이동하면 결국 암이 전이된다는 것이다. 현재 핀란드 헬싱키대 카리 알리탈로 박사 연구팀이 이와 같은 연구의 선두주자다.

그렇다면 암조직 주변에서 혈관과 림프관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을 억제하면 암조직의 성장 뿐 아니라 전이까지도 막을 수 있다는 얘기. 이에 많은 제약회사나 생명과학 회사들이 혈관이나 림프관의 신생을 억제하는 물질을 개발해왔다. 혈관성장인자에 달라붙어 혈관을 만들지 못하도록 막는 아바스틴도 그 중 하나다. 기존의 항암제가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설사를 하는 등의 부작용이 있는데 비해 이 같은 혈관신생 억제제는 부작용이 거의 없다.

4년 내 건강한 혈관 만드는 신약 등장

혈관신생이 과다하게 일어나면 혈관신생 억제제를 투여하지만, 혈관이 부족하면 혈관신생 촉진제를 투여해 치료해야 한다. 혈관이 부족해 혈액이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는 허혈성 질병은 심장, 뇌, 다리 아래쪽에 많이 나타나며, 사회가 선진화될수록 환자가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다.

심장은 관상동맥으로 들어오는 혈액을 통해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관상동맥 안에 지방이나 섬유질이 쌓여 좁아지면 혈액이 원활히 흐르지 못해 심장에 혈액이 잘 공급되지 못한다. 이때 좁아진 관상동맥을 확장하기 위해 수술을 한다. 그러나 관상동맥의 여러 부위가 좁아져 있는 경우 일일이 모두 수술해 회복시키기는 어렵다.

미 터프츠대 성 엘리자베스 병원의 제프리 이스너 박사 연구팀은 혈액이 부족한 심장이나 다리에 혈관성장인자 유전자를 투여해봤다. 그랬더니 혈관이 새로 만들어져 혈액이 공급되기 시작했다. 허혈성 질병을 혈관신생 방법으로 치료한 첫 시도였다.

문제는 혈관성장인자가 혈액이 새어나가는 엉성한 혈관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 이때는 혈관성장인자를 투여한 부위가 붓거나 염증이 생긴다. 혈관성장인자가 혈관을 지나치게 많이 만들면 자칫 암으로 진행하는 부작용이 생길 위험도 있다.

1996년 미 바이오벤처회사 리제네론의 조지 얀코풀로스 박사 연구팀은 ‘안지오포이에틴’ 이라는 단백질을 찾아냈다. 안지오포이에틴은 혈액이 새지 않는 튼튼한 혈관을 만든다. 혈관성장인자보다 더 나은 혈관 생성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물에 잘 녹지 않으며 분자가 너무 크고 구조도 복잡해 약물로 합성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끈적끈적해서 보관용기나 실험기구에 잘 달라붙기 때문에 다루기도 쉽지 않다.

필자의 연구팀은 안지오포이에틴 전체 분자구조 중 앞쪽의 불안정한 부분이 이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렇다고 이 부분을 잘라내면 아예 혈관을 만들지 못하게 된다.

연구팀은 안지오포이에틴의 불안정한 부분을 그보다 작으면서도 안정된 구조를 가진 ‘콤프’(COMP)라는 분자로 대치했다. 콤프는 몸 안에 이미 존재하는 단백질 조각이다.

이같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세계 최초로 개발된 물질이 바로 ‘콤프-안지원’(COMP-Ang1). 실제로 콤프-안지원을 생쥐 눈의 각막에 투여하자 혈관성장인자나 안지오포이에틴을 투여했을 때보다 건강한 혈관이 많이 생성돼 혈액의 양이 증가했다. 생쥐의 귀와 기관지에 투여했을 때도 건강한 혈관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콤프-안지원의 연구결과는 세계적 학술지인 ‘미 국립과학원회보’ 4월호에 게재됐다. 현재 국제특허도 출원 중이며, 심장병과 뇌졸중 환자에게 사용하기 위한 전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콤프-안지원은 앞으로 4-5년 이내에 치료제로 개발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비정상적인 혈관신생을 조절하는 과학기술은 지난 10년간 많이 발전해왔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최근 강원대, 서울대, 성균관대, 포항공대, 강릉대, 세종대, 연세대 등 국내 여러 대학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혈관신생 관련 연구가 이 분야의 신약개발에 주춧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장암

맹장과 직장을 제외한 대장의 가운데 부분인 결장에 생긴 암.

림프

모세혈관에서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을 제외하고 빠져나온 혈장 성분이 조직세포 주변에 있다가 림프관으로 들어오면 림프라고 부른다. 혈액처럼 온몸을 돌면서 영양소와 면역 항체를 운반한다.

관상동맥

심장벽을 둘러싸고 있는 동맥. 심실과 심방을 관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어 관상동맥으로 불린다. 이를 통해 흐르는 혈액이 심장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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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고규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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