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나 들리는 최신 유행가. 하지만 그 노래를 부른 가수는 좀처럼 외모를 공개하지 않는다. 요즘 엔터테인먼트 기획자들이 자주 활용하는 이른바 ‘신비주의 마케팅’ 방법이다.
아무래도 신비주의 마케팅 전략의 시초는 우리 몸속에 있는 단백질인 듯하다. 어떤 기능을 하는지 잘 알려져 있는 단백질이라도 도무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석사과정 3명, 박사과정 3명, 박사후연구원 1명으로 구성된 KAIST 화학과 단백질 구조 연구실 식구들은 단백질의 구조를 밝혀내느라 밤샘도 마다하지 않는다.
단백질은 몸에서 일어나는 생명현상을 조절한다.DNA에 담긴 유전정보가 RNA로 옮겨지고 이를 토대로 20가지 종류의 아미노산이 다양하게 조합돼 수많은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결정 만들기가 성공의 관건
아미노산이 길게 배열된 것을 1차 구조, 이것이 병풍이나 코일 같은 모양을 만든 것을 2차 구조라고 한다. 2차 구조가 접히고 꼬이면 입체적인 3차 구조다.단백질은 이같은 입체구조가 돼야 생리적 기능을 할수 있다. 어떤 단백질은 같은 구조가 2개 이상 모인 4차 구조가 돼야 비로소 제기능을 한다. 단백질의 기능과 구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연구팀은 단백질 구조를 어떻게 알아낼까. 우선 단백질의 DNA를 확보한다. 이를 다른 DNA를 운반해주는 DNA 조각인 벡터에 삽입한다. 벡터를 세균이나 곤충 세포에 넣는다. 세포는 벡터에 들어있는 DNA가 자신의 것인 줄로 착각하고 염색체에 넣어 그 DNA의 유전정보에 맞는 단백질을 대량 만들어낸다.
만들어진 단백질을 추출한다. 여기에 다른 단백질이나 불순물이 섞여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깨끗이 정제해야 한다. 수직으로 세운 긴 유리관에 실리카겔 같은흡착제를 채우고 단백질을 넣은 다음 용매를 흘려준다. 단백질마다 전하, 무게, 크기 등이 제각각이므로 용액이 흘러내려오면서 단백질이 종류별로 분리된다. 이 중구조를 알고 싶은 단백질만 골라내면 된다. 이 방법을크로마토그래피(chromatography)라고 한다.
골라낸 단백질은 적당한 용매에 녹인 다음 용해도를 낮춰 가라앉힌다. 이때 pH나 온도 같은 조건을 조절해 단백질이 규칙적으로 차곡차곡 쌓이면서 엉겨붙게 해야 한다. 마치 ‘앞으로 나란히’ 하며 줄을 맞춰 서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단백질 ‘결정’ 이라고 한다.
결정에 X선을 쪼인다. 그러면 단백질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의 종류나 배열에 따라 특정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회절현상이 일어난다. 원자의 종류와 배열이 단백질마다 다르기 때문에 각 단백질은 고유한 회절패턴을 보인다. 이를 컴퓨터로 분석해 구조를 알아낸다.
그런데 만약 단백질이 가라앉을 때 무작위로 아무렇게나 엉겨붙어버리면 단백질을 구성하는 원자도 무질서하게 배열된다. 여기에 X선을 쪼여봤자 회절패턴이 매우 약하게 나타나 측정이 불가능하다. 결정을 만들면 원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되므로 동일한 X선 패턴이여러개 합쳐져 강해지기 때문에 측정할 수 있다.
화학과 생물학 잇는 인터페이스
하지만 불행하게도 결정 만들기는 쉽지 않다. 결정이 만들어지는 용매, 온도, pH 같은 조건이 단백질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 조건들을 일일이 찾아내 결정을 만드는 동안 내내 맞춰주는 게 보통 까다로운 일이아니다. 미세한 변화에도 실패하기 일쑤다. 입맛 까다로운 손님의 요구에 따라 음식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들어봐야 하는 요리사의 심정이라고 할까. 게다가 깨끗한 단백질을 충분히 확보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구조 분석이 오래 걸리는 이유다.
연구실에서는 주로 질병을 일으키는 단백질에 주목한다. 지난해 류마티스 관절염처럼 자기 몸을 자기가 공격해 병을 일으키는 B세포 활성화 인자, 고혈압을 일으키는 안지오텐신 변환효소의 구조를 알아냈다. 올해는 중환자실에서 가장 많은 사망 요인 중 하나인 패혈증을 일으키는 지다당류와 천식을 일으키는 효소의 구조를 분석하고 있다. 연구실 식구들은 구조 분석을 위해 생물학은 물론 화학, 수학, 물리학, 컴퓨터까지 과학의 여러 영역을 넘나든다.
단백질 구조 연구는 화학과 생물학을 연결하는 인터페이스다. 예를 들어 약이 몸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연구하는 것은 생물학이고 약을 합성하는 것은 화학이라면, 약과 몸안의 단백질이 어떤 구조로 상호작용하는지를 밝히는 연구는 그 중간 영역인 셈이다.
독일 하르트무트 미켈 박사와 요한 다이젠호퍼 박사는 세포막 단백질의 구조를 밝힌 공로로 1988년노벨화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2000년 세포내소기관인 리보솜의 복잡한 구조를 밝혀낸 이스라엘 와이즈만연구소 아다 요나드 박사와 미 예일대 톰 스타이츠 박사 연구팀도 향후 노벨상을 기대할 만하다고 학계는 평가하고 있다. 단백질 구조를 밝히는 일은 그만큼 어렵고도 중요하다.
연구실을 이끄는 이지오 교수는 “약 자체의 구조는알지만 약이 몸안의 단백질과 어떤 구조로 결합하는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3차원 구조는 단백질의 기능 연구뿐만 아니라 신약을 개발하는데도 유용한 정보”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