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4월 20일 파리의 한 허름한 창고에서 젊은 부부가 상처로 얼룩진 두손을 마주잡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가 와도 제대로 차양 구실을 못하는 유리 지붕 아래 한여름이면 한증막이 돼버리기 일쑤고 겨울이면 추위로 곱아드는 손을 녹여야만 했던 이 실험실에서 고생한지 4년째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들은 이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으로 온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부부였다. 이날 그들은 자신들이 4년 전에 공표했던 새로운 원소, 즉 라듐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1dg(데시그램, 1dg=10분의 1g)의 순수한 시료를 추출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라듐의 원자량이 2백26임을 밝혔다.
결정구조와 물체의 자성에 관한 연구를 하며 파리산업물리화학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피에르 퀴리와 폴란드 출신으로 물리학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마리 스크로도브스카가 결혼한 것은 1895년이었다. 이 해는 독일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의 X선 발견으로 물리학계가 떠들썩하던 때이기도 하다. 또한 이듬해에는 X선 방사 형광 물질을 연구하던 앙리 베끄렐이 기체를 이온화시키고 전기나 자기에 의해 구부러지는 우라늄 방사선을 발견하게 된다.
이즈음 마리 퀴리는 베끄렐의 발견에 특히 흥미를 느껴 이를 자신의 박사 논문 주제로 삼기로 했다. 뢴트겐의 X선은 외부에서 에너지를 주입해야만 발생할 수 있는 반면, 베끄렐의 방사선은 이런 에너지 없이도 저절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마리 퀴리는 이런 현상이 어쩌면 물질을 구성하는 성분의 고유한 특성에서부터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는 우라늄광이 아닌 다른 광석에서도 이런 성질이 발견되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남편이 근무하던 학교의 자재창고를 실험실로 쓰게 된 마리 퀴리는 연구를 시작한지 두달만인 1898년 4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우라늄뿐만 아니라 토륨에서도 방사선이 나온다는 것과 섬우라늄광(산화우라늄)과 샤르코리트(인산동과 우라닐 인산)의 경우는 우라늄광보다 훨씬 강한 방사선을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에 마리 퀴리는 이들 광석에 어떤 새로운 화학 원소가 들어 있어서 이런 특성을 보인다고 가정하고 이 특성을 ‘방사능’(radioactivity)이라고 명명했다.
한편 아내의 발견에 흥미를 느낀 피에르 퀴리는 자신의 연구는 제쳐두고 마리의 실험실 작업을 돕기 시작했다. 미지의 화학 원소를 찾아내기 위한 두사람의 공동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1898년 7월과 12월, 두 사람은 공동명의로 ‘콩트 랑뒤’라는 학술지에 섬우라늄광에서 분리한 물질속에 마리의 모국 폴란드의 이름을 딴 ‘폴로늄’과 광선(ray)에 해당하는 라틴어를 따서 이름붙인 ‘라듐’이라는 새로운 방사능 원소가 존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날 이후 두사람은 순수한 폴로늄과 라듐 분리를 위한 대장정을 시작했다. 산업물리화학대 교정에 있는 목조 가건물에 마련된 실험실에서 마리 퀴리는 광석 분리 작업을 맡았고 피에르 퀴리는 분리 시료를 측정하는 작업을 맡았다. 실험에 쓸 재료였던 섬우라늄광은 당시 대단히 비싼 광석이었지만 다행히 빈 과학 아카데미의 알선으로 현재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요아힘슈탈 광산에서 무료로 1t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실험 작업은 두 사람에게 엄청난 정신적 인내와 육체적 고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특히 분리 작업을 맡은 마리 퀴리는 매일 20kg이 넘는 광석을 용해시켰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곤죽같이 녹은 광석을 내 키만한 쇠막대로 온종일 저어야만 했다. 저녁때가 되면 피로 때문에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고통을 감내하면서 마침내 1902년을 맞이한 것이다.
라듐의 존재를 입증한 두사람은 1903년, 앙리 베끄렐과 공동으로 ‘방사능 현상에 관한 연구에 공헌한 기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마리 퀴리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가 수상 후보로 추천하지 않았지만, 피에르 퀴리에게 편지를 보냈던 스웨덴의 여성 수학자 마그누스 괴스타 미탁레플러(Magnus Goesta Mittag-Leffler)에 의해 정식 후보로 추대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수상한 첫 여성이자, 1911년 노벨 화학상까지 받아 노벨상을 두번 수상한 최초의 과학자가 됐다.
라듐 분리에 성공한 후 피에르 퀴리는 살아있는 생물체에 미치는 라듐의 효과를 연구하기 시작해, 의학자들과 공동으로 라듐이 비정상 세포를 파괴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런 연구가 알려진 이후 세간에 라듐이 암과 피부병, 다른 만성 질병의 특효약으로 소개돼 라듐산업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라듐을 이용한 치료법은 그후 ‘퀴리 요법’으로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이 라듐은 교통사고로 남편을 여의고 홀로 남은 마리 퀴리에게 방사능 오염에 의한 만성 백혈병을 안겨줬다. 계속된 라듐과 폴로늄 분리 작업으로 퀴리 부부가 받은 피폭량은 일주일간 1렘에 달했다고 한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0.03렘도 위험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