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난생 처음으로 바라본 바다였다/희디흰 목덜미를 드러내고/끊임없이 달려오던 삼각파도였다”
마치 자신이 정호승 시인이라도 되듯 친구는 ‘첫 키스에 대하여’ 열을 내며 말해주지만 난들 어찌 알겠습니까, 그때 그곳에서 파도를 본 것은 내가 아닌 걸요. 안 그래도 겨울비가 내려 스산한데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뼈 속까지 시린 외로움을 느끼게 되죠. 그렇지만 너무 상심하지는 맙시다. 이제 누구라도 당당히 첫 키스를 할 수 있는 때가 다가오니 말입니다.
서양에서는 예로부터 크리스마스가 되면 각 가정에서는 크리스마스트리 외에 천장이나 현관문에 겨우살이(Mistletoe) 가지를 매달아두는데, 바로 그 밑에 서 있는 소녀에게는 누구나 키스를 해도 된다고 합니다.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에서 산드라 블록과 빌 풀맨도 크리스마스 아침에 현관문 위에 매달려 있는 겨우살이 장식 밑에 우연히 같이 서있다가 키스를 하면서 결국 결혼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 풍습은 북유럽의 신화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사랑과 빛의 신인 발다르는 자신이 곧 죽게 되리라는 꿈을 꿉니다. 그러자 발다르의 어머니인 프리그가 땅위에 발붙이고 사는 모든 동식물이 발다르를 보호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다르는 겨우살이 가지로 만든 독화살을 맞고 죽게 됩니다. 이때 프리그가 흘린 눈물이 겨우살이의 붉은 열매를 희게 만들면서 발다르를 다시 소생시켰다고 합니다. 프리그는 발다르의 소생을 기념하기 위해 독화살이 된 죄를 용서하고 이 나무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키스를 하도록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발다르를 죽게 한 것은 프리그 자신이었습니다. 겨우살이는 다른 나무 위에서 자라는 기생식물입니다. 겨울철 앙상한 가지 위에 이상하게도 푸른 잎을 가진 나무가 바로 그것입니다. 즉 겨우살이는 땅에 발붙이는 생물이 아니므로 프리그의 요청을 따르지 않아도 무방했던 셈입니다. 독화살을 만든 사악한 신은 프리그의 허점을 노린 것이죠.
겨우살이는 어떻게 다른 나무위로 올라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은 이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겨우살이의 고대 영어 이름은 ‘mistletan’인데 배설물(dung)을 뜻하는 ‘mistle’과 가지(twig)라는 ‘tan’이 결합돼 만들어진 것입니다. 산새가 겨우살이의 열매를 먹은 뒤 씨가 섞인 ‘배설물’을 ‘나뭇가지’에 남기면서 기생생활이 시작되는 것이죠. 배설물에는 끈적끈적한 열매의 육질도 일부 포함돼 있는데 이는 씨앗이 나뭇가지에 단단히 달라붙게 합니다.
겨우살이 열매는 새들이 좋아하는 먹이이지만 사람들에게는 류머티즘이나 고혈압을 치료하는 약재로 많이 사용됐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자생하는데 특히 뽕나무 위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는 임금님만 잡숫는 귀한 약제로 여겼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겨우살이 추출액의 항암효과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미국 암연구소에 따르면 현재 30건 이상의 임상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물론 아직 약효가 입증된 단계는 아니라고 합니다.
한편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우리에게 더많이 알려진 것은 잎에 뾰족한 가시가 나있는 호랑가시나무입니다. 찰스 파나티란 사람이 쓴 ‘일상의 특별한 기원’이란 책에서는 중세 교회가 겨우살이 장식 풍습을 고대의 우상숭배전통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금지하자 대신 호랑가시나무를 매달게 됐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가시는 예수가 쓴 가시관을, 붉은 열매는 흘린 피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호랑가시나무 역시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 많이 자랍니다. 특히 변산반도의 부안군 산내면에 있는 호랑가시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제122호)이 유명합니다. 호랑가시나무는 봄에 꽃을 피우지만 빨간 열매는 이맘때 한창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겨울에 꽃을 피우는 나무로 착각한다고 합니다. 꽃처럼 붉게 타오르는 호랑가시나무 열매는 눈 속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헬기에서 내려다보고 산불 신고를 했을 정도라나요.
겨우살이 나무 아래의 키스 예법은 남성이 여성에게 키스를 할 때는 겨우살이 열매 하나를 하나 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열매가 다 떨어진 나무 아래를 처녀가 지나가면 다음해에도 결혼을 못한다고 믿었다나요. 그렇다면 부안으로 내려가 겨우살이 대신 호랑가시나무 열매를 그녀에게 주면서 이게 마지막 열매라고 위협하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