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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나노과학자 돌턴

원자론 창시 2백주년 기념행사 현지 취재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축구스타였던 베컴과 원자론을 창시한 돌턴의 공통점은? 2백년의 시차가 있지만 둘 다 맨체스터의 발전에 기여한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베컴은 축구공 하나로 맨체스터에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줬다. 그렇다면 스포츠 스타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닌 돌턴은 무엇으로 맨체스터의 발전에 기여한 것일까.

존 돌턴은 1803년 10월 21일 맨체스터 문학 및 철학 협회에서 자신을 세계적인 과학자로 만들어준 원자설을 발표했다. 그는 다양한 원소들은 각자 같은 모양과 무게를 가진 원자이며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다는 원자가설을 세웠다. 또한 원자들이 1:1, 1:2, 1:3과 같은 일정한 비례로 결합한다는 배수비례의 법칙도 발견했다. 이는 화학자들이 간단한 수식으로 화학적 반응을 기술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근대화학의 기초가 됐다.

모든 물질이 궁극적으로 매우 작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로 구성된다는 생각은 기원전 4백년경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가 처음 제안했다. 돌턴은 원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밝혀낸 것. 그래서 돌턴은 ‘근대화학의 아버지’ ‘화학의 언어를 발명한 인물’로 칭송되고 있다.


14일 돌턴이 1793년 맨체스터에서 직업을 구했던 뉴 칼리지가 있던 자리에 크로토 박사(왼쪽)와 맨체스터 시 장(오른쪽)이 돌턴 원자설 2백주년 기념비를 세웠다.


맨체스터를 산업혁명 중심으로


9월부터 12월까지 맨체스터대 박물관에는 돌턴과 그의 업적에 관한 책과 사진이 전시된다.


지난 10월 13일부터 23일까지 맨체스터에서는 돌턴 원자설 2백주년을 기념해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각종 행사가 한창 진행됐다. 맨체스터대 과학기술연구소의 과학사학자 라지쿠마리 존스 여사는 “맨체스터는 원자설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돌턴의 명성을 잘 활용했다”며 “돌턴 덕분에 맨체스터가 산업혁명의 중심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그의 이론은 화학산업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당시 화학업계는 황산을 만들 때 황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했는데 돌턴의 원자량 측정법은 이를 뒷받침했다는 것. 돌턴 역시 기술 컨설턴트로 활동하면서 맨체스터의 발전에 기여했다.

돌턴은 살아생전에 조각상이 세워진 과학자로도 유명하다. 맨체스터 시민들의 존경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1838년 공공 모금을 통해 돌턴의 조각상을 만들었다. 또 그의 장례식에는 무려 4만여명이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돌턴의 원자설은 의외로 기상학 연구에서 비롯됐다. 그는 사망 전날까지 57년 동안 20만회 이상의 기상기록을 남겼는데, 대기 중 여러 기체들의 구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원자설을 만들어냈다.

또 돌턴은 색맹연구에서도 이름을 남겼다. 색맹이었던 돌턴은 처음으로 이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했다. 그래서 돌터니즘(Daltonism)은 색맹을 나타내는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 행사는 단순히 돌턴의 과거 업적만을 칭송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먼저 돌턴은 화학혁명뿐 아니라 미래과학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나노기술의 아버지로도 칭송된다.

영국왕립화학회 회장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해럴드 크로토 박사는 14일 ‘2010, 나노 오디세이’라는 제목으로 이번 행사의 첫 공식 강연을 했다. 크로토 박사는 탄소분자 60개로 구성된 축구공 모양의 분자인 C60(풀러렌)을 발견해 1996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돌턴의 원자설에서부터 비롯된 원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날 나노기술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를 소개했는데, 이 강연은 한달 전에 좌석 예약이 끝날 정도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강연 전날 기자와 만난 크로토 박사는 “물질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구성요소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며 “현대 나노기술도 원자와 분자의 특성을 밝히고 활용한다는 점에서 돌턴은 나노기술의 최초 연구자”라고 말했다.

이번 행사도 돌턴을 통해 미래 세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것으로 평가되는 나노기술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린다는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돌턴 역시 당시 대중들에게 과학을 알리는데 적극적으로 나선 과학자여서 그 의미가 더 컸다.

돌턴은 이미 12세 때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맨체스터에 있는 뉴칼리지에서 1800년까지 수학과 자연철학을 강의했으며, 뉴칼리지가 요크로 옮겨간 뒤에는 다양한 계층의 학생을 직접 가르쳤다. 이때의 학생들이 커서 법조계, 경제계, 산업계의 주요 인사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도 유명해졌다.

크로토 박사는 돌턴의 선구적인 과학대중화 노력을 칭송하면서 “나도 돌턴처럼 많은 대중 강연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크로토 박사는 공식 강연회 전날인 13일 맨체스터 어린이들에게 축구공 모양의 풀러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소개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 뒤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구단의 축구 선수들이 진짜 축구공으로 강연에 온 어린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4일 크로토 박사가 강연을 한 곳은 맨체스터 시청이다. 이곳에서도 돌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시청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돌턴의 조각상이 서있다. 맞은편에는 그의 제자이며 열역학 제1법칙을 발견한 제임스 줄의 조각상이 있다.

돌턴의 시대보다 훨씬 더 과학기술에 의존해 살아가는 오늘이지만, 과학과 사회는 더 멀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이 돌턴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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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박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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