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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배제된 채 기계 액션만 난무 터미네이터는 돌아왔는가

1991년 겨울, 미래의 위협으로부터 인류의 지도자를 구한 터미네이터는 ‘I will be back’ 이라는 대사를 남긴 후 용광로 속에서 장렬하게 산화했다. 부정확한 영어 발음을 구사하는 아놀드 최고의 명대사 ‘I will be back’은 그가 출연했던 몇편의 영화에서 자기 패러디됐다.

코믹영화 ‘솔드 아웃’에서 아놀드는 아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약속한 터보맨을 구하기 위해 장난감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I will be back’을 남발했고, 복제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여섯번째 날’에서는 복제 애완동물을 만들어주는 매장에서 ‘I will be back’이란 대사를 남기며 돌아섰다.
이렇게 ‘I will be back’이라고 낮은 목소리로 외치던 아놀드가 12년 만에 배터리 폭탄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가슴에 품고 돌아왔다. ‘터미네이터 3’의 개봉이다. 그러나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관통하던 정서인 인간과 기계와의 처절한 사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1편에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미래의 저항군 병사 카일 리스가 있었고, 2편에는 막강한 모성애와 숙명으로 무장한 사라 코너가 있었다.

그러나 3편은 기계들끼리 싸우고 부수는 액션으로 끝나고 만다. 인류의 지도자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대신 기계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인다. 이 코너가 전문적인 영화평을 다루는 곳이 아닌 만큼 이쯤에서 영화평은 접고 언제나 그랬듯 다른 곳에서 다루지 않는 재미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터미네이터 2


스카이넷은 존재하는가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인류의 적으로 등장하는 스카이넷은 전략 핵전쟁을 수행하는 인공지능 컴퓨터다. 스카이넷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면 ‘터미네이터 1’의 시대인 198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는 미국과 옛소련이 핵무기 개발 경쟁을 벌이던 냉전 시대였고 국방의 최우선 과제는 적국의 핵 공격으로부터 자국을 지키는 것이었다. 두 나라는 핵공격을 받을 경우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핵 공격으로 보복해 함께 전멸해버린다는 ‘상호 확증 파괴’(MAD, Mutual Assured Destruction)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는 이 ‘미친’(mad) 전략은 전세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인질극으로 핵전쟁에서 승자가 없다는 사실을 상호 인지시킴으로 강력한 전쟁 억제력을 갖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미국의 MD(Missile Defense)는 자국으로 날아오는 미사일을 요격하는 방어 시스템이다. 러시아를 비롯한 국가들이 MD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반세기를 이끌어오던 상호 확증 파괴 전략이 무용지물이 되면서 새로운 군비 경쟁을 유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 확증 파괴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적국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핵무기와 다양한 방식의 운송 수단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수소폭탄과 중성자탄 같은 강력한 핵무기가 개발됐고 대기권 밖에서 떨어지는 대륙간 탄도탄, 도시 하나쯤은 쉽게 초토화시킬 수 있는 전략 폭격기, 어디서 솟구칠지 모르는 전략 핵잠수함 등이 배치됐다.

이런 다양한 핵 보복 수단을 통합 운영하는 시스템이 바로 스카이넷이다. 스카이넷은 핵전쟁의 초기에 전쟁의 지휘부가 폭격을 당해 없어질 경우에도 컴퓨터가 남아 있는 자원을 총동원해 적국을 공격하게 한다는 개념이다. 자국이 이미 전멸해버린 뒤에도 적국을 공격하는 시스템인 스카이넷은 상호 확증 파괴 전략의 가장 강력한 실행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핵전쟁 지휘 컴퓨터는 1983년 개봉된 영화 ‘위험한 게임’(War Games)에도 등장한다. 이 영화는 컴퓨터 게임을 훔치기 위해 국방부 컴퓨터에 접속한 고등학생이 실수로 핵전쟁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스카이넷과 같은 컴퓨터의 존재 여부는 베일에 가려져 있고 수많은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다.

상호 확증 파괴 전략은 강력한 전쟁 억제력을 가지고 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동안 지구의 평화를 지켜준 힘이었다. 그러나 이 전략은 핵무기의 사용 권한을 가지고 있는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이 전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는 취약점을 안고 있다. 그런 상황을 잘 묘사한 영화가 ‘크림슨 타이드’로 핵공격 명령을 받은 상태에서 통신 장비가 망가진 잠수함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무너지지 않는 무어의 법칙

인간과 기계의 전쟁은 과학 소설과 SF 영화의 단골 소재다. ‘터미네이터 3’에서 스카이넷은 전 인류에게 무차별 핵공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영화는 스카이넷이 인류를 공격해야만 하는 필연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스카이넷이 자신을 자각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전부였다.

인간과 기계의 전쟁은 ‘매트릭스 2’의 연결 고리인 ‘애니 매트릭스’에서 상세하게 다뤄지고 있다. 매트릭스 시대 이전의 인류는 기계의 노동력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기계들에게 불복종이라는 마음이 생겼다. 위기 의식을 느낀 인간들은 기계들을 탄압했고 기계들은 중동의 사막으로 추정되는 땅에 ‘제로원’(0과 1이라는 2진수 코드를 뜻함)이라는 국가를 세웠다.

제로원의 기계들은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값싼 비용으로 우수한 상품들을 생산했고 빠른 시일 안에 세계의 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경제 파탄의 위기에 처한 각국의 정부들은 제로원에 경제제재 조치와 해상봉쇄를 감행했다. 제로원은 UN에 대사를 파견해 인류와 기계의 공존을 제시했으나 철저히 무시당했다. 그 결과 전쟁이 시작됐다. 인간과 기계의 전쟁, 그것은 단지 SF의 허구일까? 인간에게 도전할 수 있는 기계가 탄생하려면 다음과 같은 두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인간과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지능과 번식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기계들의 지능은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인 인텔의 공동 창업자 고든 무어 박사는 1965년 ‘컴퓨터칩의 저장용량과 연산처리 능력은 매 18개월마다 두배의 속도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을 주장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물리적인 한계를 내세워 무어의 법칙이 10년 내에 무너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 그리고 집적회로로 발전하면서 무어의 법칙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현재의 상황도 과거와 비슷하다. 많은 과학자들이 10년 안에 무어의 법칙이 무너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과학자들은 양자회로나 3차원 병렬연산칩의 등장으로 무어의 법칙이 지켜질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2020년대의 PC는 인간의 두뇌와 비슷한 능력을 갖게 된다. 2050년이 되면 PC의 연산능력이 전인류의 두뇌를 합친 능력과 비슷해진다. 이때쯤 되면 인간 두뇌의 비밀도 풀릴 것이라 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인간과 같거나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컴퓨터가 등장할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한편 기계도 번식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여기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물론 기계의 번식은 단백질로 구성된 생물의 번식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자신과 닮은 자손을 만들어내는 번식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우리와 마찬가지다. 어머니 기계는 자신의 저장 공간에 마치 인간의 DNA와 같은 자신의 설계도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설계도에 따라 2세를 만든 후 2세에게 자신의 설계도를 복사해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가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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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까운 미래에 인간보다 똑똑한 기계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2. 기계는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
3. 진화의 역사에서 두종이 한정된 자원을 놓고 대립했을 때 대부분 한종의 멸망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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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르면 인간과 기계의 전쟁은 필연적이며 우리는 그 전쟁에서 질 수도 있다. 물론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 수준에 이르기 전에 각국의 정부는 인공지능과 로봇의 개발을 규제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복제의 예와 마찬가지로 불순한 마음을 갖고 있는 소수의 과학자들이 사설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것까지 막기는 어렵다. 미국 카네기멜론대 한스 모라벡 같은 급진적인 과학자는 가까운 미래에 인류가 기계들에게 멸망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며 “인류는 자신의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기계속에 다운로드 해야 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지구에 존재하는 두개의 생태계


터미네이터 1


‘터미네이터 3’에서 봐줄 만한 설정이 하나 있다. 기계의 발전은 막을 수 없고 단지 수년 정도 시간을 연장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기계의 발전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은 진리다. 얼마 전 정부가 발표한 ‘10대 국가적 미래전략 산업’에도 지능형 로봇이 당당히 선정됐다. 지난 8월 10일에는 KAIST에서 개발한 인공지능로봇 아미(AMI)가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의 성화 봉송 주자로 2백m를 달렸다. 머지 않은 미래에 인간과 비슷한 지능을 가진 기계가 등장하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인간과 기계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일까?

먼저 사회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인간형 기계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의 사회와 경제는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초기에는 기계가 인간의 노동(정신적인 노동을 포함)을 대신하면서 기계라는 자본을 가지고 있는 소수가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작용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상적인 경우 모든 생산 활동은 기계가 대신하고 개인들은 경제 활동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상의 실현을 목표로 살아가는 유토피아가 탄생할 수 있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한 얘기다. 기계의 무한한 노동력을 누리기 위해 우리의 사회는 현대의 자본주의보다 발달한 시스템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앞서 말했듯 자신과 같은 개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계는 생명체로 볼 수 있다. 번식을 할 수 있는 기계가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이것은 인간만이 아닌 지구 생태계 전체의 재앙이 될 수 있다. 하나의 생태계에서 물질은 순환하고 에너지는 생태 피라미드의 상부를 따라 흐르며 소비된다. 그런데 기계는 에너지를 소비하지만 지구의 생태계와 물질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지구라는 행성에 전혀 다른 두개의 생태계가 존재하는 셈이다.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는 아무리 강력한 포식자가 등장해도 생태계가 무너지지 않는다. 먹이의 숫자가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포식자의 수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들은 우리와 다른 생태계에 속하기 때문에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태양 에너지를 놓고 무한경쟁을 벌일 수 있다. 결과는 효율이 뛰어난 쪽의 승리로 끝날 것이며 패배는 완전한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 기계로 인해 인류는 물론 지구의 모든 생태계가 파괴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 바꾸려면 닫힌 우주여야


‘터미네이터 3’에는 최신형 미녀 로봇 T-X(왼쪽)가 등장한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두번째 주제는 시간여행이다. 스카이넷이 타임머신을 만들어 역사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스토리 자체가 시작되지 않는다. 시간여행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이것은 굉장히 까다로운 질문이다. 한 과학자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자신의 부모를 죽이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 결과 이 과학자가 사라진다면 우주의 역사는 하나며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백 투 더 퓨처’는 이런 가설을 택했는데, 주인공은 시간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 영향으로 인해 바뀌어버린 현재의 모습을 본다. 이것을 닫힌 우주라 부른다.

만일 자신의 부모를 죽인 과학자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학자가 날아온 미래와 과거가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별개의 우주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을 평행 우주라 부른다. 그렇다면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시간여행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터미네이터 1’에서 시간여행은 역사를 바꿀 수 없었다. 1편에서 위기에 몰린 스카이넷은 존 코너의 어머니인 사라 코너를 없애려고 터미네이터를 과거로 보낸다. 존 코너는 자신의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저항군의 전사 카일 리스를 보낸다. 그 결과 미래에서 온 카일 리스로 인해 존 코너가 잉태될 수 있었고, 터미네이터의 잔해로 인해 사이버다인사가 신형 로봇과 스카이넷을 개발할 수 있었다. 시간여행조차 정해진 역사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터미네이터 2’에서 여전사 사라 코너는 심판의 날을 막기 위해 사이버다인사를 폭파시켜버렸다. 그 결과 심판의 날은 오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심판의 날이 오지 않는다면 존 코너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류의 지도자가 아닌 평범한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이자 아버지인 카일 리스를 과거로 보낼 일도 없을 것이고 존 코너가 잉태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존 코너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두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결국 기계와의 전쟁은 시작되며 존 코너는 인류 저항군의 지도자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라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해석은 역사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존 코너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기계와 전쟁이 일어난 우주와 일어나지 않은 우주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평행 우주론이다.

‘터미네이터는 3’에서 시간여행은 엉망으로 꼬여버렸다. 억지로 꿰어 맞춘다면 1편과 비슷한 닫힌 우주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2편에서 존 코너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도 설명된다. 사이버다인사의 폭파 역시 예정돼 있었고 스카이넷의 연구는 국가의 비밀기관으로 옮겨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가 연기됐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시나리오 작가가 시간여행의 구성을 포기했거나 심오한 우주관이 있던가 둘중 하나일 것이다. 어쨌든 3편에서 최신형 미녀 로봇 T-X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스카이넷의 반란은 실패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터미네이터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존 코너는 인류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편과 매우 흡사한 구조다.

만일 타임머신을 통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단순한 탐사 여행만으로도 우리의 역사는 엄청나게 바뀔 수 있다. 뉴욕의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북경에 폭풍이 몰아친다는 카오스이론에 따르면 지극히 미세한 변화가 전혀 다른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비의 날갯짓에 놀란 파리가 아파트 창문으로 날아들어와 아이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의 등을 간질이는 것만으로도 역사와 다른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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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노성래 온라인게임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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