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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사고가 오류투성이인 이유

합리적 판단의 근원은 감성

아직도 학문 분야를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으로 분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40여년이나 뒤떨어진 학문관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과학기술을 물리학, 생물학, 화학, 기계공학, 재료공학 등의 물질 중심의 학문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30년 쯤 뒤진 과학관을 지녔으며, 최신 과학기술을 아는 사람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이런 사람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일어난 과학 패러다임의 변혁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과학계에는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라 불리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종래의 인간관과 물질관, 학문관과 과학기술관을 대폭 수정시킨 이 변혁은 ‘정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의 마음과 뇌, 컴퓨터를 연결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1950년대를 기점으로 이뤄진 인지혁명을 통해 과학계는 인간 자신과 동물, 컴퓨터, 문화체계 등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틀을 지니게 됐다. 이런 인지적 패러다임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며 그 기초이론과 응용분야를 탐구하는 학제적 과학이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다.

미래과학 주도할 핵심축


20세기까지의 과학이 물질 중심이었다면, 21세기의 과학 은 이를 뛰어 넘어 다양한 학문 분야를 융합해 인간 마음 의 실체를 규명하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두뇌의 좌우반구 분할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신경심리학자 로저 스페리 박사는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과학적 사건을 인지혁명이라고 말했다. 인지과학을 통한 패러다임 변혁의 중요성은 미국 과학재단의 미래과학기술 진단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미국 대통령의 과학기술정책 자문기구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미하일 로코 박사는 미래의 새로운 과학기술 방향의 하나로 인지과학을 들었다(자세한 내용은 2003년 7월 과학동아 특집 1파트 기사 참조). 그는 “미래 과학기술의 기본 틀은 융합과학”이라며 “이 융합과학의 핵심축은 NT(나노기술), BT(생명기술), IT(정보통신기술), CS(인지과학)”라고 밝혔다. 여기서 CS는 ‘Cognitive Science’의 줄임말로, 20세기의 물질 및 기계 중심의 하드웨어적 개념을 넘어 인간의 뇌와 심리·문화적 특성이 함께 고려된 융합과학기술이 추구돼야만 미래 과학기술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지과학은 뇌와 마음과 컴퓨터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추상적 원리를 구현하는 ‘정보처리 체계’(information processing system)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인지과학은 뇌와 마음과 컴퓨터, 그리고 동물에게서 각종 정보처리가 어떻게 일어나고 이런 정보처리를 통해 ‘지’(知, intelligence)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가를 탐구하며, 이 탐구를 통해 인간 및 동물의 마음과 각종 인지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종합과학이다.

20세기 전반기까지의 과학 연구가 인간 밖의 대상인 물질과 생명체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인간 자신이 핵심 연구대상이며 좀더 높은 추상수준의 현상이 과학 탐구의 중심 주제다. 그런데 인간에게서 지(知)는 ‘마음’의 작용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지과학을 좀더 넓게 정의하면 ‘마음의 과학’(the science of mind)이 된다. 좁은 의미의 마음이 아니라, 아메바의 마음, 동물의 마음, 인간의 마음, 컴퓨터의 인공마음까지 포함하며 그 ‘행동’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개념이다. 그래서 인지과학은 종래의 학문 분류를 뛰어넘는 다학문적, 학제적 과학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분야 포괄하는 총체적 과학


인지과학은 심리학과 신경생물학, 뇌과학은 물론 철학과 인류학, 컴퓨터과학까지 다양한 학문분야의 접목이 필요한 대표적인 학제간 과학이다.


인지과학은 신경세포를 비롯해 신경시스템, 인공지능시스템, 개인의 심리, 사회·문화적 현상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현상을 접근해 분석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나 컴퓨터가 인간의 얼굴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망막 수용기 세포나 뇌 시각중추의 특성을 연구하고, 이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접근, 탐색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얼굴 모양을 여러 형태로 조작하거나, 제시 시간 등을 달리하는 인지심리적 실험을 통해서도 연구할 수 있다. 또한 이 연구는 인간이 대상의 시각적 부분 특성을 어떤 식으로 인지하며, 정보를 처리하고 기억하며 또 활용하는가 하는 정보처리적 기법을 통해서도 이뤄질 수 있다.

따라서 인지과학에는 다양한 학문들이 관련되기 마련이다. 인지과정은 마음의 과정이기에 심리학이 필수적이며, 마음을 정보처리적 관점에서 분석하려면 컴퓨터과학(인공지능학)의 역할이 요구된다. 심리현상은 두뇌 및 기타 신경계의 생리적 구조와 기능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신경과학적 연구는 필수적이다. 또한 언어가 인지의 주요 도구이며 형식이고 언어과정이 인지과정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언어학적 연구가 요구된다.

인간의 인지 문제는 인식론의 문제며 새로운 과학으로서 인지과학의 형성은 과학철학의 문제이기 때문에 철학적 연구가 필수적이다. 동시에 인지라는 행위는 인간이라는 종(種)의 특성과 인류문화적 배경 위에서 축적된다는 측면에서는 인류학적 연구가 요구된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인간이란 동물의 진화된 두뇌에서 출현됐기에 진화생물학이 관련된다.

이 외에도 여러 학문 분야들이 직·간접적으로 인지과학과 관련돼 있다. 수학과 의학, 물리학, 로보틱스, 커뮤니케이션학, 사회학, 교육학, 경제학, 행정학, 미학, 음악학, 건축학 등이 인지과학의 주변 학문으로서 인지과학 연구에 관련돼 있다.

합리적 결정은 정서적 판단에 의해

여러 학문 분야들이 얽혀있는 인지과학은 그 동안 중요한 연구 업적들을 축적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인지과학의 결과들이 마치 생물학이나 의학 또는 컴퓨터과학의 독자적 연구결과인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이들 연구는 모두 다양한 학문이 결합된 인지과학의 성과들이다.

일반인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성과는 아마도 좌뇌와 우뇌의 기능 차이에 관한 연구일 것이다. 분할뇌 연구라고 불리는 이 성과는 스페리라는 신경심리학자에 의해 시작됐다. 최근의 분할뇌 연구에 의하면, 좌반구는 태어날 때부터 기능이 정해져 있는 고도로 특수한 언어·논리기능을 소유한 반면, 우반구는 지식의 활용에 더 초점이 있으며, 경험에 기초한 좀더 일반적인(비언어적) 처리와 관련돼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좌뇌는 시간에 강조를 두며 단편적, 분석적 처리를 담당하는 반면, 우반구는 공간적 관계에 강조가 주어지며 정보를 총체적으로 처리한다. 이 외에 좌반구는 친숙한 정보처리, 우반구는 새로운 것의 정보처리에 더 잘 반응한다든지 등 모두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연구 결과들이 많이 발표됐다.

물론 이런 좌우 뇌의 차이는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과제의 성질과 피험자의 성격, 경험 등 여러 변수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한편 동물의 진화 과정에서 정서를 담당하는 뇌 부분이 인지를 담당하는 부분보다 먼저 진화됐으며, 정서 담당의 뇌 영역이 인지 담당의 뇌 영역과 밀접히 연결돼 있다는 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신경인지과학자인 안토니오 다마지오 교수는 정서가 이성적 의사결정 과정의 밑바탕에 있음을 주장하는 이론과 실험결과를 제시했다. 그는 안와전두엽(눈 뒤쪽 머리 앞부분) 피질이 손상된 환자와 정상인을 비교 실험했다. 평화롭고 아늑한 농가 사진(중립적 사진)과 심하게 부상당한 사람, 나체, 처참한 재난 등의 사진(정서적 사진)을 보여준 결과, 정상인은 중립적 사진과 정서적 사진에 다르게 반응했다.
하지만 환자는 두 사진에 대해 동일한 정서적 흥분을 보였다. 이 결과는 안와전두엽이 정서를 인지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어떤 인지적 결정을 할 때 정서가 그 밑바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마지오 교수에 의하면 판단과 의사결정은 어떤 행위의 결과에 대한 정서적 평가에 의해 좌우된다. 즉 결정과 선택에는 대부분 정서가 개입되며, 인간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합리적 결정을 하기보다는 제한된 시간에 빠르게 이득과 비용을 계산해(대부분 무의식적으로) 과거에 효율적이었던 행동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정은 특정 선택과 관련해 신체가 나타내는 반응, 예를 들어 긴장해 땀을 흘린다던가 근육의 이완 정도 등을 참고해 무의식적으로 빠르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의사결정과 선택이 신체의 반응정도에 따라 이뤄진다는 사실은 이성적 판단에 정서적 기억이 필수적인 밑바탕이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편향적이며 오류투성이의 인간


인간의 두뇌는 영화‘마이너리티 리포트’와는 달리 미래의 어떤 상황을 판단할 때 정서적 평가에 따라 좌우 됨이 밝혀졌다.


시각적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연구한 인지과학자들은 아주 중요한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터미네이터는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달리 대상의 윤곽선 이미지를 몇차례 변환시키면서 포착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컴퓨터그래픽 전문가가 이 이미지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이 장면은 30대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인지심리학자 데이비드 마가 연구한 내용을 그대로 빌려다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1980년대 초 데이비드 마가 쓴 책에 이미 터미네이터 시각 이미지의 단계적 변화의 기본 이론과 영상들이 모두 제시돼 있다. 터미네이터의 성공에는 인지과학도 한몫을 한 것이다.

시각정보처리의 연구 외에 인간 사고의 비합리성에 대한 인지과학적 성과도 매우 크다. 인간은 흔히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상황과 처지에 따라 논리적으로 행동하며 치밀한 계산을 통해 의사를 결정한다. 하지만 얼토당토않은 행동을 보이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과연 어느 쪽이 인간의 참모습일까.

인지과학의 성과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는 편향성이 심하며 오류투성이다.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발견된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전염병이 나돌기 시작했다고 하자. 이 전염병은 6백명의 사상자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이 전염병을 대비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상황에 따른 2가지 방안이 제시됐다. 어떤 방안을 택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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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상황 1)
방안 A - 2백명을 구할 수 있다.
방안 B - 0.33의 확률로 6백명을 구할 수 있다.

(제시상황 2)
방안 A - 4백명이 죽을 수 있다.
방안 B - 0.67의 확률로 6백명이 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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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상황 1과 2는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제시상황 1)에서는 방안 A를, (제시상황 2)에서는 방안 B를 선택한다. (제시상황 1)에서는 ‘구할 수 있다’는 표현이 판단기준이 된다. 사람을 구한다는 생각에 0.33의 낮은 확률보다는 2백명을 확실히 구하는 편이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제시상황 2)에서 ‘죽을 수 있다’는 표현이 판단기준이 된다.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4백명이 확실히 죽는 경우보다는 0.67의 확률로 사람이 죽는 경우를 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결과가 이득이냐 아니면 손실이냐에 따라 똑같은 문제에 대해 전혀 다른 판단과 결정을 한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인지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 교수는 이런 인간 판단과 결정의 비합리적 특성을 연구하고, 특히 경제 상황에서 인간 사고의 비합리성을 집요하게 밝혀냈다. 그는 이 업적을 인정받아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이 외에도 수많은 연구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언어 습득에 관한 연구는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말을 배울까, 외국어는 어떻게 학습되며 또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언어와 사고의 관계는 어떠한가 등의 질문에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연구들은 컴퓨터가 음성을 어떻게 인식하며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보처리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등의 이론 연구와 응용 가능한 결과들로 이어지고 있다. 이 결과들은 언어학과 심리학, 컴퓨터과학이 연결된 인지과학적 연구에서 제시되고 있다.

과학적 재난방지의 기본 원리

인지과학의 이처럼 많은 연구 결과들은 여러 유형의 문제상황에 적용돼 해결안을 도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 2월 대구의 지하철 참사나 이번 9월 태풍 매미에 당한 재난은 대부분이 인재다. 이런 재난은 상황 전과 상황 중, 상황 후의 사태 파악과 의사소통, 대처 처리 등에서 인간 요인, 특히 인지적 정보처리가 잘못돼서 일어난 것이다.

이런 상황을 예방하고 처리하는 과제도 실상은 인지과학의 기본원리를 응용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재난 방지 및 처리에 인지과학적 원리가 도입되지 않은 채 주먹구구식으로 처리돼서는 인재의 재발을 방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지과학은 1956년 9월 MIT(미 매사추세츠공대)에서 개최됐던 ‘정보이론 심포지엄’을 계기로 시작됐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60년 심리학자 밀러가 하버드대에 ‘인지학 연구센터’를 설립하면서 제도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세계 각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인지과학연구소를 설치하고 관련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미국 과학재단에서는 매년 인지과학 지원 연구비를 큰 폭으로 늘여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뇌 연구와 연계된 지원이 증가하고 있어 좋은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 인지과학 연구들이 시작됐으며, 1995년부터 연세대, 성균관대, 서울대, 부산대 등의 순서로 대학원 과정의 인지과정 프로그램이 운영중에 있다.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는 현재 거의 정지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시점에서 컴퓨터와 마음, 두뇌와 문화를 연결해 인간의 한계를 창의적으로 극복하려는 인지과학의 시도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미래 과학기술의 틀인 NBIC 융합과학기술의 한 핵심축으로서 인류의 수행능력을 향상시킬 원리를 제공하는 인지과학의 미래는 매우 밝다.

2003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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