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경(陰莖)은 자기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주인은 자기 뜻대로 음경을 발기시키거나 수그러들게 하고 싶어 하지만. 그러다가도 주인이 잠들면 제멋대로 발기해버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음경이란 녀석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시체 해부를 통해 발기시 음경이 피로 꽉 찬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한 장본인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발기 현상은 여전히 수수께끼였고 결국 위와 같이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만다.
현대 의학의 연구 결과 발기는 중추신경계, 즉 뇌와 척추의 완벽한 통제 아래 일어나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성들이 여전히 다 빈치의 주장에 공감하고 있다. 중추신경계의 통제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어차피 우리의 의지가 개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엉뚱하게 발기가 되는 것도 문제지만 꼭 발기가 돼야 하는 때 말을 듣지 않아 낭패를 보는 일이 생기기 시작하면 상황이 심각해진다. 특히 나이가 듦에 따라 이런 ‘고개숙인’ 남자들의 비율이 점점 높아진다. 미국의 경우 40대의 40%, 70대의 70% 정도가 발기장애를 경험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비아그라,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
1998년 비아그라의 등장은 많은 고개숙인 남성들에게 기적같은 소식이었다. 여기저기서 비아그라 덕분에 ‘남성’을 되찾은 사례가 대서특필되면서 비아그라는 전세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 결과 지난해까지 1백15개국 1천7백만 남성들이 무려 7억1천5백만개를 복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화려함 뒤에는 약물의 부작용이라는 어두운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비아그라는 심장마비, 두통, 시각장애 등 상당한 부작용으로 출시 이후 줄곧 논쟁의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부작용이 없는 새로운 발기부전 치료제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많은 연구자들은 그 첫단계로 기존의 약물이 정확히 어떻게 작용해 효과를 내는지 밝히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이 과정을 이해하게 되면 새로운 약물의 구조를 설계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전세계 수많은 연구자들이 참가한 이 레이스에서 최종 승리의 영예는 놀랍게도 국내 연구자들이 차지했다. 영국의 저명한 과학저널 ‘네이처’ 9월 4일자는 비아그라가 작용하는 원리를 원자수준에서 밝힌 우리나라 바이오벤처인 크리스탈지노믹스의 연구 결과로 표지를 장식했다. 차세대 발기부전 치료제를 향하는 첫걸음으로 평가되는 이번 연구의 내용과 의미를 알아보자.
신경 신호 끊기면 발기 안돼
먼저 발기가 일어나는 과정을 잠깐 살펴보자. 주로 시각이나 촉각으로 유발되는 성적 자극은 신경계를 타고 음경까지 전달된다. 음경은 스펀지 같은 음경해면체조직으로 이뤄져 있는데 평소에는 혈액이 많지 않아 조직이 부드러운 상태다.
발기를 일으키라는 신경계의 명령을 받으면 동맥을 둘러싼 평활근이 이완하면서 동맥이 확장돼 피가 몰려들어온다. 반면에 피가 나가는 통로인 정맥이 막히면서 피가 음경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 결과 해면체조직을 가득 채우면서 음경이 커지고 동시에 딱딱해진다. 즉 발기가 되는 것이다.
이때 신경계의 신호를 전달하는 물질이 사이클릭구아노신모노인산(cGMP)이다. cGMP는 필요에 따라 세포내에서 순식간에 만들어지고 역할이 끝나면 역시 바로 분해돼 발기가 풀린다. cGMP를 분해하는 역할은 포스포디에스테레이즈 5(Phosphodiesterase 5, PDE5)라는 효소가 맡는다.
만일 cGMP가 만들어지는 양이 적으면 신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동맥이 이완하지 않고 따라서 발기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PDE5의 작동을 일시적으로 중지시키면 신호를 전달한 만큼 cGMP 농도가 높아질 수 있어 발기가 가능할 것이다. 바로 비아그라가 하는 역할이다.
효소는 촉매활성이 있는 단백질이다. 단백질은 보통 수백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뤄진 덩치가 큰 분자지만 실제 촉매작용은 이 중 아주 일부의 영역에서 일어난다. 이 부분을 활성부위라고 한다. 효소는 이 활성부위에 꼭 들어맞는 물질, 즉 기질에 대해서만 촉매반응을 일으킨다. 효소가 자물쇠라면 기질은 열쇠인 셈이다.
PDE5의 기질인 cGMP가 효소의 활성부위에 자리를 잡으면 물분자 하나가 다가와 반응이 시작된다. 즉 물분자가 cGMP의 인(P) 원자와 결합하면서 cGMP의 고리가 끊기며 구아노신모노인산(GMP)으로 바뀐다. 이렇게 만들어진 GMP가 효소를 떠나면 새로운 cGMP가 활성부위에 다가와 같은 촉매 반응이 계속된다.
효소를 속여 약효내는 비아그라
비아그라의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cGMP의 구조와 서로 비슷한 부분이 있다. 이 때문에 비아그라가 PDE5에 달라붙을 수 있는 것이다. 즉 PDE5는 비아그라를 cGMP로 착각하고 있는 셈이다. PDE5에 비아그라가 붙어있는 한 cGMP는 분해될 염려없이 안심하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cGMP나 비아그라가 실제 어떤 형태로 PDE5와 결합하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크리스탈지노믹스의 연구자들은 X선 결정법으로 cGMP가 결합된 PDE5와 비아그라가 붙어있는 PDE5의 3차원 구조를, 효소를 구성하고 있는 수천개의 원자 하나하나의 위치까지 모두 밝혀냈다. 또 비아그라에 이어 출시된 발기부전 치료제인 레비트라(Levitra)와 시알리스(Cialis)에 대해서도 효소와 결합된 구조를 규명했다.
연구자들은 먼저 사람의 PDE5유전자를 주입한 박테리아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배양해 PDE5를 분리·정제했다. 크리스탈지노믹스의 이재일 박사는 “구조규명이 이렇게 늦은 이유는 일반 배양조건에서 PDE5가 서로 엉켜 결정을 만들 수 있는 상태로 얻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생물을 이용해 사람의 단백질을 얻을때 때때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많은 연구팀들이 결정을 만들어보지도 못하고 이 단계에서 연구를 포기했다. 이 박사 등 연구자들은 숱한 실험 끝에 배양온도를 15℃로 낮추고 특정 화합물을 첨가할 경우 결정을 만들 수 있는 단백질이 얻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렇게 얻은 단백질에 약물을 결합시킨 뒤 이 결합체가 결정을 만들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줬다. 이렇게 만든 결정에 포항 방사광 가속기에서 나오는 강력한 X선을 조사해 회절·산란된 빛의 무늬를 얻었고 이를 분석해 결정내에서 각 원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파악했다. 즉 단백질-약물 결합체의 3차원입체구조를 밝힌 것이다.
구조를 분석해본 결과 예상대로 약물들은 cGMP가 결합하는 효소의 부위, 즉 활성부위와 동일한 부위에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활성부위는 효소가 직접 촉매작용을 하는 부분이다. 비아그라의 경우를 보면 cGMP와 구조가 비슷한 부분이 효소의 활성부위에서 cGMP의 해당 부분과 정확히 겹치는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약물이 발기부전 치료제처럼 효소의 활성부위에 작용해 촉매활성을 변화시킴으로써 약효를 내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정확도가 떨어지면 부작용 생겨
이렇게 밝혀진 정밀한 구조가 부작용이 적은 신약을 개발하는데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먼저 비아그라가 왜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살펴보자.
비아그라는 원래 1980년대 다국적 제약회사인 화이자사가 협심증 치료제로 개발했다. 발기효과는 이 약물의 부작용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별로 관계가 없어보이는 기관에서 동시에 효과가 나타난 것은 심장의 혈관에도 PDE5와 비슷한 PDE3란 효소가 있기 때문이다. 심장의 혈관을 이완시키는 명령을 전달하는 물질 역시 cGMP다. 심장의 혈관에서는 PDE3가 역할을 마친 cGMP를 분해한다. 따라서 PDE3의 작용을 차단시켜 cGMP의 농도를 높이면 심장의 관상동맥이 확장돼 협심증이 완화된다.
비아그라는 바로 PDE3에 달라붙어 그 기능을 억제하는 목적으로 개발된 약물이다. 그러나 임상 과정에서 협심증 치료제로는 효과가 미미하고 예기치 않은 부작용들이 생기면서 방향을 바꿔 뜻밖의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신약 개발 사상 가장 운이 좋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PDE의 유전자는 12가지다. 이 효소들은 모두 cGMP나 이와 비슷한 구조인 사이클릭아데노신모노인산(cAMP)을 분해하는 작용을 한다. cAMP 역시 세포내에서 신호를 전달하는 물질이다. PDE는 인체의 각 기관마다 조금씩 형태가 다른 타입들이 존재한다. 기관지의 세포에는 주로 PDE4, 눈에는 주로 PDE6, 심장에는 PDE3, 그리고 음경에는 PDE5가 많이 분포한다. 이전까지 정밀한 3차원 구조가 밝혀진 것은 PDE4 뿐이다.
PDE는 모두 cGMP나 cAMP를 분해하기 때문에 효소들의 활성부위 구조가 서로 비슷할 것이다. 실제 이번 연구 결과 PDE4와 PDE5의 활성부위 입체구조가 상당히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비아그라는 목표인 PDE5뿐 아니라 이것과 구조가 비슷한 다른 효소들에도 작용함으로써 여러 부작용을 유발하게 된다. 즉 PDE3에 작용해 심장의 혈관을 지나치게 이완시켜 저혈압이나 심장마비를 유발하고 PDE6에 붙어 시각 신호를 교란시켜 색각장애 등이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면 비슷한 구조를 갖는 효소들 중에서 특정 효소에만 아주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약물을 설계해야 한다. 발기부전 치료제의 경우 PDE5만 꼭 집어내야 한다. 목표가 되는 효소의 정밀한 입체구조가 먼저 밝혀져야 하는 이유다. 이번 연구 결과를 보면 이런 가설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있다.
지난해 출시된 릴리 아이코스사의 시알리스는 비아그라보다 선택성이 높아 부작용이 적을 것으로 평가된 약물이다. 실제로 시알리스는 심혈관 질환 환자를 포함한 임상시험에서도 별다른 부작용이 보고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자들은 발기부전 치료제와 효소가 결합된 구조를 비교한 결과 비아그라보다 시알리스가 PDE5에 더욱 깊숙이 결합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결국 목표가 되는 단백질의 정밀한 구조를 밝힌 뒤 여기에 정확히 들어맞는 약물을 설계할 경우 부작용이 없는 이상적인 약물에 가까운 신물질을 개발할 확률이 아주 높아진다. 이처럼 특정 질환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기반으로 신약을 개발하는 과정을 ‘구조기반약물디자인’(SBDD, Structure-Based Drug Design)이라고 한다(자세한 내용은 과학동아 2002년 4월호 ‘사이버 공간에서 특효 약물 디자인’ 참고).
크리스탈지노믹스의 이정규 이사는 “이번 연구를 통해 차세대 발기부전 치료제를 개발하는데 필요한 핵심기술과 정보를 확보했다”며 “따라서 제2의 비아그라가 한국에서 나올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구조기반약물디자인의 성공 사례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약물은 대부분 우연한 발견이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탄생했다. 실제로 아직까지 정확히 어떻게 인체에 작용해 약효를 내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쓰고 있는 약물들도 많다. 그러나 10여년 전부터 선진 제약업체들은 건축물을 설계하듯이 약물의 구조를 정밀하게 디자인하는 기법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그 결과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뛰어난 효과를 보이는 신약이 나오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경우는 20세기 공포의 질병 에이즈의 치료약으로 개발된 프로테아제(protease) 억제제다. 에이즈 바이러스의 단백질 분해 효소인 프로테아제는 바이러스의 생존에 필수적인 단백질이다. 이 단백질의 입체 구조가 1989년 X선 결정법에 의해 밝혀졌고, 이 구조를 바탕으로 치료약이 개발돼 1990년대 중반부터 억제제가 시판되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의 1997년 상반기 에이즈로 인한 사망자는 1996년 상반기에 비해 44%나 줄었다. 이제 선진국에서는 에이즈가 당뇨병이나 고혈압같은 일종의 만성질환으로 여겨지고 있다.
1999년 길리아드(Gilead)와 바이오타(Biota)라는 벤처회사들은 뉴라미니다아제(Nuraminidase)라는 단백질의 구조를 이용해 독감약 타미플루(Tamiflu)와 렐렌자(Relenza)를 개발했다. 뉴라미니다아제는 인플루엔자(독감) 바이러스가 체내에서 복제·증식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작용을 하는 효소다. 따라서 이 단백질을 저해하면 바이러스의 증식이 억제되므로 독감을 치료할 수 있다. 이때까지 독감을 예방하는 백신만 나와있을 뿐 독감에 걸렸을 때 치료하는 약물은 없었다. 따라서 이들 독감 치료제는 새로운 개념의 획기적인 약물이다. 현재 다국적 제약회사인 로슈(타미플루)와 글락소스미스클라인(렐렌자)이 전세계 판매권을 사들여 시판하고 있다.
기적의 항암제로 알려진 만성골수백혈병 치료제 글리벡도 여기에 해당한다. 글리벡은 만성골수백혈병 환자가 갖고 있는‘Bcr-Abl’이라는 비정상적인 단백질의 기능을 억제하는 약이다. Bcr-Abl은 백혈구를 무한정으로 분열시켜 백혈병을 일으킨다. 스위스의 노바티스사는 이 단백질의 3차원구조를 활용한 디자인을 통해 선택성이 높은 치료약 글리벡을 설계했다. 대부분의 항암제들이 머리가 빠지는 등 심각한 부작용이 있는데 비해 글리벡은 부작용이 거의 없고 치료 효과가 높아 전세계적으로 수요가 엄청나다. 백혈병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던 환자들에게 이 약은 삶의 희망이 되고 있으며, 2001년 5월 시판된 지 불과 8개월만에 2천억원 이상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