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명탐정 셜록 홈스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이 있다. 깔끔한 실크 모자와 외눈안경, 단단한 지팡이와 근사한 망토 차림의 멋쟁이 신사. 졸부들의 값비싼 보석이나 미술품을 훔치고, 살인은 절대 하지 않으며, 도둑질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현대판 로빈후드. 머리는 누구보다 차갑지만 여성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유쾌한 로맨티스트. 프랑스 작가 모리스 르블랑에 의해 탄생된 괴도 아르센 뤼팽은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1890년대 영국 잡지 ‘스트랜드 매거진’에 연재된 셜록 홈스가 큰 반향을 일으키자, 자존심이 상한 프랑스는 홈스에 대항할 만한 프랑스적 영웅을 찾는다. 파리의 쁘띠 부르주아층을 대상으로 심심찮게 재미를 보던 잡지 ‘주 세 투’(Je sais tout, 나는 다 안다)의 발행인이었던 라피티는 아직 실력은 인정받지 못했지만 신문에 꽤 많은 글을 기고해오던 작가이면서 자신의 친구이기도 한 모리스 르블랑에게 셜록 홈스 시리즈에 필적할 만한 추리소설을 써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이를 수락한 르블랑이 1905년 7월 처음 세상에 선보인 작품이 바로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라는 짤막한 단편이다.
이 작품은 발표 즉시 대단한 성공을 거뒀는데,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기존의 현학적이고 고지식한 탐정들의 빈틈없는 추리에서 벗어나, 엉뚱하면서도 기상천외한 재주를 부리는 호쾌한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 그리고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푹 빠질 수밖에 없는 뤼팽의 매력 만점 카리스마. 여기에 주인공이 경찰에 체포되는 것으로 시작하는 독특한 설정도 뤼팽의 인기에 한몫을 했다.
작가 르블랑은 1905년부터 1935년까지 30년 동안 4개의 단편집을 포함해 21권의 뤼팽 시리즈를 출간하면서 프랑스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인정받는다. 비록 플로베르나 모파상처럼 순수문학에서 인정받는 소설가가 되지 못하고 대중소설 작가로 만족해야 했지만, 57살이 되던 해 뤼팽이라는 프랑스적 영웅을 탄생시킨 공로로 프랑스 최고 훈장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게 된다. 프랑스인들이 왜 그토록 뤼팽에 열광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도둑의 문화사’를 쓴 일본 고치대의 노우치 료조 교수에 따르면, 나폴레옹 이후 영웅에 목말라하던 프랑스의 영웅숭배주의적 욕구가 뤼팽이라는 출구를 통해 분출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감옥에서 보낸 협박편지
아르센 뤼팽은 50여 사건을 통해 수많은 보석과 골동품, 미술품 등을 훔친 완벽한 도둑이지만, 그가 1백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소설처럼 멋지게 사건을 처리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범죄트릭은 1백년 전에는 누구나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만, 과학수사를 하고 있는 요즘이라면 쉽게 덜미를 잡힐 만한 트릭이었다. 그가 저지른 범행현장에 가니마르 형사나 헐록쇼메스탐정 대신, 21세기 형사가 출동했다면 뤼팽의 긴 꼬리는 쉽게 잡혔을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가 처음으로 저지른 미술품 도난 사건에 관한 에피소드 ‘감옥에 갇힌 아르센 뤼팽’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프랑스 세느 강변 근처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깊은 물살로 둘러싸인 ‘말라키 성’이라는 외진 성(城) 하나가 있었다. ‘사탄 남작’이라는 별명을 가진 나탄 카오른 남작이 이 성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아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다. 일종의 졸부라고나 할까. 카오른 남작은 이렇게 모은 돈으로 루벤스 그림 3점과 와토 그림 2점 등 고가의 미술품을 사서, 큰 살롱(거실) 한복판에 전시해뒀다. 늘 그는 이것들을 도난당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아무도 집에 들이지 않은 채 혼자 성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편배달부가 등기우편으로 온 편지 한통을 전한다. 발신자는 바로 아르센 뤼팽. 그 편지에는 남작의 호화 살롱에 걸려있는 루벤스와 와토의 작품 등을 잘 포장해 8일 이내에 바티뇰역 내 사서함으로 부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만약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9월 27일 수요일 자정 근처에 직접 챙겨가겠다는 협박과 함께.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 아르센 뤼팽이 감옥에 수감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전 에피소드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에서 가니마르 형사가 뤼팽을 열차에서 체포해 감옥에 처넣었는데, 어떻게 감옥에 수감된 죄수가 협박편지를 보내고 말라키 성의 그림들을 훔쳐가겠다고 협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불안감에 휩싸인 카오른 남작은 가니마르 형사가 자신의 마을에 휴가차 왔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고 그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한다. 뤼팽이 예고한 27일 밤을 자신과 함께 보내면서 그림을 지켜준다면 3천프랑을 주겠다는 제의와 함께. 가니마르 형사는 감옥에 있는 뤼팽이 어떻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냐고 하면서 예정된 시간에 자신의 두 조수와 함께 말라키 성을 지켜준다.
밤을 꼬박 샌 카오른 남작은 아무 일 없는 듯 조용히 아침이 밝아오자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이미 사건은 일어난 후. 값비싼 그림들과 몇몇 고급 장신구들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모든 창문은 안으로 닫혀 있었고, 비밀통로도 없었으며, 밤새 미술품을 지키던 가니마르 형사의 조수 두명은 누군가에 의해 수면제를 먹게 된 탓인지 의자에 앉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감옥에 있던 아르센 뤼팽이 탈옥한 뒤 이 성에 잠입해서 그림들을 훔쳐갔다는 말인가.
1백년 전 고안된 지문확인법
이 사건의 첫번째 의문은 감옥에 있는 아르센 뤼팽이 이 사건에 실제로 개입한 것인지, 아니면 제3의 인물이 뤼팽을 사칭해 저지른 범죄인지 가려내는 일이다. 소설에서는 가니마르 형사가 감옥으로 찾아가 뤼팽에게 ‘당신이 한 일이오?’하면서 물어보지만, 요즘이라면 제일 먼저 등기우편으로 온 편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넘겼을 것이다. 만약 뤼팽이 감옥에서 편지를 써서 몰래 부쳤다면, 우표를 풀이나 본드 대신 침으로 부쳤을테고 그러면 우표에 묻은 타액이나 편지에 묻은 지문을 조사하면 뤼팽의 개입 여부를 알 수 있다.
지문이 잘 보이지 않는 경우에는 몇몇 도구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편지 종이나 마분지 같은 껄끄러운 표면에 요오드, 닌하이드린, 질산은 같은 화학물질을 묻히면 지문이 순간적으로 드러난다. 요오드 거품은 신체의 지방과 반응하기 때문에 지문을 일시적으로 눈에 띄게 하는데, 이런 사실은 뤼팽이 활동하던 1백년 전부터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가니마르 형사도 해볼 수 있었던 방법이다.
닌하이드린이란 화학물질은 땀 속에서 주로 발견되는 아미노산이나 단백질 분자와 반응해 지문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1950년대 이후 지문 조사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화학물질이다. 질산은 역시 신체의 염분과 반응해 소금을 형성해서 지문을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협박이나 서류 도난 등 점점 흉악한 사건들이 늘어나면서 요즘 형사들은 좀더 첨단기술을 이용해 편지에 화학물질을 묻히지 않고도 지문을 드러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레이저나 자외선 램프, 또는 ALS(Alternate Light Source)라는 특수보안경 장치를 이용해 편지에 묻은 지문을 검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ALS 보안경을 쓰고 특정 파장의 불빛을 쬐면서 관찰하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지문들이 뚜렷이 나타난다.
우표에 묻은 타액을 DNA 검사하는 방법은 좀더 확실하게 뤼팽의 사건 개입 여부를 알아내는 방법이다. 고전적인 추리소설에는 협박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데, 요즘같으면 쉽게 덜미를 잡힐 만한 대담한 소행이라 볼 수 있다.
“접촉한 물체는 흔적 주고받는다”
두번째 의문은 밀실트릭의 핵심으로서 범행이 내부자의 소행인지, 아니면 외부자의 침입에 의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미술품이나 장신구처럼 부피가 많이 나가는 물건을 도난당한 경우에는 그것을 들고 나간 통로에서 지문이나 발자국, 머리카락 같은 작은 단서를 찾아 범인의 신원을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약 발견되는 지문이나 머리카락이 모두 밀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것이라면, 범인은 외부자가 아니라 내부자일 가능성이 아주 높게 된다.
1백년 전 셜록 홈스라면 아마 돋보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건현장을 조사했겠지만, 요즘 FBI 형사들은 특수필터를 통해 모발을 찾아낼 수 있는 휴대용 진공청소기를 이용하고 있다. 물론 넓은 스카치 테이프를 이용해 현장을 청소하는 고전적인 형사도 있다.
머리카락을 포함해 모발(毛髮)을 증거로 사용한 최초의 사람은 공교롭게도 뤼팽의 나라 프랑스의 범죄학자 로카르 박사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로카르의 법칙’으로 법의학 분야에서는 선구자적인 위치에 있는 학자다. 로카르의 법칙이란 접촉한 모든 물체는 서로 흔적을 주고받는다는 내용이다. 즉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접촉하거나 어떤 장소에 가면 그 사람이나 장소에 반드시 모발이나 지문, 발자국 같은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특히 모발은 쉽게 떨어질 수 있다. 미술품 도난사건처럼 무거운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라면 더더구나 그럴 것이다. 만약 범행장소에서 어떤 사람의 모발이 발견됐다면 그가 그 범행장소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나 FBI 법의학연구소에서 제출된 증거자료를 가장 먼저 받아보는 곳도 바로 모발-섬유 부서다. 모발이나 섬유는 쉽게 떨어지거나 없어질 수 있기 때문에 온도와 습도가 잘 조절된 밀폐공간에서 다뤄진다. 각 증거들 밑에 하얀 종이를 붙이고 특수 핀셋으로 옮기면서 현미경으로 모발을 조사한다. 미국의 경우 FBI 모발-섬유 부서가 1년에 다루는 범행현장의 모발 증거는 무려 2천5백종. 이처럼 모발은 범행현장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으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증거물이다.
모발은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숙련된 모발 담당자는 모발만 보고도 그것이 사람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 백인인지 흑인인지, 신체의 어느 부분에서 나온 것인지, 심지어 모발의 주인이 병을 앓고 있다거나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거나, 마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최근 발달된 유전자 분석 방법을 이용하면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모발로 신원 확인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살롱의 그림 밑에서 발견된 모발이 뤼팽의 것인지, 아닌지까지도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모발 뿌리 없으면 성구별 불가능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실은 모발의 뿌리가 없으면 주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전혀 구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 모발의 대부분은 케라틴이라는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하며, 모발 주인의 생물학적 정보는 모발을 뽑았을 때 끝부분에 하얗게 보이는 뿌리인 모근과 모구에 담겨있다. 모근과 모구는 혈관으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 모발을 성장시키는 모모세포와 모유두로 이뤄져 있다. 모발 주인의 구체적인 생물학적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모구에 위치한 모모세포를 관찰해야 한다. 반면 술이나 담배, 마약 등을 복용할 경우 케라틴 단백질층에 그 성분이 남기 때문에, 약물복용 정보는 모근이 없는 모발만으로도 알 수 있다.
아마도 말라키 성의 중앙 살롱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이나 지문 등은 모두 카오른 남작이나 가니마르 형사, 그리고 조수 두명의 것들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침입해 미술품을 가져간 것이 아니라 이들 중에 범인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범인일까. 궁금하시면 직접 책을 읽어보시라. 정답은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의 두번째 에피소드 ‘감옥에 갇힌 아르센 뤼팽’에 들어있다.
중국 속담에 ‘모든 것은 결국 머리카락 한올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체모나 머리카락이 한사람을 법의 이름으로 심판할 만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뤼팽이 탄생한지 1백년이 지난 지금 점점 더 날렵하고 용의주도한 도둑들이 튼튼한 보안망을 뚫고 값비싼 미술품이나 보석, 현금 등을 훔치러 오늘도 담을 넘고 있지만, 그들이 떨어뜨리는 한올의 머리카락이나 발자국 하나, 지문 하나는 형사들에게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한올의 모발도 남기지 않겠다고 자신하지 말라. 접촉한 모든 물체는 서로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니까.
변장술의 귀재 프랑스판 신창원
뤼팽에 대해 두가지 사항만 짚고 넘어가자. 하나는 뤼팽이 현대에 살았다면 그의 복장이 너무 튀어서 쉽게 잡혔을 거란 추측을 하기 쉬운데, 그것은 사실과 좀 다르다. 물론 외눈 안경과 지팡이, 실크 모자와 나비 넥타이, 근사한 망토 등 뤼팽의 복장은 당시에도 상당히 튀는 옷차림이긴 했지만, 실제로 뤼팽이 소설에 이런 옷차림으로 등장한 적은 의외로 많지 않다. 실제로 뤼팽은 형사나 탐정의 눈을 속이기 위해 남다른 변장술로 신출귀몰한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에 그를 복장으로 알아채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대도 ‘신창원’쯤 된다고 할까. 그러니 여간해서 고속버스 터미널 부근에 붙어있는 몽타주 사진으로 그를 알아내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또 하나는 ‘어떻게 뤼팽이 도둑의 길로 들어서게 됐는가’라는 문제다. 일종의 범죄동기에 관한 의문인데, 소설에 작은 단서가 나온다. 뤼팽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와 함께 귀족 친척의 신세를 져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런데 어머니가 친척들로부터 하인처럼 냉대 받는 모습을 보고 앙갚음을 하기 위해, 친척이 가보처럼 여기던 목걸이를 훔친 것에서부터 뤼팽의 도둑질이 시작됐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 6살. 그 에피소드는 뤼팽의 도둑질 재능이 천부적인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그가 도둑질을 시작하게 된 동기에는 가정사적인 배경이 포함돼 있음을 들려준다.